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숙 흑룡강신문 산동지사 기자
[서울=동북아신문] 김명숙 글=아름다운 바다의 도시 칭다오에서 살면서 난 그동안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를 모르고 살았으며 그것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느명강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난 바다가 썩지 않는것은 3%의 소금이 있기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3%의 소금이 있었기에난 오늘날  조금은 가치와 보람으로 살 수 있는 것 같다. 그 3%의 소금은 바로 나의 기자인생 16년이다.

파란만장한 시련과 아픔을 겪으며 걸어온 내 기자인생의 길은 정녕 이 시점에서 하얀 웃음꽃 피우며 한번쯤 돌아볼만하다. 앞으로 퇴직을 해도퇴직금이 없지만 나에게는 퇴직금보다 더 중요한 스토리와 소중한 경험 그리고 또 그속에서 울고 웃고 상처입고 찢어지고 부서지면서 성장해온 나날들이있다. 나에게 돈을 주고도못사는 그런 기자 경력 16년이라는 가장 값진 ‘재산’이 있다. 이러할진대 난 두려울 것도 불안해 할 것도 후회할 것도없다.

어릴 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 중학시절에 내가 부르는 엄마와 아빠가 친 엄마, 친 아빠가 아니라는것을 우연하게 알게 되었다. 그 양부모마저 이혼하고 아빠는 사업이 부도나고,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 후 나의 인생은마냥 비바람과 흐린 날뿐이었다.

아빠는 딸을 둔 또 다른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고 엄마는 함께 자란 오빠집에서 같이 살다가 끝내는 아빠에대한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그후로 아빠도 뇌출혈로 쓰러졌으며 아빠가 데려온 그 여자는 무정하게 아빠곁을 훌 떠나버렸다. 아빠는 지금도 혼자불편하신 몸으로 차가운 방에 차가운 마음으로 살고 계신다. 나를 키워주신 가장 은혜로운 아빠를 난 지금 모실 수가 없어서 못내 가슴아파하고 있다. 

1996년 23살 나던 해, 대학을 졸업한 나는친구 언니의 소개로 산둥성 웨이하이시로 무작정 떠났다. 처음에는 한국인의 통역으로 일을 했었고 후에는 한국회사에서 현장관리로 일했다. 한국어로 타자하는것을 그때 배웠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커피 맛과 라면 끓이는 것도 그때 배웠다. 커피가 뭔지도 모르고 한국인 흉내를 낼려고 가득 한컵 마셨다가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듬해 내가 회사에서 좀 잘 나가자 그것을 시기한 선배 언니가 결국 나를 그 회사에서 쫓아냈다. 그 언니는 한국 사장의비서였다. 몇년이 지난 후 그언니는 날 찾아와 사죄를 빌었으며 난 용서해주었다.

그후 다른 한국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고 우연히 그 회사로 날아온 흑룡강신문을 보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우리신문이라 반가워 읽고 또 읽었다. 그 신문에 문학코너가있었는데 문학을 좋아했던 나는 ‘고향단상’이라는 수필을 써서 팩스로 보냈고 인차 글이 괜찮다고 신문사에서 답장이 왔다. 그렇게 흑룡강신문사와의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3년동안 10여 편의 문학작품을발표하면서 2000년도에 마침내 흑룡강신문산둥지사에 입사하게 됐다.

그러나 회계과를 전공한 나는 보도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취재 다니고 글을 썼다.

밤새우면서 쓴 글이 이틑날 편집국장한테 그냥 사정없이 켄슬당하고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울던 날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에 또 광고 영업까지해야 했는데 기자가 무슨 광고영업을 하는가 그런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괴롭기만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광고영업까지 익히며 뛰기 시작했다.

상담이 잘못되어 광고비를 받지 못해 비오는 날 혼자 울면서 집으로 가던 날, 신문이 비에 젖을가바 옷으로 감싸서 품에 품고 달리던 일, 술자리에서는 남자들과똑 같이 술을 마시고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익혀야 했던 날들, 그러면서도 기자라는 매너를 지켜야 했던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덕분에 주량은 많이늘었지만 대신 몸이 많이 망가졌다.

신문주문을 받기 위해 칭다오맥주를 큰 사발로 5개를 연속 건배하고나서 인사불성이 되었던 적도 있었고 일에 집념하다보니 늦어서 집에는 못가고사무실에서 새벽까지 문자와 씨름한 날들도 있었으며 차비 1원이 없어서 집까지 40분동안 걸어간 날도 더러 있었다.

성공한 사람도 취재해야 했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 특히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난 많이 홍보했다. 그중에서 이미 세상을떠난 불타는 조개 사장이 오늘 더 생각난다. 그분은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연변에 모금해주려고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6시간 코스의 바다수영을완주했었다. 그러는 그를 나는바다위에서 팔과 다리가 까맣게 타면서 함께 동행하며 취재를 했었다.

16년간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겪었고 체험했다. 아픔도, 미움도, 미련도, 원망도, 사랑도, 슬픔도 너무 많은 것을 겪었다. 여러모로 정말로 많은 것을 이겨내야 했고 견디고 버텨내야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난 오뚜기처럼 넘어지면 또다시 일어났고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당당하고 바르게 살아왔다.

하늘의 별따기라는 기자증도 9년만에 따내고야 말았다. 한장의 종이장에 불과하고 돈을 대신할 수 없는 기자증이지만 나에게는 내 목숨처럼 소중했다.

나의 이 마음을 아는이가 많지 않다. 돈 있으면 최고라는 요즘 물질주의 사회에서 나같은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다. 별종이겠지, 아주 적은 유형의사람이겠지, 내가 봐도 그렇다.

기자라고 하면 한겨레사회와도 어울려 함께 뒹굴고 같이 호흡을 해야 한다. 난 흑룡강신문사 입사 2년만에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에가입했고 지금까지 함께 걸어왔다.  여성협회 행사때마다사회자, 촬영가, 기자로 일했다. 10여년 동안 꾸준히재능기부를 하고 봉사를 해왔다. 덕분에 행사를 기획하고 사회하는데 수준이 많이 늘었으며 지금은  행사의 달인이라고 불릴만큼 행사를 잘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성공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행사를 잘 마치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이 해왔으며, 행사 준비를 위해밤을 지새운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난해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에서최초로 진행한 차세대양성프로그램 행사때 기획, 사회, 협찬, 교육대상 인원모집 등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진행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무무리한 탓에 행사가 끝난 후 3일 동안 링거를 맞고서야 살아났다.

16년 기자인생은 나를가치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성장하는 사람은 늘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그동안 매일매일 성장을 거듭해온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구겨진 곳이 많고 흠잡을데가 많고 모가 난데가 많다. 얼마나 더 성장해야 더 큰 사람으로 될지는 모르지만 난살아 숨쉬는 한 계속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흑룡강신문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고향단상’이라는 수필을 쓰지 않았더라면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지금의 나는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지는 모를 것이다.

어릴 때 꿈이 작가였던 나는 기자로 일하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운좋게 좋은 스승을 만나서 지금까지문학의 길을 가고 있다. 그동안 먹고 사는 게 힘들다고 수필 쓰기를 게을리 했던 자신이 미웠고 얼굴이 뜨겁다. 수필을 쓸 수 있었기에기자로 됐고 기자가 되었기에 수필을 계속 쓸 수 있는 글감들이 많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올해 나는 결혼을 하게 된다. 16년 기자 생활이 나의 인생에 찬란한 한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어쩌면 결혼은 또다른 나의 시작이고 나의 제2의 전성기가 될 것이다.  결혼후 한결 더 성숙되고익어간 자신의 모습에 흡족해하는 나 자신의 얼굴을 그려본다. 더불어 앞으로 더 가야 할 기자인생 수십년 길을 함께 그려본다. 그리고 멋진 기자문선혹은 수필집을 내는 자신의 그날을 또한 살짝 말없는 웃음으로 그려본다.

우리 흑룡강신문이 칭다오땅에서 꿋꿋이 서있는 한 나는 신문사 일은 절대 손 놓지 않을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쓸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나의 노하우와 경험으로 우리 신문사를 위해 더 큰 재능기부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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