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일 : 부천시 원미마루 기자 
[서울=동북아신문]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식사 중인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받지 않았더니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귀찮다는 듯이 누구냐고 투박하게 물었다. 

“ 저, 옛날 사장님이 중국에서 ‘카라오케’ 노래방 하실 때 전기 담당 했던 이철이래요”

1995년 중국 따렌에서 ‘카라오케’ 노래방을 경영 할 때 전기를 담당했던 30대의 현지 교포 이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젊은 사람답지 않게  더러운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자기 일처럼 열심히 했다. 그 때문에 당시 그가 시골에 집을 지을 때 우리나라 돈으로 백만 원을 지원 해주기도 했다. 너무 고마워하며 눈물까지 흘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 약간 떨리는 듯 했다. 

  “내일 점심에 사장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대접 하겠습니다.” 

90년대 후반 중국에서 사업을 하며 꽤 많은 돈을 벌었었다. 그 때는 평생 돈을 많이 벌줄 만 알고 돈을 물 쓰듯 했고, 친구를 잘못 사귀어 도박에 손을 대면서 결국 빈 털털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돈 벌 기회를 한번 놓치고 나니 남는 것은 후회 밖에 없었다. 이제는 작은 아파트에서 경비로 근무하면서 쥐꼬리만치 나오는 월급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큰 욕심은 없지만 아내의 음식 솜씨가 좋은 만큼 음식점이라도 차려 보고 싶지만 모아 둔 돈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가 없었다.

이튼 날, 아내와 함께 약속 장소인 명동의 큰 회집에 도착하자 그는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년 만의 만남이었다. 예전보다 얼굴색은 많이 좋아졌지만 몸은 마르고 약간 굽은 등허리에 걸쳐 입은 양복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보였다. 하지만 눈동자에는 사뭇 당당한 빛이 어려 있었다.

  “마침 사장님 옛날 전화번호가 안 바뀌어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그래, 다른 중국 교포들은 모두 한국에 나와서 돈을 버는데 자네는 중국에서 뭘하고 있노?”

그는 중국에서 조경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 해 수입이 1억 원 정도에 달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한국 와서 충북에 묘목시장을 돌아다보고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라오케 노래방에서 일하던 시절엔 연봉이 150만이던 그가 지금은 년 수입이 1억에 달한다고 하니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였다.

  식사를 마친 후였다. 돈 잘 버는 그가 계산 할 줄 알았는데 검은색 헌 가방만 아내에게 넘겨주면서 다음에 올 때 꼭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했다. 고급식당이어서 식대가 꽤 많이 나왔다. 내가 며칠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이었다. 

  저녁 무렵 경비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아내였다.  
  “여보 큰일 났어요. 이 철이가 가방 안에 돈 천 만원을 나두고 갔어요. 쪽지 한 장 하고요…”
  “ 뭐? 돈하고 쪽지, 그래 쪽지에 뭐라고 했던가?”
  “ 중국에서 집을 지을 때 당신이 100만원을 도와주었던 것을 오늘 갚는다고 썼어요.” 

 두 나라의 국경은 있어도 배려와 나눔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생각 하자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저녁 국경이 없는 높은 가을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높았다.

부록 : 위의 수필은 주한 중국대사관과 조선일보가 주최한 ‘한중 수교 23주년 글짓기대회’에서 3등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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