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발원지를 찾아서

▲ 두만강 발원지 숭선에서 삼겹살을 구어 먹기 위해 두만강 물에 쌈을 싸 먹을 채소를 씻었다. 오른쪽 필자인 박연희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서울=동북아신문]고향에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중에서도 중학교 동창생들과의 만남이 제일 편하고 즐거웠다. 그들은 흔쾌히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동행해 주었다. 두만강 700리 답사라고 거창하게 시작을 했는데 첫 코스가 숭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숭선은 화룡시 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고 물 좋고 산 좋은 고장이다. 숭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120.5㎞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변강 오지마을이다. 숭선의 총 면적은 538.5평방킬로미터가 되며 경작지 면적은 111헥타르가 된다. 숭선은 해발 800~1300m가 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백두원시림에 접해 있어 귀중한 특산품과 약초가 많이 나오는 곳이다. 숭선 총 인구의 73%를 조선족이 차지하고 있다.

연길에서 거의 1시간 넘게 달려 숭선에 도착했다. 강가의 한 정자에 들어가 우리는 도시락을 풀었다. 나와 다른 한 동창생은 강가에서 오이와 쌈 채소들을 씻기 시작했다. 6월의 두만강 상류는 비록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시원하여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미니김밥에 김치, 지글지글 소리 내는 삼겹살과 쌈 채소들, 오이와 잡채볶음, 막걸리와 연변맥주, 매운 닭발과 입쌀밴새……. 풍성한 음식을 놓고 우리는 학창시절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자 밖에서 주룩주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만강을 사이 두고 있는 중국의 군함산과 조선의 옥녀봉이 빗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 옥녀봉 바로 밑에는 맑고 푸른 두만강이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두만강의 발원지에 속한다.

▲ 중학교 동창들과 숭선을 찾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필자(오른쪽).
두만강 총길이는 525킬로미터인데 폭이 가장 좁은 곳이 바로 숭선에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최대의 강인 두만강은 화룡시에서 발원하여 용정, 도문, 훈춘 등 4개시를 흘러 지나며 방천의 토자비를 지난 후 러시아, 북한 변계구간 15킬로미터를 더 달려 북한 동해로 흘러든다. 두만강은 발원지로부터 삼합진까지를 상류, 삼합진에서부터 훈춘시 영안진 구간을 중류, 그 아래를 하류라고 부른다.

우리는 비가 잠간 끊긴 사이에 두만강 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북한으로 통하는 고성리(古城里) 국가도로 통상구가 보였다. 이 고성리 하관은 두만강 상류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통상구일 뿐 아니라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북한의 양강도를 직접 잇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고성리는 북한 양강도 대홍단군의 삼장리(三長里)와 두만강 제1교(橋)로 연결되어 있다. 다리 건너편에 있는 북한쪽에는 중국운수용 빨간색 트럭과 북한 군인들이 몇 명씩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에 또다시 먹장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숭선으로 올 때 검역이 심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에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한참 달려서 간 곳은 남평진 서남부에 있는 호암유람구였다. 바로 눈앞에 북한 함경북도 무산이 있는데 아시아에서 제일 큰 노천철광이 무산에 있다. 이 무산광산은 북한의 한 관료가 50년간 개발권을 중국에 주었다는 설도 있다.

▲ 윤동주생가 표지석
세 번째 코스는 새롭게 단장된 윤동주생가였다. 2012년 연변에서는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고 ‘국가 AAA급’ 관광지로 지정했다. 생가의 입구에는 중문과 한글로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대형 표지석이 서 있었다. 부지면적이 근 1만평방미터에 달하는 윤동주생가의 확장공사는 인민폐 450만 위안을 투자하여 담장, 대문 등을 새롭게 세우고 정자와 정자길도 만들었다.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윤동주시비, 고풍스럽게 지은 168평방미터 되는 윤동주 전람관 등을 주축으로 들어가는 길 양 켠에는 자연석과 경관 등에 한글과 중문 두 가지 문자로 윤동주 시 119수를 새겨 넣고 있었다. 또 윤동주의 일생을 6개 부분으로 나눠 화폭에 담은 그림을 돌에 새긴 석판화, 대표작 서시와 함께 학사모를 쓴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새긴 석상 등도 세웠다.

오늘날 연변의 문인들은 윤동주 시인을 기려 용정 중학교와 연길시민공원에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고 윤동주문학상을 세우고 윤동주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추모사업을 활발하게 벌리고 있다.

2006년에 미국 국적의 한 여류작가를 모시고 윤동주생가를 찾았는데 그날도 비가 억수로 쏟아져 지프차가 흙탕길에 빠져 오르막을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에 앉았던 연변여성 몇몇이 얼른 차에서 내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차를 밀었던 생각이 났다.

윤동주 생가에서 나와 20분 넘게 걸어서 동산공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처음으로 찾아갔다. 묘소로 가는 길은 끝없이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고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한가롭게 떠가고 좁은 흙길 옆으로는 들꽃들이 눈물겹게 반겨준다. 중문과 한글로 된 문화재보호단위 기념석이 윤동주 묘소 양쪽에 서 있고 누군가가 묘소 앞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놓았다. 윤동주묘소에서 돌아오는 길은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춤추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윤동주생가 뒤편으로 얼마 안가면 안중근 의사가 두 달 동안 사격연습을 했고 윤동주 시인이 늘 시를 읊었다는 문암골 선바위가 펼쳐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와 옛 성벽흔적이 남아있는 선바위 정상에 오르니 산 아래로 굽이굽이 육도하가 흐르고 저 멀리로 명동마을이 보이며 용정 시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문득 선바위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속절없이 아름다웠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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