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흙속에 저 바람속옆(리어령.1962년)  제26장으로서 《연변문학》2004년 제1호에 련재된 글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온 생활의 3분의 1의 시간을 차지하는 식사를 침묵과 고독속에서 지냈다. 하나의 식탁이 아니라 몇개의 상에 따라 가족은 분리된다. 할아버지의 상이 다르고 아버지의 상이 다르다. 


—동서의 식사풍습 
    한국사람처럼 식사를 엄숙하게 하는 민족도 없을것이다. 장례식보다도 한층 근엄하고 고요하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는것은 우리 나라의 례법이 아니기때문이다. 
    모두들 성난 사람처럼 묵묵히 앉아서 음식을 씹고있다. 음악감상을 하듯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음식맛을 감상하고있는것일가? 우리에 비하면 서구인들의 식사광경은 너무나도 방자하고 요란스럽기만하다. 그들은 밥을 먹는것인지, 스피치련습을 하는것인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웃고 떠든다. 하루가운데 가장 명랑한것이 그들의 식사시간인것이다. 
    더구나 번뜩이는 《칼》과 창과 같은 《포크》를 번갈아 휘두르는 그들의 식사광경은 중세 기사들의 전투장면과 비슷한데가 있다. 《예수》가 열두 사도를 거느리고 그의 죽음을 예언했던 《최후의 만찬》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식사장면보다는 긴장감이 덜했을것이다. 
    우선 그 《최우의 만찬》에는 《말》이 있었다. 말이 오고갔다. 《유다》가 좀 판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도 그들은 인생을 말하고 진실과 사랑을 나누었다. 생각할수록 묘한 일이다. 음식을 먹는다는것은 《인간사》가운데 가장 즐겁고 사랑스러운 일이다. 
    메닌저박사의 설을 따르자면, 사람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는것은 사랑을 교환하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는것이다. 
    갓난아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표현하게 되는것도 다름아닌 음식(어머니의 젖)을 통해서다.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이 《젖줄》로 맺어진듯이,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 《식사》를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교환된다는것은 단순한 억설이 아니다. 


—애정과 식사     
기독교에서 식사를 하는 행위를 《커뮤니언》이라고 부르고있는데, 그것은 성찬식이란 뜻 이외에도 《친밀한 교제》나 《령적 교통》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식사는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음을 열고 왕래하는 사랑의 통로다. 
    그러고보면 식사 례법 하나만 따진다 하더라도 얼마나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자연스러운 길을 걸어왔는가를 알수 있다.  
    사실 사람이 무엇을 《먹는다는것》은 목욕탕에 들어갈 때보다도 한층 적라라해진다는것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고있는 순간만은 체면도 권위도 교양도 있을수 없다. 음식을 씹고있는 사람의 얼굴은 만인이 평등하다. 
    천자(天子)도 없고 노예도 없다. 심지어 인간과 동물의 차이마저도 느낄수 없을 정도다. 식당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은 목욕탕속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도 한층 평등하게 보인다. 아무리 큰소리를 치는 인간도 식탁에 앉아있을 때만은 다 같은 위(胃)와 이발을 가진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다. 
    프리 마돈나라 할지라도 포식하고난 뒤 사지를 풀고 앉아 이발을 쑤시고있는 순간만은 동물원의 코끼리나 하마와 별로 다를것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의 군사교본을 보면 장교는 하급자에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것이 있다. 권위가 안선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뒤집어 말한다면 인간은 식사를 같이함으로써 상호간의 장벽을 헐고 공동의 광장으로 나서는것이라 할수 있다. 


—식사의 사회학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사마저도 엄격한 신분과 계급의 거리를 두었다. 서양에서는 온 식구가 한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한다. 음식을 먹으며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서로 말하고 서로 즐기고 서로 웃는다. 가족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한몸처럼 교통된다. 
    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하고있는지, 아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있는지, 그의 취미가 무엇이며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서로 리해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온 생활의 3분의 1의 시간을 차지하는 식사를 침묵과 고독속에서 지냈다. 하나의 식탁이 아니라 몇개의 상에 따라 가족은 분리된다. 할아버지의 상이 다르고 아버지의 상이 다르다. 웃사람과 겸상을 한다는것은 례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상을 같이한다는것은 물론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녀자들은 부엌에서,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어린애들은 어린애들끼리 식사를 끝낸다. 좀 떠든다거나 숟가락으로 음식을 휘정거리다가는 벼락이 떨어진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즐긴다는것은 개화된 요즈음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가옥구조가 그렇고, 상이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큰 《상》이라도 서구의 식탁과는 달리 네명이상 앉기가 어렵다. 한국인에게 위장병이 많은 리유도 짐작이 갈만하다. 
    그러나 더욱 모순되는것은, 식사풍경은 고립적인것이지만 상에 차려놓은 반찬은 공동적이라는것이다. 서구에서는 함께 모여먹어도 음식은 제각기 제 몫이 따로 있지만, 우리는 밥과 국을 제외해놓고 반찬은 다 같이 먹어야 한다. 이러한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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