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세만/칼럼니스트,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정상적이고 성숙한 사람치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게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1910-87)회장이 타계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24개 질문을 던졌다.

그 중 이런 질문이 있다.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이 죽지 않고,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위인이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 시간부 인생 앞에서 쓸쓸하고 공포를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라도 천국에 이르렀으면 하는 소망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두 번째 질문에나오는 성경 말씀은 부자들의 ‘나눔’에 대한 예수의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대체로 부자는 ‘과욕’의 대명사로 낙인 찍혀있다. 그 과욕을 버리기는 어렵고 극히 제한성이 있는 게다. 기실 부자라고 해서 100% 다 나쁘고 100% 다 좋은 것도 아니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는 게다.

사회, 인간을 자칫 미망(迷妄)속에 빠뜨리고 있는, ‘지구종말론적 신앙’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을 냉철하게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들이 자취를 감추었거나 멸종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인간만이 멸종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종말의 시간이 닥쳐오면 열심히 기도한 사람이든 안 한 사람이든 다 죽게 마련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만이 ‘휴거현상’에 의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축복인 것이다.

천국은 둘째 치고 무종교인들의 죽음과 신에 대한 사색과 태도는 어떠할까.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물리적인 죽음을 경험하고도 살아남는 사람이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다. 유약한 영혼들이 두려움이나 터무니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진 나머지 그런 사고를 전도한다.”

1931년 미국에서 상대성이론을 주창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상식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 동안 실재로는 죽어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다가선다고 할 수 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자기 삶이 그래도 뜻 깊고, 보람차다고 느낄 때 남은 인생을 보다 소중히 하려는 것이 인간의 섭리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타락’한 인생인 것이다. 비록 타락된 인생일지라도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의식하고 다시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때, 그것은 이지를 세웠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후 삶을 재정리하고 정직하게 스마트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고 했다.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한국에 오니 삶을 소중히 대하는 한국인이나 동포들을 보다 절실히 느끼게 된다. 먹는 데서 영양과 건강을 따지는 음식문화, 질병 예방에 무척 신경을 쓰며 정기적 건강검진을 하는 한국인과 동포들. 그만큼 사람들의 쾌적한 삶의 질과 오래 살려는 의욕, 사는 동안이라도 건강하게 살려는 의욕이 돋보이는 것이다. 또 일단 병이 나면 거기에 드는 엄청 난 의료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을 위하여 음식에 신경 쓰고, 약물치료하고, 운동으로 몸을 단단히 하는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작업도 간과 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인간은 어찌 보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얼굴, 부모가 준 얼굴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 만드는 얼굴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내 얼굴도 착하고 아름다워진다. 추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면 내 얼굴도 추하고 악해진다. 내 생각과 내 수양이 내 얼굴을 형성시킨다.

착하고 올바르게 사는데 다른 보상이 없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그 보상이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바란다면 기쁜 마음이 사라진다. 마음이 기쁘고 편하면 신심이 후련한데 병마도 그런 마음에는 붙지 못하고 도망간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수련하는 것도 마음 다스리기를 위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 한다.

사욕을 버리고 마음을 닦으며, 자유롭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다. 또 죽음이란 대수롭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이란 없고 내가 죽었을 때 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그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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