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련 김인섭 칼럼니스트
[서울=동북아신문]이 동네의 길이 막히어 형편없다고 타발을 늘어 놓은지 어느 땐데 더 형편없어질 뿐 나아질 낌새가 안 보인다. 그런데 시민들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더 덤덤해 지고 두덜렁거리던 불평이 구름같이 사라지고 있다.길에 나서면 차량의 동작이 꿈뜨기로 쩔뚜배기 거북의 걸음이 부러울 구경감인데도 차에 실려 <굽도 젖도 못하는> 승객들은 말하다 맥빠졌는지 용케도 감내하는데 아마 불가피적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모양새이다. 생물이 환경의 변화에 응화(应化)하는 적응형질(适应形质)의 작용이겠다고 생각했다.
 
각설하고, 차타기와 주차가 힘들어 근자에는 택시를 부르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그런데 체증이 심해지다 보니 택시마저 찾기 어려워지고 혹시 불러세워도 행선지를 묻고는 손사래 치며 안간다, 가 예삿일로 되어 버렸다. 막히는 곳이라며 구실을 둘러대기가 일쑤이고 내빼기가 다반사이다. 이런 시세가 원인인지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을 리용한 콜택시 애플리케이션(앺-应用软件) 다수가 나들이객들의 봉사에 리용되어 편리를 봐주고 있다. 생산력 발전했다는 정보시대의 산물이라 하겠다.

어느 날인가 핸드폰으로 전용차(专车)를 불렀다. 길옆에서 잠간 기다리니 연배되시는 어른이 산뜻한 닛산(日産) 승용차를 세우고 <차를 이용하시렵니까?>  깍듯한 초벌인사를 올리고는 짐짝을 훌쩍 들어 트렁크에 넣고 목적지를 안내한다. 한담에서 아들에게 사준 차인데 교통이 어렵다보니 아들은 차라리 버스로 출퇴근하고 주말이나 부득이한 경우에만 몰고 나갈 뿐이란다. 그러니 세워두면 어쩌고 차라리 콜택시에 등록하고 이른바 <검은차(黑車)> 경영을 하는데 퇴직한 몸이라 소일거리가 있고 수입도 생기는데다 고객들도 기뻐하니 늘 즐겁다고 말한다. 행선지에 도착하여 지피에스(GPS-卫星导航系统)로 거리를 계산하고 원 택시 비용의 9할을 받는데 가슴 쪽이 따뜻했다.

택시도 호출하였었다. 말말결에 운전사와 전용차를 화제에 올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이라는 열변을 토하는데 택시 시장을 교란하며 자기들의 장사를 빼앗아 간다며 죽으라고 욕한다. 내가 매일매일 어려지는데 그들까지 끼어들면 죽도 먹기 어렵다는 고충이다. 빈발하는 승차 거부에 대하여 슬쩍 물었더니 침체가 심한 곳으로 한 번 들어가면 하루의 장사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드니 막부득이한 선택이라는 당당한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콜택시를 취체 조치를 대야 할 관리 부문이 무능하다며 <ㅁ,ㄹ,ㄱ,ㅂ> 육두문자 쌍욕을 퍼지른다. 발바닥에 불이 일도록 뛰어야 사는 세월인데 다니기에 얼기설기 꼬인 난해한 모순들에 해결책이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끼었다.

요즘 콜택시의 활약에 대하여 기존 택시업자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심지어 파업으로 유관부문에 압력을 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지방에서는 현행법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불법이란 딱지를 붙이고 퇴장시키는 레드카드(紅牌)를 내 들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적지 않은 지역 정부는 자신의 관리 플랫홈에 올려놓고 질서있게 유도하면서 시민의 생활에 편리를 도모하는 한편 내포된 각종 부정적 현상들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다수의 지도자들은 이는 과학 발전의 결과물인 신생사물로 긍정하고 그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법제의 궤도에서 사회에 융합되도록 마당을 내주고 길을 열어주고 있다. 동일한 현상에 대하여 이익, 인식,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에 의하여 발생하는 부동한 태도에 대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곰곰히 짚어봐야 할 일이다..

콜택시의 류행은 전통적 교통방식에 대한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경쟁 환경을 조성하여 업자들의 서비스 수준을 제고하도록 추동하는 정보통신기술과 교통도구가 결합된 새 업종이  틀림없다. 이는 사회 발전을 상징하는 새싹이며 디지털 사회의 추세로서 누가 가로막고 왈가불가하는지를 불문하고 왕성한 생명력으로 산생과 존재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지난날 개혁 방향을 놓고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姓社姓资)며 시야비야가 분분할 때 등소평이  3개유무익여부(3个有利于)의 실사구시를 주창하며 밥을 죽이라고 우기는 친구들의 말문을 막아버리던 장면이 생생하다. 유물론적 론리가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 론리를 콜택시 시비 마당에 대입시켜도 무난할 것이다.

맑스주의를 견지한다는 주장이 실천면에서 그의 세계관과 방법론인 유물변증법과 유물력사관을 이탈한 공념불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물이 부단히 변화발전하는데 자기 기득권을 고수하고 낡은 규제에 안주하여 대처한다면 필연적으로 사회 전진을 가로막고 심지어 뒷걸음 치게 된다. 과학적 발전은 이론적 사고가 선행해야 하고 그 기초로서의 철학 사상이 무기로 되어야 한다. 모택동의 <철학을 철학자들의 교실과 책에서 해방하여 대중들 수중의 날카론 무기로 되게 해야 한다.>는 명언이 감회가 깊다.

사회의 진보란 경제만이 아닌 정치,문화,의식형태의 동반발전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의 전후시말 전반에서 맑스주의 철학이 지침으로 되어야 하다. 금전만능의 수전노(守钱奴) 가치의식과 유물변증법을 도외시하는 형이상학적 혹은 편의주의적 사고가 자원랑비,환경오염,빈부격차,부정부패와 불평등을 량산한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멀어져 가는 철학을 가까이 해야 될 때이다.이것이 사회주의 핵심적 가치를 확립하는데서 전제가 아닐까!

과학적 사고를 도외시하는 철학의 절대적 빈곤과 현실의 변화에 방만한 철학의 상대적 빈곤에서 탈피해야 될 때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철학의 번영을 만끽하고 싶다. 

대련 김인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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