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박연희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능산리 유적 모형전시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서울=동북아신문]단풍이 살짝 얼굴을 붉히는 지난해 10월 어느 날 재한중국동포 역사교육 문화탐방 팀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를 찾아서 떠났다.

충청남도 부여에 도착했다. 이곳은 백제의 새로운 수도 사비였다. 제26대 백제 임금 성왕은 오랜 전쟁과 정치적 내분 그리고 협소한 입지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중요한 지리적인 결단을 내렸는데 그것이 바로 도읍지를 사비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부여는 백제의 새로운 수도인 동시에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백제의 원대한 꿈과 백제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성왕은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외곽방어시설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부여 나성이며 왕궁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어진 성이 부소산성이고 그때 세워진 절이 바로 5층 석탑이 있는 정림사이다.  부여 사비는 북, 서, 남을 금강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였고 동쪽 부분만 인공적인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나성이다. 아쉽게도 나성은 복원공사 중이라 천막으로 덮여있어 실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나성은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수도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왕도의 안과 밖의 경계선이기도 하고 죽은 자와 산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나성을 경계로 토성 안에는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국가적 사찰인 정립사가 있었고 왕궁과 백성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나성 밖에는 죽은 자들의 무덤인 백제의 능묘 능산리 고분군이 있었는데 총 7기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중국-백제-일본을 잇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를 집약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무덤의 양식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의 축조기술과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다.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는 절터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절터가 바로 백제예술의 진수로 일컬어진다는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곳이다. 능산리사지 옆에 고분처럼 만들어진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에 들어가 보았다. 백제의 분묘 구조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시기별 무덤 모형과 백제인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능산리사지 복원모형을 볼 수 있었으며 백제금동대향로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통해 우수한 백제인의 문화예술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신라의 거대란 왕릉과 달리 백제의 왕릉은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으로 여린 듯 부드러운 ‘백제의 곡선’이었다. 부여의 고분들은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띠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포근하게 다가왔다. 마치 왕릉 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이 드는 왕릉모양의 입구가 이색적인 능산리 유적 모형전시관에는 능산리 고분군과 능산리 사지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가 전시되어 있었다. 능산리 사지에서 능산리 고분군으로 넘어가는 길에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의 무덤이 있었다. 의자왕 묘에서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는 빨간 단풍나무가 가을의 정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성의 총길이는 6.3km로서 산지와 평지를 연결해 왕도의 외부를 둘러싸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으로 지형에 따라 독특한 축적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삼국시대 최초의 외곽성이며 동아시아의 도성 발달사에 한 획을 그은 거대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부여 나성은 북/서/남으로 천연 방어막인 백마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황포돛대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따라 가노라면 강 가운데 가파른 절벽을 배경으로 한 낙화암이 눈앞에 펼쳐졌다. 3천여명의 궁녀가 떨어져 꽃으로 되었다는 전설처럼 내심 웅장한 공간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좁고 작은 공간이라 아쉬움이 있었다. 절벽 중간쯤에 이르니 송시열이 새겨 놓았다는 ‘낙화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칠백년 백제역사 오롯이 숨 쉬는 곳낙화암 절벽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 이런가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 마음 부여는 백제 성왕(16년)이 왕도로 삼은 뒤 마지막 의자왕까지 6대에 걸친 백제의 수도로서 백제왕궁의 후기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123년이란 기간 동안 한 국가의 수도인 부여, 백제시대 중 국가의 문화가 가장 발달된 시기이고 또한 멸망을 맞이한 비운의 도시이기도 하다.  부여의 하늘은 하루 종일 찌뿌둥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백제 후기의 흥망과 성쇠를 동시에 겪은 탓인지도 모른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은 역사의 아픈 흔적들을 황토물로 토해내고 있는 듯싶다. 잊혀 진 도시, 하지만 아직도 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부여 나성에서 다시 한 번 백제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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