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가는 고향의 들녘

 

 

[서울=동북아신문]다시 찾은 고향은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 잊혀져가는 고향의 정취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서시장에 가면 조선족아줌마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한족 아줌마들이 많다. 섭섭하기도 하고 잘 되지 않는 중국말을 하려니 짜증도 났다. 서시장 한복매장 옆에는 한족들이 치포를 파는 매장을 점점 넓혀가고 있었다. 나도 이번 고향 길에 한복이 아닌 치포 하나를 구매했다. 다문화행사에 참여할 때면 중국이라는 국적 때문에 한복이 아닌 치포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통카드를 만들려고 길림은행을 찾아갔더니 빨간 유니폼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있는 한족여성들이 어설픈 조선말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식식당이나 한복매장 그리고 떡집이나 조선족반찬가게도 조선족이 아닌 한족들이 개량 한복 비슷한 것을 입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거리나 시장 그리고 부근의 식품가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옆집도 윗집도 한족이고 아래 집은 자녀들이 출국하고 연로한 조선족 노인 한분만 계신다. 흥성했던 한국음식점이나 조선족음식점들은 사라지고 중국음식점들이 빨간색 간판을 걸고 있었는데 그 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한족들이 우리 조선족들을 보고 당신네들은 한국에 나가서 벌고 우리는 당신네들이 벌어온 돈을 여기서 고스란히 받으면 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일하여 한 달에 180만원을 벌지만 월세, 교통비, 전기세, 물세, 전화요금, 식사비용, 생활필수품 등을 내고 나면 100만원 남을까 말까 하는데 그렇게 십년을 벌어야 도시의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망가진 몸을 이끌고 또다시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

 

반대로 한족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궁금했다. 얼마 전 부동산에 다니는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자기네 회사에서 한 평방에 5,000원씩 하는 영업집을 팔았는데 한꺼번에 300만원 현금을 내고 가게 하나를 사간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은 바로 동네에서 허술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모기장을 안장해주거나 전기를 가설하는 등 잡일로 돈을 버는 한족남자였는데 그의 명함을 보니 그가 할 수 있는 항목이 무려 15종이나 된다고 했다. 그가 거주하는 곳은 파가이주호 공터에 남겨진 허술한 집이라고 한다. 평소에 짠돌이라고 한족들을 비웃던 조선족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들애가 하는 일이 매일 같이 택배를 사용하는 일인데 일단 부르기만 하면 아침 이른 시간이든 저녁 늦은 시간이든 군소리 없이 달려오는 택배원들이 있는데 그 속에 조선족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선족은 외국에 나가서 목돈만 벌고 이런 잔돈은 벌려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일까.

 

해방초기 조선족 인구 비율이 63.4%를 차지했던 연변이 2012년 조사에서 조선족 인구(79만8,000명)비율이 36.65%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족 인구의 실태파악이 어려워 실제 조선족 인구의 감소세는 통계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라고 추측한다.

 

 

 

조선족 인구의 감소 원인을 조선족 인구의 이동, 젊은 세대의 출산율 저하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조선족의 이동을 “새로운 공동체 형성, 새로운 기업가 집단의 형성, 디아스포라론’으로 낙관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선족의 고유기반 상실, 새로운 집거지의 조선족교육 부재 등의 현상을 보면 중국에서 조선족의 한족사회로의 동화가 가속화될 것이며 ‘조선족 위기론’이 강조되기도 한다.

 

조선족 인구의 격감세를 두고 비상이 걸렸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 의하면 조선족 인구는 183만 명으로 중국 56개 민족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민족이 되었다. 그래서 30년 후면 조선족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60년 후면 조선족이 사라진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조선족학교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농촌의 조선족학교들은 페교를 하고 있고 도시의 조선족 자녀들도 한족학교에 가야 하는 상황이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다. 중국내 조선족학교가 20년 사이 90%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연길시에서도 고중부까지 이제 17개밖에 남지 않았다. 고등학교인 연변대학부속중학교는 현재 3학년 이래 내년 8월에 졸업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더불어 한중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시골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갔다. 새로 세워진 다리 밑에서 군중무가 한창이다. 연변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보니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몇 분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뒤이어 중국노래가 흘러나오자 많은 사람이 우르르 나와서 양걸춤인지 군중무인지 비슷한 것을 신나게 췄다. 더구나 아이러니 한 것은 한국노래와 연변노래가 들어있는 디스크를 파는 곳이었다. 한 한족아저씨가 노란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서투른 조선말로

 

음악디스크를 사라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권하고 있었다.

 

비록 고속도로와 비행장이 늘어나고 빌딩은 높아지고 택시가 많아지고 경제가 활성화되기는 했지만 고향은 낯설기만 하다. 거리의 간판도 사람들의 입 색깔도 모두 짙어가는 고향의 들녘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향의 옛 모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향의 옛 주인은 언제가야 만날 수 있을까. 이 땅에 아니 우리 고향에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그 때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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