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선 재한중국동포(CK) 여성위원회 회장

 
[서울=동북아신문]  기회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기차가 떠나면 시커먼 연기가 자욱한 시골 풍경 사이에 반지하(半地河)라는 기차역이 있었다. 기차역 주변에는 한족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고 걸어서 5리 정도 가면 조선족들이 사는 마을(동선촌)이 있었다. 이 시골마을에서 나는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장녀와 차녀가 각각 뇌수막, 홍역으로 어렸을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나는 집안에서 귀한 딸로 예쁨을 받으며 자라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벼농사를 하는 농민이셨다. 어머니는 450호가량 사는 농촌마을에서 부녀대장을 맡고 계셔서 그런지 늘 바쁘게 사셨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멀리 7일 동안 출장을 가셨을 때였다. 나는 초등학생일 때 집에서 키우는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담당했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기 때문에 노는 것이 한창 좋았던 어린아이였지만, 하루에 세 번씩 돼지들에게 먹이를 줘야 하는 고된 일을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매일매일 돼지한테 최선을 다해 잘 해주어도 그들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알았는지 계속 울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웃집 할머니들이 나에게 “엄마가 안 계시니 돼지가 굶어 죽는 거 아니야?”, “돼지 죽 좀 주라야!”, “왜 저렇게 우냐?”라는 등 각종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돼지한테 너무나 화가 났던 나는 큰 몽둥이를 들고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들아 제발 죽어다오~너희들 땜에 내 인생이 억망된다.놀지도 못하고 동네 사람들이 자꾸 잔소리 하잔아~죽어다오 제발!!!”이러면서 매일 한 시간에 걸쳐 때렸다. 그렇게 몇일 동안 때렸더니 돼지는 더 이상 울지를 못했다.

그 후 7일이 지나면 오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12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돼지의 등이 갈치처럼 뾰족하고 앙상하게 야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으셨고 어린 나이라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숨을 쉬시면서 잠시 마음을 추스르시는 듯했다. 그리고는 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 잘못을 저질렀는지 차분히 타이르셨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곡식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라는 말처럼 가축을 아끼는 마음으로 보살펴주어야 했음을 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이때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얼굴이 붉어지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께서는 자녀가 시골을 떠나야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향에서 기차를 타고 5시간을 가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진 학교에 나를 보내셨다. 이 학교는 발리시(勃利市)라는 곳에 위치하였는데, 당시 큰아버지께서는 바로 이 흑룡강성 중점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렇게 나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면서 큰집에서 눈칫밥을 먹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통해 나는 독립심을 키울 수가 있었고 원하는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열심히 사는 법을 배웠다. 어린 나이에 큰집으로 들어오면서 시골에 사는 아버지와 도시에 사는 큰아버지의 삶이 너무나 극명하게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지니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처럼 부녀대장이 되는 것이 목표였지만 크면서 점점 바뀌어 나중에는 의사, 교수, 기자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도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시간이 흘러 20대가 된 나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사회에 발돋움을 하고 일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특파원의 꿈을 키워 나갔다. 매달 주변에 있는 동네 소식을 글로 담아 신문에 올리고 통신기자가 되는 공부도 틈틈이 해나갔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교사로서는 얻기 힘든 짭짤한 소득까지 생길 정도로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려고 하는데 이웃집 할머니가 입술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집으로 오셨다. 나는 너무나 놀라 일단 피를 멎게 하는 약들을 모두 찾아서 할머니 입술에 발라 드렸다. 간단하게 응급처치를 한 후, 가족들에게 안정을 취할 때까지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허겁지겁 출근을 했다. 그런데 자꾸 할머니 생각이 나서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부터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취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아침에 찾아왔던 할머니와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 동네는 치안이 매우 불안정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후, 집에 와서는 밤새도록 글을 썼다.

처음엔 이렇게 어두운 사회에 글 한 편을 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그 여인의 앙갚음〉으로, 실화를 토대로 하여 쓴 소설이다. 기고를 하고 2주 정도 지나자 소설은 흑룡강신문에 연재 코너로 출간되었다. 그러자 실화의 주인공들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폭언과 폭행으로 인해 두려움에 휩싸여 삶의 희망까지 잃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보복을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시간에 맞춰 우리 가족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나는 방송국과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국과 공안당국에서 나섰는데 나의 소설은 신문 1~2면을 장식할 정도로 핫이슈가 되었다. 당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철없는 20대 처녀가 용감하게 나서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좋게 인식이 되었나 보다. 그러자 실화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나는 동북3성의 위대한 인물로까지 등재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 후 나는 지역 전체가 뒤집어질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보수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우리 부모님한테 딸자식 공부시키고 고향에 돌아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망신을 주는 것이냐고 하면서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에 못 이겨 부모님은 내게 더 이상 글을 쓰지 말라고 사정을 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때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조차도 똑같은 말을 하였다. 특별히 죄지은 것도 아닌데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결국엔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대련에 있는 한국 기업으로 초대를 받아 ㈜부룡식품유한공사의 차간 주임으로 채용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2년간 일하면서 200명이 생산하는 물량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였는데, 이때 바로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국에 대한 흥미가 생겨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연수생 대표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하였는데 바로 합격을 하여 1992년에 부산으로 올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는 ㈜부일피혁에서 개평부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국에 조금씩 정착하면서 살아가던 중 1999년 서울 친구들의 모임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 모임 장소는 구로구에 위치한 가리봉동이었는데, 그곳에 많은 조선족들이 자리 잡고 사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마치 차이나타운과도 같은 번화한 풍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고기도 큰물에서 노는 놈이 크다.”라는 속담처럼 성공을 위해서는 큰 무대에 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바로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얼마 후에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도전정신을 가지고 시작한 소매업은 처음엔 하루 매출이 고작 5~10만 원밖에 되지 않아 무척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곧바로 도매업으로 바꾸어 영업을 시작하였고 대표적인 상품을 개발하여 승부를 걸었다. 자신만의 상품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자양강장제를 챙겨서 한 집씩 직접 찾아가는 영업을 시작했다. 가끔은 방울토마토와 붕어빵을 사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드리며 상품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하지만 여전히 냉대를 받는 경우도 많아서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6개월 만에 억대 매출로 성장하면서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변화

그렇게 힘든 고비를 넘기니 인생이 조금 편해지나 싶었지만, 2005년에 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이 나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막상 병환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한가 보다. 아버지와의 이별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복지회관의 직원에게 여행에 대한 문의를 받으면서 노인복지회관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 떠나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곳에 계시는 노인분들만 봐도 가슴이 아려왔다. 이런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그날부터 바로 여러 차례 복지회관에 방문하면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쯤에 두 번째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여행사였다. 첫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던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것을 계기로 새로운 분야를 모색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내가 중국에서 들어오기도 했고 평소 여행을 다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과감하게 여행사업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복지회관과의 인연이 닿은 것도 이렇게 시작했던 여행사를 통해서였다.

여행업계는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들어서면 비수기가 된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보고자 11월부터 LG화장품 방문판매 사업을 시작했는데, 2개월 만에 국장으로 승진하여 남부럽지 않은 수당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LG 대림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라이온스 김성숙 회장님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김성숙 회장님과의 인연을 통해 나는 국제 라이온스 354-D 지구 이홍주 총재님 특보로 임명되었는데, 라이온스 특보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대만의 총재님과 부총재님이 오셨을 때 통역을 하는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대학공부도 하게 되었다.서울에서 아산까지 차로 한시간 반을 4년동안 사업하면서 다닌다는건 어려운 일이였다,그렇지만 수업을 빼먹지 않을 많큼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졸업을 2015년 2월 하게 되었습니다.

지역 주민과 함께 공존하면서 중국 동포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고자 그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에는 축구단과 봉사단을 창단하였고 새마을 부녀회, 중소상공회, 국제라이온스협회 등에 가입하여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2014년에는 동포산악연맹, 동포여성위원회, 동포연합중앙회, 동포축제, 동포여성 CEO 포럼에 참가하면서 단체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또한 재한중국동포(CK) 여성위원회 회장을 맡으면서 중국 동포 여성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지역사회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 조직은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통해 동포 여성의 사회적 비중을 높이고 친목 도모와 교육, 복지, 건강, 창업 등의 상호 정보교류 및 공동체사업을 전개하고자 설립된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중국 동포 여성 100여 명과 한국인 기업인, 언론인, 변호사 등이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문화적 소양을 갖춰 동포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고, 지역 주민과 함께 행복한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며, 세계 글로벌 행렬에도 당당히 참여할 수 있도록 당찬 포부를 갖자는 취지하에 설립하였다.

 성공

바야흐로 여성의 힘이 느껴지는 시대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 각 부문에서 남성 못지않은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기업체와 공직 및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능동적인 여성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 여성대통령이 선출된 사례가 바로 그 증거이지 않을까?

나는 공공기관 명예기관장인 동시에 여행사 대표, 여성단체 대표, 봉사단체 임원, 외국어학원 운영자 등 한류 전도사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다방면에 걸쳐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펼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성으로서 꿈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는 서울 서남권글로벌센터의 명예센터장으로서 근무하면서 다문화가정 외국인 여성, 외국인근로자 등 이주민과 기타 외국인들이 국내에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공공기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3동에 위치한 이 센터는 영등포구, 금천구, 구로구, 동작구, 관악구 등에서 법률·노무 상담과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고 각종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리고 k-pop 서울학원을 열어서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가수 및 연기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컬, 댄스, 연기 및 녹음, 녹화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학원 내 스튜디오에서 중국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넷방송도 하고 있는데 매우 반응이 좋다.

중국 동포 여성으로서 어려운 생활도 해보고 힘든 위기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숨어 있는 기회를 찾고자 노력한 결과, 현재는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바쁘게 살아가는 지금의 시간을 통해 나만의 행복을 느낀다.

그동안 고위층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중국 동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많이 다름을 느꼈다. 분명히 우리 역시 같은 한민족인 데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가 우리의 마음까지 분단시켜놓은 비극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동포 문학자들이 대한민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중국 동포에 대한 이미지가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화합의 역사를 바라볼 때 한결 뿌듯한 마음이 든다. 특히 최근에 한·중 FTA가 체결되면서 중국 동포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중국 동포들의 삶은 가난하고 힘들다. 한국의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목표와 꿈은 뒤로하고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동포 역시 한민족의 뿌리에서 나온 존재들이다. 그들은 배척해야 할 이방인이 아닌 끌어안고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인 것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인식을 바꾸어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를 원망하지 않고 중국 동포들을 좀 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비극의 역사를 딛고 평화 통일을 이루어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세계 속의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도 않을까?

중국 동포들 중에는 공부를 잘해서 대학,석사 박사까지 나온 고학력자도 많을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다문화시대로 들어선 이 나라 한국에서 기회를 잡고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늘 갈망한다. 모두가 하나 되어 손잡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아름다운 날을!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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