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숙 수필가
[서울=동북아신문] 1년 전, 나는 롯데백화점에서 꽤나 비싸게 주고 갈색구두 한 켤레를 구입하였다. 디자인도 특이하고 예뻤기 때문에 나는 그 구두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솔로 잘 닦아서 신발장에 넣어두었다가 나들이 할 때만 꺼내서 신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구두가 ‘스타일’ 때문에 외출을 무지하게 피곤하게 할 줄이야! 처음에는 구두라서 조금 불편하겠지, 하고 참고 견디었는데 점점 발가락까지 변형되어 갔다. 상황이 심각함을 받아들이자 나는 비로소 아쉬운 데로 그 구두를 버렸다. 발가락은 정형외과를 찾아 한동안의 교정을 거쳐서야 겨우 제 위치대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발에 미안한 감이 들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열심히 발을 예쁘게 씻어주고 로션을 발라주며 나를 위해 노고를 아까지 않은 발을 칭찬하군 했다.

구두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혹은 그 속에서 느끼는 나 자신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내 몸과 지구란 이름의 세상을 잇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고, 내가 걸어 온 길을 뒤 돌아 보게 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갈색 구두를 버리면서 나는 이 구두에 대한 욕망처럼, 오직 나 자신을 위하여 혹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준 일은 없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오직 돈과 권력과 명예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들이 가슴 아프다. 결국은 후회와 반성으로 눈물을 짜면서도,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는 욕망 외에 아무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신고 달리는 구두가 발에 맞는지 안 맞는지 아픈지 편한지조차 무감각이다. 그저 자기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멋에만 신경을 쓴다.

내가 아는 강남에 있는 한 엄마의 이야기다. 그 엄마도 많은 강남엄마들처럼  아들의 미래를 위하여, 다섯 살짜리 아들을 영어유치원으로 보냈다. 매일 유치원에 갈 때마다 애는 선생님이 무섭다며 떼를 썼지만, 영어에 대한 엄마의 집착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애는 매일 떠밀리다시피 유치원버스에 실려 보내지군 했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영어실력을 보면서 엄마는 무척이나 흐뭇해하였다. 나중에는 엄마를 고맙게 생각할거라며, 그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버려진 갈색 구두가 떠오른다. 엄마의 욕심은 어쩌면 오직 멋진 스타일만 추구하던 구두에 대한 나의 욕심 같이 보였다. 그리고 어린 아들애를 보면 자연히 내 발을 내려 다 보게 된다. 상처를 받았던 발의 아픔을 떠올린다.

그 아들애는 다른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실컷  뛰놀고 싶었다. 영어공부도 어렵고 영어를 엄하게 가르치는 선생님도 너무 무섭고 싫었다. 애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곤 했다. 아픈 날들이 쌓이고 쌓여도 말을 하지 못했던 나의 발가락처럼 어린애의 가슴에는 분노만 쌓여 갔었다. 그래도 어디에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애들과 비교하면서 마음에 채찍질을 할 뿐이었다. 오히려 일정한 영어실력을 갖추자 일곱 살 되는 애를 사립학교에 조기입학 시켰다. 아들애는 애들과 잘 휩쓸리지도 않고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쌓이고 쌓인 분노는 언젠가는 어디에 분출되기 마련이다. 애들이 놀린다고 다른 애들의 학용품을 몰래 갖다 버리거나 책에다 낙서를 해놓기까지 하였다. 영어는 다른 애들보다 잘 하는 편이었지만, 같은 학급의 애들은 그 애를 이상한 애라며 왕따를 시켰다.

그렇게 힘든 1년이 지났다. 아들애는 숙제를 할 때마다 짜증을 부렸고 엄마가 공부를 시키려고 하면 매일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슬슬 피해 다녔다. 그 애의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친구의 엄마가 한마디 충고해주었다. 자기네 아들도 경험했던 일이라며 심리의사를 찾아가보라고.

의사선생님은 심리진찰을 하시더니 엄마더러 전학을 시키거나 휴학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로 인해 아이에게 심리적 장애가 점점 더 커질 수 있다고, 그러면서 아이에게 편안한 환경과 대화를 많이 시도할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발가락이 변형된 다음에야 예쁜 구두를 버린 것처럼 애 엄마는 의사선생님의 충고를 들은 후에서야 욕심을 내려놓고 아들을 다른 학교로, 제 나이에 맞는 학년으로 전학을 시켰다. 근 2년 동안, 옛날에 애를 대하던 태도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애가 재미를 느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시도해보았다. 담임선생님과 학부모의 협조와 노력 하에 아이는 점차 심리적 안정을 찾아갔다. 

엄마의 욕심 때문에 아이는 그 어린 마음에 몇 년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 왔었다. 말로는 진로교육을 실시한다고 그러지만 엄마들이 자식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과실이었다. 엄마는 오직 다른 애들보다 앞서가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계속 위로만 올라가려고 하였다. 구두의 디자인에만 집착하는 대한 여자들처럼.

이 대목에서 나는 문뜩 원불교교무님이 고구려 유적지에 있는 오녀봉을 오르면서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몸에 난 상처는 병원 가서 치료 받으면 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병원에 가도 잘 치유 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대로 받아들여 할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면서 마음의 치유를 거쳐야 나을 수 있다."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우선 마음이 행복해야 육체도 행복한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별로 낡지도 않은 채 버려진 갈색구두는 나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었다. 나의 갈색구두처럼 아무리 비싸고 디자인이 좋다고 해도 ‘스타일’에 밀려 발이 홀대를 받는다면 그 것은 건강과 행복을 해치는 처사라는 것을, 눈에 아무리 예쁘고 욕심이 나고 갖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게 진정 탐욕이었다면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  

설사 디자인이 그리 예쁘지 않다고 해도 내 발을 편하게 하고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뛰어 온 나 자신과 함께 고락을 같이할 수 있다면, 그런 행복 징표를 지닐 수 있는 거라면, 우린 그런 구두를 선택하고 그런 구두와 함께 가는 길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구두의 진정한 의미는 로망보다 우선은 겸손이고 마음의 배려이고 사랑이지 않을까?

나는 저도 모르게 구두 안의 발가락이 꼼실거리는 것을 느끼고 미소했다.

천숙 프로필
수필가, 교사출신, 중국에서 다양한 경영분야에 종사.
현,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칼럼 10여 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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