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모범 고 리호천선생을 추모하여

▲ 전국노동모범 리호천 선생
[서울=동북아신문]2월 12일 오전, 뜻밖에 호천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무슨 청천벽력인가! 설날(8일)아침까지 서로 전화로 설인사를 나누지 않았던가! 비보를 접한 나는 황상박 선생, 리광평 선생과 함께 조문을 갔더니 11일부터 심장병으로 연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12일 아침 6시 27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지난 세기 60년대에 상영되었던 영화 《기러기(鸿雁)》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우편배달부《리운비(李云飞)》의 원형이 바로 지난 세기 50~80년대 전국노동모범으로 이름을 날렸던 연길현(룡정시) 덕신우전지국의 리호천이다.

그이와 나는 한 고향이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그이는 벌써 전국노력모범이었다. 하여 우리 학교에서는 그를 초청하여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들은 지 이제는 50년도 많이 넘어 그때의 보고내용은 기억에 어슴프레 하나 북경에서 모 주석과 중앙의 영도동지들의 접견을 받고 천안문 관례대에 앉아 5.1국제노동절 경축대회와 국경10년 경축활동에 참가한 이야기를 한 것만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어린 심령에 수도 북경, 모 주석과 중앙영도동지들 하면 대단히 우러러 보았기에 그이를 몹시 흠모하였다.

나와 호천 선생은 나이차이가 20살이나 되지만 어쩐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그가 우편배달원으로 있을 때 그의 집과 우리 집은 모두 덕신공사 소재지인 숭민대대에 있었다. 하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그가 우편배달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보아왔으며 썩 후에 내가 공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에는 그의 딸이 내가 맡은 학급에서 공부하다보니 가정방문 등을 통해 그와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그가 1980년도에 용정시 우전국 부국장으로 전근되자 인연이 이어지느라고 그랬는지 나도 이듬해 용정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하여 우리는 용정에 와서도 자주 내왕하였다. 내가 그의 사적을 정리하여 신문, 방송에 여러 번 발표하였기에 그의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이는 1932년 3월 5일, 연길현 지신구 성동촌에서 출생하여 1945년 8월 15일 연길현 덕신구 영동촌 중우동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전 그의 아버지는 지주집의 머슴으로 고된 일을 하다가 허리를 상한 것이 종신불구로 되어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였다. 하여 생활난으로 1948년 16세 나던 해에 겨우 지신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2년에 소학교를 졸업한 후 연길현 덕신우전지국에서 우편배달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7개 생산대대, 51개 생산소대의 우편배달을 책임졌는데 거의 100근 되는 짐을 메고 11갈래의 물을 건너고 4개의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매일 거의 왕복 100리 되는 길을 다녔다.

1964년 내가 중학교(연길현10중)를 다닐 때의 일이다. 그이는 원래 자전거를 타고 우편배달을 하였는데 하루는 적갈색의 말을 타고 말잔등에 우편물을 가득 싣고 우리학교로 왔다. 학생들은 호천이가 말을 탄 것을 처음 보는지라 모두 모여들어 구경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덕신길은 비오면 진흙길이여서 자전거를 탈수 없기에 호천이가 늘 80~100근 되는 우편물을 지고 힘겹게 다니는 것을 염려하여 길림성 우전관리국에서 호천에게 말 한필을 장려로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아주 쉽게 배달을 하였는데 그것도 호천에게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말은 잠잘 때에도 누워 자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얼마 후에는 그 말은 잘 먹지도 않고 자주 누웠다. 그 말이 병이 있어 그런가 하여 성 우전관리국에서는 다른 말을 바꾸어 주었는데 그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침 인민해방군들이 덕신공사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말을 먹이는 군대들과 자기 말이 어째서 이러는가 물어보니 그 해방군전사가 하는 말이 군대에서 통신원들이 타는 군마도 10리 길을 뛰고 다른 말을 갈아타야 하는데 호천의 짐과 배달노정을 보면 말이 너무 지쳐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여 성 우전관리국에서는 오토바이를 바꾸어 주었다.

그때가 바로 1966년도 가을이었으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전국적인 대연계(大串联)를 하는 때라 우리도 북경으로 가는 길에 장춘에 들렀는데 우연한 일치라고 할까 그이와의 인연이 이어지느라 그랬을까 신비스럽게도 스탈린대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호천선생과 마주쳤다. 우리는 너무도 기뻐 호천이를 둘러싸고 어찌된 일인가고 하니 성우전국에서는 자기가 타고 다니는 말이 지쳐 들어 누우니 오토바이를 바꾸어 주어 지금 여기에서 오토바이연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성 우전관리국에서 전국노동모범인 그에게 말과 오토바이를 장려하였지만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덕신길은 마른 날이면 길이 울퉁불퉁하고 비오면 참질땅이라 질척거려 오토바이를 타는 날이 매우 적었고 또 탄다 해도 매우 불편했다.

호천선생은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쌓았다. 하여 당과 인민은 그에게 수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1956년 4월 30일에 전국 노동모범표창대회에 참가였으며 5월 1일에는 전국노동모범메달을 달고 천안문 관례대에 앉아 5.1절 경축대회를 관람한 다음 모 주석과 중앙위원들의 접견을 받았다. 그때로부터 그는 모 주석과 중앙영도동지들의 접견을 7차례나 받았다.

그가 모주석과 중앙영도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기념메달들은 지금 국가우전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의 집 벽에는 지금도 우전제복에 14매의 기념메달을 달고 찍은 사진과 모 주석과 중앙의 영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을 때 함께 찍은 기념사진들이 커다랗게 확대 되어 걸려있다.

▲ 리호천을 원형으로 촬영한 영화 《기러기(鸿雁)》의 포스터.
그의 사업이 하도 특출하여 1960년에 장춘영화촬영소에서는 그를 원형으로 하여 우편배달원의 영웅적 사적을 반영한 영화 《기러기》를 제작하여 전국에서 상영하였다. 어릴 때에 나도 이 영화를 보았기에 지금도 가끔씩 영화 속의 장면들이 나의 머리속에 떠오르곤 한다. 후에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이 영화를 DVD로 제작하여 호천선생에게 보내왔는데 그는 나에게도 시디롬(光盘) 하나를 선물하여 지금도 가끔씩 그것을 텔레비전에 연결하여 본다.

이렇게 많은 영예를 안은 전국노동모범이었지만 그도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주덕해보황파, 류소기 가짜노동모범, 조선특무 등으로 몰려 비판을 받으면서 각종회의에 참가할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반란파들은 자기네가 타고 다니며 살판을 치려고 성 우전관리국에서 그에게 장려로 준 오토바이를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1967년 8월 2일 나와 몇몇 동학들이 학교로 가는데 리호천이도 우편물을 싣고 우리 옆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우리 앞에서 한 반란파가 몽둥이를 쥐고 길을 가로막으면서 오토바이를 내놓으라고 을러멨는데 그이가 오토바이를 세우지 않자 그자가 몽둥이를 휘두른 것이 오토바이 전등유리가 박산났다. 그후 호천이는 “내가 못 타면 못 탔지 절대로 너희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토바이를 다 분해하여 금곡마을의 개인집에 감추어 두고 두발로 걸어 다녔다. 그이는 이로 하여 더구나 반란파들에게 모진 매를 얻어맞았지만 오토바이는 내놓지 않았다.

호천선생님은 항상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고 사업하여 오셨다. 비록 선생님께 우리의 곁을 떠나셨지만 선생님의 이름은 그의 업적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기러기가 되여 하늘나라에 가신 리호천선생의 명복을 삼가 빌고 또 빈다!

2016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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