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선 : CK여성위원회 전회장(현명예회장),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31번 , 재한동포문인협회 고문
[서울=동북아신문]편집자 주 : CK여성위원회 박옥선 회장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조선족 출신으로서 처음 한국 정당 비례대표 순번(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최종 35명에서 31번 배정 받았음) 안에 들어 1개월 동안 한국정치에 입문하여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박옥선 회장과 같은 정치경험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금후 한국정치에 출마하려는 조선족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어 길라잡이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돈 팔고도 살 수 없는 그 귀중한 경험을 재한조선족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박옥선 회장의 체험담을 연재하오니 독자들께서 적극 읽어보기 바란다.

3. 발가벗기는 면접

후보자 면접심사를 두고 나의 맘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듣는 말에 의하면 정치인이 되려면, 특히 국회의원이 되려면 비밀스런 개인사까지 발가벗겨야 한다. 학력, 가족상황, 사업상황, 재산, 전과경력까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왠지 나체로 대중 앞에 서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가 모두 그렇듯 대한민국 정치풍토는 중국정치와 전혀 다른 판이다. 즉 중국정치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족출신이 한국과 같은 ‘나체’가 되는 정치풍토에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강가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이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려면 홀딱 벗기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싫든 좋든 말이다.

사실 홀딱 벗기여 봤댔자 별로 맘에 꺼리 끼거나 사회가 알아도 얼굴을 쳐들고 다니지 못할 수치스런 일은 없지만 한국정치풍토에 적응되지 못한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 명색이 국회의원 면접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면접을 앞두고 이 걱정 저 근심에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 엄마는

“너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정치’ 했었다.”고 뜬금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그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의아해 물었다.

“그때 그 사건 말이다.”

엄마는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온가족이 사회적으로 온역 취급당하는 왕따였고, 그야말로 풍비박산을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죽지 못해 살던 추억을 떠올리기 싫었지만 한편 이 딸이 철없이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정의를 외치며 올곧은 가치관을 갖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습만은 지금까지도 아주 대견하게 간직해 오셨던 것이다.

“그 당시 너 뿐만 아니라 온가족이 홀딱 발가벗은 것 마냥 창피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돌이켜보면 네가 실화를 토대로 정의를 구현하여 사회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 옳았고 대가 바른 가치관이 그 험악하고 살벌하고 삭막한 사회를 헤쳐 나오는 동력이 되어 지금 한국정치에 뛰어드는 자격을 갖게 된 것이지.”

평소 말씀이 적던 엄마, 특히 이 딸이 20대 초반 꽃 같은 나이에 ‘사고’를 친 이후 정치와 멀리하려고 애쓰셨던 엄마께서 고무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다니!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엄마는 계속해서 편달한다.

“나도 요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난 엄마가 20여 년 전에 너무 큰 상처를 입어 속으로 은근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요.”

“뭐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반대하겠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해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 아니겠니. 그리고 추천받은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단 입증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비록 별로 사회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연로한 조선족할머니의 말씀이지만 가족이고, 특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모성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씀이라 나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힘이 솓구치는 느낌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하늘을 날듯 몸이 가벼워졌다.

엄마께서 기분 좋게 이 딸을 바라보더니

“다만 그때 그 심정으로, 그때 그 맘가짐으로, 그때 그 가치관으로 오늘 대한민국정치에 임한다면 될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어제와 그제께처럼 또 한강을 건너 여의도로 향했다. 요즘 연 며칠 여의도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매일 간다. 구로구에서 여의도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한다. 나는 한국생활 20여 년 동안 수없이 한강을 건너보았다. 그때마다 별다른 느낌이 없이 그냥 차바퀴가 굴러가는데 몸을 맡기고 아무 감각이 없이 건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매번 한강을 건널 때면 번마다 강물을 주시해보곤 한다. 차창을 열어 강바람을 들이마신다. 요즘 저도 모르게 강바람이 나에겐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의 꽉 막힌 답답한 생활에서 특히 잡생각에 빠져 있는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열어주는 것은 강바람이 유일한 것 같다.

면접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난 간이 큰 편에 속하지만 대한민국정치 중심인 국회의사당에서 면접을 보게 되니 조금 긴장해났다. 오전 9시가 넘자 한 두 사람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4년 전 면접 본 경력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다지 긴장해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사가 경험이 중요하고 체험이 소중한 것 같다. 다수는 나처럼 긴장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초보자들이 틀림없었다. 서로 묻지 않고 알려주지 않아도 얼굴에, 이마에 ‘난 초보요.’라는 문구가 그려져 있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습관적으로 얼굴에 뭐가 불미스런 이물질이 묻지를 않았나,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지 않았나 하고 거울에 비춰보고 옷매무시를 다듬고 문을 떼고 면접관 앞에 나타났다.

이력서에 자세히 밝혔는데 학력을 묻는다. 면접관 분께서 나의 학력을 사전에 알고 계시지만 아마 나의 표현력을 테스트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했다. 20여 년 전의 그때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석·박사 공부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큰 꿈은 그 사건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회사에 근무하다가 자영업을 하여 돈을 좀 만져보았지만 공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나는 어릴 적 꿈이 선생이었고 대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는 예고 없이 불행이 닥쳐온다더니 진짜 인생을 망칠 사건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과거 품었던 꿈이 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무척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달래보려고 돈을 버는데 매진하였다. 나는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해낸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물론 자신감으로만은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남보다 노력을 더 경주해야 성공의 여신이 나를 맞아준다.

한국에서 여행사도 운영하고, 학원도 꾸리고, 음식점도 개업해보고, 중국식품도매도 해보았다. 때로는 투잡이 아니라 쓰리잡, 포잡까지 하면서 죽기내기로 돈을 버는데 정력을 집중하고 살았다.

신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상을 베푸는 것 같다. 나는 밤잠을 덜 자면서 동분서주하여 한 때 기껏 소비하고도 일 년 남는 돈이 남들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돈을 벌었다. 사회관계도 굉장히 발이 넓었다.

그러나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젊어서 이루지 못한 공부에 대한 꿈을 달랠 수가 없었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하자면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정신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하는 법이다.”

중국 최고 성인인 공자는 당시 사회인간을 ‘소인’과 ‘군자’ 두 계층으로 나누고 “소인은 이해(利害)에 밝고 군자는 의리를 중히 여긴다.”고 말했다. 이해란 사소한 이해득실을 말하는데 소인은 이해득실에 연연하여 대범하지 못해 소위 소인배라 불린다.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일변도 사회로 됨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분화가 심했다. 여기서 사는 선비이고 농은 농경에 종사하는 농부이고 공은 장인(匠人)을 뜻하며 상은 장사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농부보다 더 천대 받은 가장 천한 계층이었다. 왜냐? 장사꾼은 이해득실을 따지고 쫓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유식한, 특히 유교사상의 지배하에 있는 집안은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각하다. 아울러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사소한 상업에 종사하는 인간을 ‘소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내가 장사를 해보니 자연스레 이해득실을 따지고 쫓게 된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공자가 말한 ‘소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인’도 나름대로 삶의 보람이 있으나 나는 젊어서의 꿈을 잊지 않고 또 천성이 대범하여 그냥 ‘소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소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자께서는 “소인이 군자가 되려면 배우라”고 했다. <논어> 첫 편은 ‘학이편(學而篇)’이며 첫머리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는 위대한 군자가 되려는 이상적인 포부는 아니더라도 이해득실을 쫓는 ‘소인’에서 벗어나려고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2011년 서남대학교 외국어학부에 이름을 올렸다.

돈을 벌면서 공부하려니 정말 힘들었다. 한편으로 단체도 이끌고 열심히 봉사활동도 진행하면서 공부하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개발을 위해 공부는 필수라고 다짐하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2015년 2월 졸업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2015년 8월 CEO리더스교육, 2015년 9월 인생지도자1급, 2015년 10월 명강사 최고위 과정 등 수료하였다.

확실히 배우니 사람이 달리지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확실하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눈앞의 이익에 많이 연연하였는데 지금은 멀리 보는 안목이 크게 자랐다. 과거 간혹 남들과 사소한 일에 따지고 지지고 볶고 했으나 지금은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곤 한다. 과거에는 상업에 대한 정보나 생활에 필요한 정보에 연연했다면 지금은 정치, 문화 등 다 방면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과거엔 대한민국 상류계층 분들과 만나면 대화가 딸릴 때가 많아 창피했었는데 지금은 대화가 자연스러워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긴다. 이것이 자신의 가치상승이 아니겠는가! 배움의 효과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