오월의 고향 그곳에는

 

   박연희 수필가/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서울=동북아신문]

오월이면 생각나는 고향 하늘이 있습니다.

고향 그곳에는 지금도 그 시절 모습이

눈에 아련히 떠오릅니다.

 

꿈을 꿉니다.

어릴 때 살던 고향엘 갔습니다.

 

푸르른 보리밭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5월

아카시아 꽃향내 하얀 찔레꽃의 청초한 향기로움

코끝을 스친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이 있습니다.

 

그림 같기만 하던 고향을 꿈속에서 봤습니다.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 그대로 살고 있는 정든 고향을

 

고향의 오월은 먼 산에 뭉게구름 피어나고

하얀 찔레꽃 하얀 아카시아 꽃 푸르른 보리밭

지금 그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접어두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가 보고 싶습니다.

5월 하얀 사과배꽃이 만발하는 고향을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중국항공사의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비행기에 오르니 한족 승무원들이 웃고 떠들면서 아예 손님을 무시한 채 자기네들끼리 한쪽에 몰려 있었다. 한 시간 후 도시락을 받았지만 그다지 정교하지도 않고 맛도 별로였다. 음료수 한 잔과 물 한 컵을 마셨지만 멀미약 탓인지 자꾸만 목이 말라들었다. 다시 물 한 컵을 요구했지만 남자승무원은 못마땅한 눈길을 주더니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물 구경은 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고향에 착륙하여 전등불이 희미한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마치 감옥에 끌려가는 죄수들 같았다.

 연길시내 모습
이틀 후 퇴직금 때문에 보험회사에 찾아갔다. 보험회사 대청에 붙여놓은 공문이라도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한 장도 볼 수 없었다. 한족 공무원에게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 퇴직금을 받기 위해서는 한해에 한 번씩 지문을 찍는다고 하는데 어떤 수속이 필요한가고 물었더니 집에 가서 컴퓨터에 입력해 보면 설명이 다 나온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컴퓨터로 확인하라니 할 말이 궁해졌다.

그 후 의료보험카드를 재발급 받으려고 해당기관을 찾아갔더니 지금은 중지돼 있는데 올 하반기 언제쯤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병을 치료하려고 고향으로 왔는데 이런 난국에 부딪치니 속이 타들어 갔다. 요행 보험증으로 입원할 수 있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카드가 없으면 환자가 선불하고 퇴원 후 영수증을 가지고 보험공사에 가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드를 잘 보관하지 못한 내 잘못이니 이 또한 참아야 했다.

길가의 행인들을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빨간 불이 켜지든 말든 마구 도로를 질러가던 사람들이 지금은 신호등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참지를 못하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이 길 중간까지 갔을 때에야 파란불이 켜졌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사아저씨들이 이런 사람들에 익숙해져서 요지조리 사람들을 피해서 운전을 잘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길시에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모아산은 색다른 풍경이었다. 모아산으로 통하는 몇 개의 버스가 있는데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이곳처럼 시내에서도 도로규칙을 지킬 수 있는 그날이 멀지 않으리라 믿는다.

시장에 가려고 버스에 올랐는데 여전히 시설이 낡고 위생이 엉망이었고 서비스가 잘 돼 있지 않았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멘트는 북한말도 연변말도 아닌 이상한 어투였다. 버스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줄지 않았다. 높은 소리의 통화내용 때문에 그 사람의 일정이 정확하게 주위의 사람들한테 전달되었다.

약속장소에 늦어져서 택시를 탔는데 앉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랫동안 세척하지 않은 의자에서 나는 냄새인지 아니면 끌신에 잘 씻지도 않은 기사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사들이 방송을 높이 틀어놓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손님한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던 옛날 모습이 그대로라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택시요금이 아직은 오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고향은 고향인데 불편한 진실에 실망이 들었다. 고향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연변냉면을 먹게 되었다. 가위를 왜 안주냐고 서빙에게 물었더니 아들애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하는 말이다.

“어머니 한국 갔다 온 티를 꼭 내야 합니까?”

그래서 억지로 먹으려고 했더니 도저히 옷에 국물이 튈 것 같았고 더구나 긴 국수를 이빨로 끊으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참지 못하고 주방에 찾아가 가위를 가져다 국수를 끊어서 먹었더니 조카애가 곁에서 또 한마디 한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던 자기 시어머니도 하루 종일 한국은 좋은데 중국은 아니라고 하면서 불평이라고 했다. 중국에 있을 때는 가위가 없이도 국수를 잘 먹었다는 사실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나 친척들을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붐비고 에어컨이 없어 무덥고 단칸방이 없는 곳이라 복잡해서 어떻게 먹었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후부터 약속을 잡을 때면 음식은 좀 못해도 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말씨부터 옷단장 그리고 의식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가지런히 줄을 서서 모아산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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