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대 린필드 한국학교 교장 

[서울=동북아신문]다음은 김경득 사건이다. 197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김경득은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그는 관례대로 2년간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고등재판소는 김경득에게 합격통지서와 함께 귀화수속 서류를 보내왔다. 김경득은 재일한인을 위한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탄원서를 최고재판소와 일본인 변호사협회에 제출했다. 일본인 변호사협회는 ‘김경득 지지모임’을 구성해 그를 지원한다. 이에 고등재판소는 ‘사법수습생 패용 선고요령’을 발표한다.

김경득 변호사의 한인권익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재일동포사회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박종석사건 이후 이인하 목사가 주도 하는 운동은 세금투쟁을 하고 이동수당, 공영 주택입주권 등을 요구했다. 최근에는 민단이 적극적으로 권익운동에 나서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권익운동은 지방참정권이다. 한인들은 지방의회 의원선거권을 요구하고 일본정부는 고려중이다.

1980년 도쿄 신주쿠 구청에 출두한 한종석은 갱신하는 외국인 등록증 지문 날인을 거부했다. 한일조약에도 위반되는 행위였다. 한종석은 구금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인, 독일인 등의 호응을 얻고 재일동포 3세들의 적극적 지지를 얻는다. 지문날인 거부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고 1만 명 이상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구금 된다. 한종석의 손가락 하나의 거부가 전국으로 전파 되어 점점 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에 한국정부가 나서 1991년 한일협정체결 25주년 기념으로 이 지문 날인을 없애 버린다.

사회를 바꾸는 큰 사건도 그 발단은 미미한 곳에서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모임이 시작 됐다. 가와사키시의 ‘당나귀 어린이회’ 아마가사키시의 ‘토끼 어린이회’ 그리고 야오시의 ‘도깨비 어린이회’ 등이 그 것이다. 이들은 부근에 거주하는 한인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숙제를 돌봐주고 한국역사, 한국어, 한국노래 등을 가르쳤다. 방학 동안에는 한국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한국에 대해 계속 배우던 이곳 학생들이 어느 날 ‘본명선언’을 한 것이다.

재일동포들은 한국사람이란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통명을 갖고 있다. 이들은 공식석상에서는 주로 통명을 사용한다. 이 사건은 어린 학생들이 조센징(한국인)이기 때문에 평생 놀림을 받고 ‘이지매(왕따)’가 되어도 한국인으로 떳떳이 살겠다는 의식의 혁명이었다.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민축제의 하나로 ‘거리축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말로 성장한 젊은이들이 한국인임을 떳떳하게 표시하며 거리를 행진한다는 것은 1~2세들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오사카 이쿠노쿠에서는 한복을 입고 한국악기를 울리며 시가행진하는 한국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한국시장에는 ‘코리아타운’이라는 현판을 높이 달았다.

요즘은 통일은 기원하는 ‘원 코리아’ 페스티발이 오사카의 정갑수에 의해 매년 개최되고 있다. 이 행사가 처음에는 남, 북한 양쪽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지금은 한국 문화, 예술 공연이 여러 군데에서 열리고 있으며 남북 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월드컵 경기 중에는 일본도시 거리 곳곳에 한국응원단 모임이 있었다. 의외로 많은 일본인이 호응을 했다. 재일동포들은 물질적으로도 과거 새마을운동에 보내 온 많은 성금 외에 “88 올림픽” 때는 100억 엔의 성금을 보내왔다. 그들은 지금도 모국에 미국동포 다음에 많은 송금을 하고 있다.

재일동포사회는 4.19, 5.16 때 한국 민주화 운동을 벌였고 ‘김지하 지키기 모임’을 가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재일동포 지식인, 청년들은 후원회를 조직해서 김대중을 도왔다. 재일동포는 오히려 재중동포보다 남북한 관계개선에 있어서는 더 적극적이다.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는 국제회의도 자주 열었고 북한을 일깨워 주는 작업에 항상 앞장서고 있다.

한반도와 연변, 연해주를 연결하는 한민족경제공동체에도 재일동포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연변과 연해주의 발전을 위해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과의 문화교류도 앞장서고 있다. 두만강 삼각지대 개발에 재일동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경화 된 아베 정권 하에서 반한단체인 재특회가 재일동포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조선학교 앞에서 격렬한 데모를 하고 1억여 원 배상 판결도 받았다. 그런데 극우파가 이 일로 주춤할 기색이 없다. “과거사 왜곡, 평화 헌법 개정, 자위대 군대 전환 추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다가 동포들에 대한 공격”하는 우익 활동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한국인에 대해 인종차별과 공격, ‘헤이트 스피치’를 주도하는 재특회는 2007년 회원 500여 명으로 출발하여 7년 만에 30배로 컸다. 자이니치(在日)란 말은 차별의 뉴앙스를 가졌다. 지금은 과거 “조센징”과 비슷하게 쓰인다. 혐한 정서로 한국 드라마, K-Pop, 마저 뜸해졌다. 싸이에 대해 “김정일, 김정은과 닮은 사람이 춤추고 노래한다”고 했다. 과연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잊고 우방이 될 수 있을까? 민단과 조총련은 위험할 땐 숨죽이고 있다. 호주, 미국 같은 다문화주의를 일본은 안 하고 있다. 그나마 일본에 양심세력이 살아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호주동포가 일본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계속 내는 것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맹목적 혈통적 애국심보다는 성숙한 자세로 일본에 서한 등을 보내 그들을 꾸짖는 일도 하자. 우리 동포가 더 이상 “역사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막아주자

인류학에는 ‘시계 축의 원리(진자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이민 1세는 조국 지향적이고 2세는 1세를 반대해 현지인으로 살기를 원한다. 3세는 2세를 반대하고 1세 쪽으로 기운다.(‘2nd generation leaves, 3rd generation returns’) 3세의 애국심은 1세와는 다르다. 막연한 할아버지 나라에 대한 동경심이고 이 호기심은 문화운동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이민사회의 보편 원리이다. 전 세계 한민족 이민사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민족공동체는 혈연을 기준으로 하는 관계망(Network)이다. 동북아한민족경제공동체란 한반도와 중국의 연변, 러시아의 연해주를 하나로 묶는 한민족공동체를 말한다. 이것은 동북아 역내에 거주하는 한민족 소공동체로 동북아공동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반도 내의 한인, 중국조선족, 연해주의 고려인, 재일동포가 포함된다.

한국인과 재일동포의 기술과 자본이 자원이 풍부한 연해주에 투자되고 중국 조선족과 북한의 노동력이 합해져 한민족경제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것이 청사진이다. 이 네트워크와 관련된 한인 수는 약 8천만에 이른다. 경작면적에는 한반도의 평야와 그와 비슷한 크기의 연해주의 경작지가 포함된다. 이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곡물만으로도 한반도의 한인은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

한반도가 동북아의 중심이 되는 것과 같이 연변은 중국 동북3성의 중심지가 된다. 연해주는 러시아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요지가 된다. 우리 경제공동체는 동북아공동체에서 가장 중심지역이다. 이곳은 이 지역의 교통과 통신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한(恨) 맺힌 디아스포라와 발전한 조국의 만남은 불우했던 과거를 떨치고 밝은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며 한민족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한상대/린필드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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