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 수필가
[서울=동북아신문]만약에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으리라. 그러면서 두려움 속에서 준비 없는 이별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번 죽는 건 정해진 삶의 수순이고, 또 누구나 종용하거나 재촉하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이지만 죽음을 생각 하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니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힘들더라도 내 삶을 껴안고 최선을 다해서 가야 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우리의 예의가 아닐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사십대까지만 해도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아 왔는데 50대가 되니 삶에 대한 의미를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고, 6,7십대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이 건강한 사람이 최고라고. 나도 50대 줄을 서고 보니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40대까지는 두려운 것이 없었고,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자신감 넘쳤는데 50대에 들어서고 보니 마음은 점점 약해지고 욕심도 조금씩 줄어들고, 예전에 용서 못하던 일들도 너그럽게 대하게 된다.

언젠가 나는 대상포진(帶狀疱疹) 이라는 병에 걸려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대상포진인 것을 몰라서 체한 듯한 느낌이 들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둬 번 맞았다. 하지만 효과는 없고 옆구리가 이상하게 콕콕 쑤셨었다. 나는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날은 저물어 가고 그 이튿날이 휴일이라 큰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응급실까지 갈 상황은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더 아플 것 같아 나는 아픈 옆구리를 붙들고 산책길에 나섰다. 예전에는 산책길에 나서면 지나가는 여자들의 옷과 몸매에 신경을 쓰면서 몸매가 예쁜 여자들을 보면 같은 여자라도 눈길이 끌리고 마음속으로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지만, 아프고 보니 뚱뚱하든 못생기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만약 나쁜 병에라도 걸렸으면 어떻게 할까? 병에 좋은 병이 어디 있으랴만…지금까지 해놓은 일보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데…내 삶에 별로 남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앞을 가리여 더는 힘겨운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나는 잡풀 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속으로 못된 병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 이튿날 나는 두려움을 안고 큰 병원을 찾아 갔다. 진료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에 지금까지 걸어온 날들과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그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었고, 만약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지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진료순서가 되자 긴장된 마음을 안고 진료실에 들어섰다. 의사선생님은 증상을 듣고 보자마자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을 했다. 처음 들어 보는 병명에 나는 당황해 하며 의사선생님께 되물었다.
“그게 무슨 병인데요? 고칠 수 있는 거죠?”
의사선생님은 웃으시며 “그럼요, 낫는 병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고 통증이 심할겁니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우선 나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다른 것 생각할 겨를 없이 활짝 웃었다. 천금만금의 시름이 싹 가셔졌다. 

의사선생님은 진통제와 항생제, 바르는 연고를 처방해 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근 열흘 동안 약을 복용함과 동시에 아픈 옆구리를 붙들고 매일 4키로 씩 걸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치료한 결과 거의 20일이 되니 대상포진은 완전히 나았었다.

그 후부터 삶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이 무시로 생겨나면서 나로 하여금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로 갖게 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과 꼭 해야 할 일들, 내가 고쳐야 할 버릇들,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이런 것들이 나의 일상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하였으며, 그에 따르는 실천 방법도 고민을 하게 되었다. 힘들고 마음이 착잡할 때면 가끔씩 그 메모장을 펼쳐보군 했다. 그러면서 욕심은 줄이기로, 성격은 유연해지기로, 그리고 예전에 용서가 안됐던 많은 일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대상포진은 나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주었지만, 또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적지 않은 인생철리를 깨달았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건강이며, 평시에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변화 많은 삶의 흐름 속에서 어찌 좋은 일만 있으랴!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상포진처럼 이런저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피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고통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그 이후에는 더 견강해질 수 있으며, 내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인仁, 의義, 예礼, 지智의 네 가지 덕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분투한다면,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많이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 주는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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