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재한동포문인협회에 드립니다

 

▲ 류재순 소설가/수필가, 타이에서
[서울=동북아신문]너무 먼 길을 에돌아 왔다.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십여 년이란 인생의 짧지 않은 세월을 다 날려 보내고 얼마 전 어느 순간 이 원점을 다시 생각해 냈다. 이제 이곳에 돌아와 그 옛적의 그림자들을 살펴본다.

모든 것이 다 변하였다. 나도 변하였다. 들뜬 열광을 타고 지나간 그 시간들 속에서 지금 다시 돌아온 원점의 거울 속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다. 이 초라함은 친구들 모임 파티에 나가려고 한창 앞뒤 단장을 하고 있는 나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 때문 이다. 옛날 내가 알고 있던 한 젊은 문우가 어떻게 나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하여 재한동포문인협회 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 한국에 이런 협회가 있었나? 전혀 관심이 없던, 한국 문인들의 이런저런 협회 이름은 들어봤어도 동포문인협회라니? 무엇인가 확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문인, 문학ㅡ이 생소하고 익숙한 이름들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간 지 옛날이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나는 힘껏 도리질 하였다. 지금 나는 누군데?… 그런데 이상했다. 머리를 흔들어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디에선가 옛 연정의 따뜻한 김 한 오리가 아련히 피어올랐다.

그 모임에서 나는 몇몇 아주 낯익은 옛 문우들을 만났다. 이미 중년, 장년이 된 그들은 한국이라는 이 낯설고 고달픈 새로운 인생터전에서 붓을 멈추지 않고 영혼을 불살라 글을 쓰고 있었다. 그들 책상 앞마다에는 그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잡지와 출판 서적들이 쌓여있다. 작품토론을 하는데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왜 여기와 앉았나? 여기에서 나는 누구이지?…스스로의 질문에 당혹해 났다. 그 옛날엔 나도 저기 앉은 몇몇 낯익은 얼굴들과 머리를 맞대고 작품 토론회를 열렬히 했었고, 열띤 얼굴로 창작경험담을 말했었건만…

▲ 문학신도였던 젊었을 적의 사진
나의 문학창작의 길은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겪고 뒤늦게야 시작됐었다. 셋 아이의 엄마가 된 뒤이었다. 고달픈 하루 일정을 끝마치고 퇴근하면 급급히 유치원 탁아소로 달려가 큰애 작은애를 찾는다. 자전거 앞뒤에 애들을 태우고 장터에 가서 장까지 봐서 저녁밥을 준비한다.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옷 빨래 기저귀 빨래를 해 치운다. 이제 좀 끝났다싶어 시계를 보면 어느덧 밤 열시, 기진맥진한 상태지만 책을 보고 글을 써야겠다는 의욕에 하루 중의 유일한 이 ‘한가한’시간을 그냥 버릴 수가 없다. 엄마 품이 아니면 잠을 안자는 젖먹이 갓난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애를 등에 업고 무릎을 꿇은 체 엎드려 글을 쓴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날이 밝고 날이 밝았으니 바로 아침식사 준비를 하면서 또다시 팽이같이 돌아가는 일상이 곧바로 이어진다. 이렇게 몇 년을 지속했다. 물론 작품이 중어로 번역되어 나간 것도 있고 문학상도 받았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도 되었고 소설집도 국가 출판계획에 선정되어 우수 도서로 출판 되였다. 열정과 고달픔, 영광…나는 어린 시절 문학소녀의 꿈을 실현하는 길에서 도전 또 도전하였다. 삶의 충실함의 희열을 만끽 하였었다!… 

90년대 초, 서울의 모 출판사에서 내 책을 출판 하였다는 뜻밖의 소식이 왔다. 중국에 놀려왔던 한국 한 출판상이 친척집에서 내 책을 발견하고 나와 연락 없이 가져다 출판했던 것이다. 초청장을 보내주었다. 공직이었던 나는 직장의 일들을 정리하느라 차일피일 미루다나니 뒤늦게야 서울 행을 하게 됐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때 벌써 출판사 사장이 일본에서의 사업 대실패로 나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돌아가는 비행기 값이라도 해결해야 했다. 힘들게 어느 업소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출판상은 원고료를 주지 않기 위해 불법체류 중인 나를 경찰에 신고하였다. 중국에 돌아온 나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원고료를 받으러 갔다던 사람이 추방당해 돌아오다니!?…

꼭 다시 한국에 들어가야 하겠다는 집착이 미친 듯이 나를 엄습하여 왔다. 한국행을 나들이처럼 들락거린다는 북경 어느 여행사의 ‘발 넓은’자와 연락이 되었다. 북경 허술한 여관에서 꼬박 보름을 기다려 오던 나는 또 그 브로커에게 3만 위안을 날렸다. 또 당한 것이다. 집안 살림살이 밑천을 다 날려 버리고나니 강도가 되고 싶었다!

2000년 7월, 내가 다시 한국에 들어 왔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황당한 몇 차례의 수난은 오직 돈,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타 올랐다. 체력 노동을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나였지만 외바퀴 밀차에 산더미 같은 식기를 싣고 산장에서 땀을 철철 흘렸고, 손에 물마를 새 없이 식당과 가정집을 뛰어다녔다. 중국 돈 18만 위안이 모여지자 그것을 종자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 갓 정착한 막내 딸애를 시켜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가정집에서 일하면서 나는 짬짬이 신문과 TV에서 나오는 부동산 프로그람을 보는 대로 탐닉해서 공부하였다. 전문가 못지않게 부동산 사업에 매진하였다. 인생에서 더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잠을 깬 중국 경제가 고공 행진을 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탓이었던가, 생각 밖의 큰 수익을 거두게 됐었다.

그래도 한국에 와서 일을 시작하던 첫 몇 해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앞으로의 문학창작을 위하여 많은 글감 노트들을 쌓았다. 그러나 생활형편이 좋아짐에 따라 지하방에서 반 지하로, 다시 1층 2층으로, 또다시 아파트를 사기까지 몇 번의 이사 중에서 나의 그 두툼하던 노트 무더기들은 슬슬 다 빠져 나갔고 ‘문학’이란 이상의 돛대는 돈 벌이의 열광과 함께 먼 바다의 수평선 끝으로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웬만히 살만하니 사기와 좌절로 독이 올랐던 내 마음에도 느긋한 봄비가 내렸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살고 있는 큰 딸애가 아기를 낳게 되자 나는 일자리를 그만두었다. 여섯 식구라는 대가정 속에서 나는 아기를 돌보며 식구들의 충실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매일 맛깔스런 음식상을 정성스레 차려 놓고 일하고 들어온 식구들이 기분 좋게 먹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엔 만족감과 행복감이 물씬해 났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의 파티, 여행, 스포츠댄스, 마작…나의 일상은 또 바빠졌다. 그야말로 즐거운 인생의 가을을 남부럽지 않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야, 넌 참 좋겠다.’ 친구들의 말이다…

 
그러던 내가 지금 동포문인협회 모임에 와 앉아 있다. 익숙하고도 낯선 장소, 이 속에서 초라해진 나는 누구인가? 그 옛날 인쇄된 글과 책머리에 곧잘 따라다니던 내 이름 석자는 어디로 갔나? 사회자가 나를 보고 한마디 말씀하시란다. 어, 무슨 말? 몇 십 년 잠잔 나를 그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고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그 이름 석자의 가치가 이곳에 있을 수 있다고 깨우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분별된 나만의 가치는 없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 나의 사색, 감성, 번뇌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내 머릿속 영혼의 깨우침,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내 가슴의 외침,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존재의 가치는 없었다.

나에게는 아주 소박한 소망 하나가 있었다. 아침에 느슨히 일어나 창문 커튼을 열어놓고 햇빛 가득한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것 이였다. 돈과 더 큰 향락에 대한 욕심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은 나의 이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옛날엔 나의 어린 문학도 같던 내 옆의 저네들- 새로운 사상을 잉태하려고 무거운 사색에 푹 젖어있는 성숙된 눈빛에서 나는 그들의 가치를 발견하였다. 현장 노동에서 거칠어진 그들의 피부, 굵어진 손마디들에서도 나는 그들이 다른 노동자들과는 다른 그네들만의 독특한 빛의 발산을 보았다. 순간 행복한 돼지에게는 생각이 없어도 불행한 인간에게는 위대한 사상이 있다는 말이 내 머리를 때린다. 순간 빈 통에서 나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향락’ 이라는 반짝이는 외곽 속에 은닉하여 무시로 나를 괴롭히던 ‘허무’라는 아픔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집으로 돌아온 나의 머리는 무거워 졌다.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나이에 뭘 시작한다고? 섣불리 내놓으면 그 옛날의 얼굴까지 먹칠이 된다. 나는 문을 닫아걸고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그 고독과 방황의 나날에 문인협회 회장과 몇몇 문우들은 잠을 깨우는 아침 알람과 같은 문자를 보내주어 내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마침내 나는 어두운 방에서 밖을 나왔다. 그래, 항구에 있는 떠 있는 배는 창해 속으로 달려 갈 때만이 그 존재의 가치가 있다. 항로가 결정되니 두려울 게 없었다. 서툴어진 항행으로 하여 내 얼굴에 무수히 떨어질 냉소와 비판을 크리스마스 날의 눈송이처럼 즐겁게 받아들이리라.

바로, 그런 것이다. 마음으로 세상을 답사할 때 보석 같은 하나의 작은 깨우침을 위한 긴긴 날의, 고독과의 싸움 - 그 과정에 혼신을 다 바치려는 악마 같은 열정! 그 속에서 문학창작이라는 나의 돛배는 고된 항행 속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아가리라! 

20015, 12, 13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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