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만 칼럼니스트,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인연(因缘)이란 사람들 사이에만 맺어지는 관계인 것은 아니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사물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우리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한국 KBS사회교육방송(지금의 한민족방송)과의 인연은 80년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학교 교원생활을 시작한지 몇 해 되지 않은 나는 방송국에 뜬금없이 국어소자전과 속담집을 부탁했다. 그런데 한 달만에 반갑게도 방송국에서 보낸 책자를 받았다. 그래서 감사편지도 쓰고 ‘흘러간 옛 노래’ 신청도 하면서 방송국과의 우정을 돈독히 지켜갔다. 후에는 청하지 않았는데도 국어대사전이며 영한사전 같은 책자를 보내왔다. 설에는 정교하게 만든 달력도 보내 주었고, 방송으로 나에 대한 문안 인사도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한국과의 서신거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조선’의 방송을 듣다가 라디오를 몰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개혁의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여 시골의 한 무명 교원이 KBS방송국과 연계를 가지면서 자부심을 얻게 되었다. 방송국 PD선생님들의 깊은 관심과 배려로 한국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이고 언론자유의 국가라는 것을 폐부로 느꼈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친척 방문 등을 통해 약 장사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이 있었다. 남조선이 ‘압박과 착취’를 받는 나라라고 공격하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한국 가서 돈 냄새를 맡더니 입을 헤벌죽 다물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양면성이 얄밉지만 그들 역시 페관쇄국(闭关锁国)정치 운동의 희생자여서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뭉칫돈을 벌 수 있다는데 유혹되어 아내도 한국수속을 했다가 큰 코 다친 적이 있었다. 97년도 ‘상무고찰’ 한국 출국수속을 하던 중, 중국 공안국에서 ‘상무고찰’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사증 유효기한이 차자 한국 브로커는 사증연장을 빙자로 아내와 다른 두 사람의 돈까지 총 25만 위안의 돈을 가지고 본국으로 잠적해버렸다. 그 후 반년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었다.

아내는 음식점 일을 그만 두고 무단장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브로커 장모(조선족)네 집에서 50일간 머물고 있으면서 돈을 반환해 줄 것을 피 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호랑이 입에 들어간 고깃덩이를 뺏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끝내 장모가 차를 판 돈 5만 위안의 돈이라도 손에 쥐게 되었다.

돈을 띄우고 돈을 받아내는 동안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장리 돈을 받아내려는 빚쟁이들의 성화가 불 같았다. 게다가 나는 모험이 도사린 한국수속을 주장해서 이 꼴이 되었다고 술만 마시면 이지를 잃고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그 후 아내는 빚쟁이들이 겁나서, 남편이 두려워서 식당에서 둬 달에 한 번씩 집으로 왔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둘째 애는 엄마가 보고 싶다면서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온 집안이 먹장구름이 드리워 초상난 집처럼 썰렁했다.

빚 단련에 한동안 나도 사업에 몰두 할 수 없었다. 결석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예비당원을 취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렇다고 나는 당 조직을 향해 한 번도 불평을 토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자업자득이라 생각했다. 또 한국도 원망하지 않았다. KBS방송국의 진지한 인연을 가슴속에 깊이 묻어 두었기에 몇 명의 나쁜 사람들로 하여 대한민국이란 나라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 전체를 부정한다면 내 삶의 뿌리가 완전히 흔들릴 것만 같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 또는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흐르는 물처럼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지난 일들은 자연스레 흘러만 갔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준 아내한테도 용서를 빌었다.

“모두 내가 속이 좁은 탓이었어. 사내가 돼서 모든 책임을 떠안고 처리하지 못할망정 당신을 괴롭히기만 했으니…….”

많은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를 믿었다. 내가 결코 그런 옹졸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공짜를 탐내지 않는 성격, 남의 것 하나 얻어먹으면 두 개, 세 개를 내놓는 내 성격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주장으로 한국수속을 해서 나의 사업에 지장을 주었다며, 입당까지 취소되게 했다면서 못내 가슴아파했다.

후에 아내는 유연고 동포 취업방문제를 걸쳐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 해 대학시험을 치른 둘째 아들 녀석의 대학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남쪽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고국 땅이 아내를 돕고 우리 가정을 돕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뜨거운 것이 뭉클거렸다. 한편 KBS방송국에 보내려고 준비한 한국 브로커 사기꾼에 대한 신고서를 화로에 집어넣었다. 그때 한국 KBS방송국하고는 좋은 인연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뇌리를 때렸던 것이다.

어느 나라든 사람 사는 곳은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나쁜 사람은 극소수이다. 극소수의 나쁜 사람으로 모든 한국인을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 대한민국 KBS사회교육방송국과의 인연이 파란 잎에 맺힌 물방울마냥 유난히 더 영롱한 빛을 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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