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정역 앞에선 박연희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서울=동북아신문]눈이 내리지 않는 크리스마스 날, 가벼운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경춘선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으로 지어진 전철역이라는 이유 하나로 춘천여행의 첫 코스를 김유정문학촌으로 정했다. 두 시간 후에 드디어 한옥으로 지어진 김유정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어느새 김유정문학촌의 손님이 되어 있었다.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김유정문학촌은 한국문학관협회가 2012년 선정한 ‘최우수 문학관’이자 1930년대 한국단편소설의 대가 김유정의 고향이다. 29살이라는 짧은 생애에 김유정은 자신의 고향을 무대로 한 12편의 작품을 썼는데 실레마을 전체가 그의 작품의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처녀작인 <산골나그네>를 비롯하여 <봄봄>, <동백꽃>, 그밖에 <총각과 맹꽁이>, <아내>, <소낙비>, <만무방>, <솥> 등 많은 단편들이 실레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김유정문학촌’과 그의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길을 순례할 수 있는 ‘실레 이야기’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김유정은 일제강점기의 한국농촌의 실상과 그 삶을 탁월한 언어감각과 투박하면서도 정확한 문장, 그리고 독특한 해학으로 묘사하고 있어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할 수도 있지만 한국문학을 배우지 못한 자신은 작가의 이름도 작가의 작품도 생소했다. 우선 김유정기념전시관에 들어가 눈으로 익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전시관중심에 김유정의 대표작 <봄봄>이라는 커다란 디오라마(모형)가 있었고 김유정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김유정의 여인 당대명창 박녹주의 사진과 판소리음반, 축음기가 있었다. 혜성처럼 나타났다 무지개처럼 사라진 김유정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동백꽃>, <봄봄> 등 소설에서 순수한 러브 스토리로 승화시켰다. 역시 문학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인가 본다.

잘 꾸며진 연못과 정자를 지나 몇 계단 오르면 평지에 2002년 복원된 김유정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생가는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방 봉당 및 부엌, 곳간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자 형태의 초가집이다. 사각형의 겹집으로 된 가옥 중앙에서 올려다보면 장방형의 액자에 채집된 하늘이 오히려 우리를 내려다본다. 갇힌 공간이면서 먼 우주로 열리는 그 공간에서는 대상이 주체가 되고 주체는 다시 객체가 되어 김유정의 소설이 그 시대로 우리를 이끄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가 소통한다.

생가의 왼편 기념관으로 들어가기 전 책을 들고 있는 김유정의 동상과 만날 수 있었다. 1932년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와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나서서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고 학생들과 청년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을 설립할 당시의 모습일 것이다.

▲ 김유정문학관 안에 설치돼 있는 말린 동백꽃. 강원도에선 생강나무꽃이 동백꽃이라 불린다.
체험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설 <동백꽃>에서 소재가 된 노란 생강나무꽃 조화가 전시관중심에 놓여있었다. 강원도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라고 표현한 것은 강원도의 노란 동백꽃을 의미한다. 동백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어딘가 모르는 친숙함이 묻어나는 꽃이었다. 봄이 되면 김유정문학관만이 아니라 실레마을 곳곳에서 심심찮게 노란 동백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유정의 작품들은 시골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아서 보는 이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거기에 해학까지 더해져 읽는 재미가 배가 된다. 소설 ‘봄봄’에서 딸과 혼인시켜 주겠다는 명목으로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는 장인과 봉필의 신경전 한판이 그려진 조형물도 있다. 마치 소설속의 인물 하나하나가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듯싶었다.

자그마한 연못 곁에는 소설 ‘동백꽃’에서 닭싸움으로 핏대를 올리는 점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가 옆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린다. 동상 곁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없으면 틈틈이 즈 집 수탉을 몰고 와서 우리 수탉과 쌈을 붙여놓는다. 나는 약이 오를 대로 다 올라서 (....) 나뭇지게도 벗어놀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지게막대기를 뻗치고 허둥지둥 달겨들었다.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이처럼 실레마을 곳곳은 김유정의 작품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실레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금병산에는 김유정의 소설 제목을 딴 등산로가 산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소설 속으로 이끈다. 마을 한 가운데 잣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실존인물이었던 <봄봄>의 봉필 영감이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점순이와 성례는 안 시켜주고 일만 부려먹는데 불만을 느낀 ‘나’가 장인영감과 드잡이를 하며 싸우는 모습이 막 눈앞에 그려지는 곳이다. 그 옆에는 김유정이 세운 간이학교 금병의숙(錦屛義熟)이 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나 막국수를 먹고 싶었지만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는 건 왠지 신심이 없다. 전철역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옥수수를 구워서 팔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2천원에 따끈한 옥수수 하나를 받아들고 은근슬쩍 매점으로 들어가 난로 곁에 있는 걸상에 앉아버렸다. 배낭에서 삶은 계란과 귤을 꺼내 아저씨와 나란히 나누어 먹었다. 아저씨는 청승맞게 혼자서 무슨 여행이냐고 핀잔하면서도 따끈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코끝에서 맴도는 향긋한 대추향을 음미하며 김유정역 오른편에 있는 레일파크로 발길을 돌렸다.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경춘선의 옛 철로를 레일바이크 길로 고쳐 놓아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추억 만들기 명소가 되었다. 쌍쌍의 연인들이 타는 레일바이크는 탈 엄두도 못 내고 레일파크 광장에 있는 문인들의 작품을 모아 전집형태로 세워놓은 독특하고 화려한 책 조형물로 눈을 모았다. 여행의 또 다른 묘미 책의 향연에 깊숙이 빠져보는 순간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하나는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작품이 탄생한 장소에서 그 작품의 숨결을 직접 느껴보는 것이다. 작가가 태어난 곳보다 한 작가가 남긴 ‘명작’이 태어난 곳이 독자들에게 더 사랑 받는 이유를 김유정문학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여행길에서 문학작품을 맛본다는 것은 ‘문학관광’이라는 휴가의 또 다른 백미였다. 노란 동백꽃향기가 머무는 이곳 경춘선끝자락에서 2015년 한해를 마무리해본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