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오늘은 아버지가 한국에 가시는 날이다. 60여 평생을 살아오면서 혼자서는 한 번도 길을 떠나 보신 적이 없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함께 홍교공항으로 떠났다. 늘 그림자처럼 엄마와 함께 다니시던 아버지가 이제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처음으로 혼자서 길을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쓸쓸함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자식들의 마음이 이럴진대 당사자인 아버지의 심정은 오죽하실까.

▲ 어머니가 아직 계셨을 때 한국의 요양원에서
 "니네 엄마 사진(영정사진) 넣느라고 트렁크에 있던 물건 좀 빼냈다." 느닷없이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신다."그럼 뺀 물건은요?""멜가방에다 넣었지. 저울에 달아 보니까 그래도 10킬로 밖에 안 나가더라.""10킬로나? 그럼 무거워서 어떻게 메고 다니려고요?""그까이꺼야 괜찮지 뭐."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한 손으로 멜가방을 들어 보이기 까지 했다."사진은 옷 속에다 넣었어요?""아니, 그냥 제일 위에 넣었지.""아, 그렇게 넣으면 어떡해요? 유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순간, 성질 급한 나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짐 싸는 걸 다 거들어서 싸줬는데 왜 맘대로, 아니 생각 없이 뒤죽박죽 다시 싼 건지, 하여튼 아버지가 하시는 일 치고 내 맘에 드는 건 백 개에 한 두 개나 있으려나. 엄마가 계셨다면 물론 이 모든 건 다 엄마가 알아서 척척 하셨겠지만 엄마가 안 계시는 지금, 아버지는 모든 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린애마냥 서툴고, 그 서투름은 도무지 내 맘에 안 든다. 공항에 가서 짐 부칠 때면 잘 깨지는 물건이 들어 있으니 빨간 색 종이 딱지를 붙여 달라고 해야겠군. 전날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는 아버지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으려고 얼굴에 별다른 표정 변화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많이 당황하고 계셨다. 택시에서 내릴 때 멜가방만 메고, 뒤에 실었던 트렁크는 잊은 채 공항으로 급급히 들어가시려고 했다. “트렁크 내려야죠.” 하고 소리치자 그제서야 되돌아 오시며 "어이쿠, 내 정신 좀 봐라." 하신다.  아침 이른 시간 비행기라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티켓팅 하는 곳에는 몇 백 명은 족히 될 사람들이 공항 안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이러다가 늦으면 어쩌지? 꼬불꼬불 길게 늘어선 줄은 움직임이 달팽이보다도 느리다. 속으로 중국의 일 처리 효율에 대해 온갖 욕을 퍼부으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줄을 섰다. 여기저기 다니며 진두지휘하는 스태프가 눈에 띄어 탑승 시간이 급하니 먼저 티켓팅 할 수 없냐고 물어 봤더니 비슷한 시간대에 뜰 비행기가 여섯 대라면서 다들 그 시간대니 괜찮다고 한다. 정말로 괜찮을지 정말 의심스럽지만 방법이 없다. 보통 이렇게 티켓팅 할 때 사람이 많으면 들어가서 해관 심사 받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버지, 들어가서 만약 사람들이 많으면 아버진 제일 앞에 찾아가서 급하니까 먼저 줄 좀 서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부탁해 보세요.""뭐, 시간이 되겠지." 과연 아버지다운 순리대로 될 거라는 태평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 시간을 계산이나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시간이 너무 빠듯한데. "해관 검사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요. 해관 검사도 못 마쳤는데 탑승구에서 아버지 이름 부르면 그때 급해서 뛰어가지 말고 먼저 줄 서게 해 달라고 말해 봐요.""그래."  대답은 하시지만 아버지의 대답도 좀 전에 괜찮다고 하던 스태프의 말처럼 전혀 신빙성이 없다. 특히 낯을 심하게 가리고 모르는 사람에겐 종래로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닌 아버지의 고지식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더욱 걱정스럽다.  "괜찮아요, 티켓팅만 하면 아버지가 오르기 전엔 비행기가 안 뜨니까 그런 줄 아세요." 비행기가 기다려 줄 거라고,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린다고 한 말이 결국 곱게 나가지 않는다. 40분 가까이 줄을 서서야 겨우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트렁크를 올려 놓으라는 말에 아버지는 트렁크를 옆으로 세워서 올려놓는 게 아니고 눕힌 채 올려 놓았다. “아버지, 옆으로 세워서 올려야 해요.” 하니까 이번에는 손잡이가 아래로 향하게 돌려 놓으신다. 아 놔, 답답해서 미치겠다. “손잡이가 있는 쪽을 위로 향하게 놔야 이 사람들이 짐 표를 붙인다구요.” 내 목소리에는 어느새 또 짜증이 섞여 있다. 아버지는 황급히 다시 돌려 세운다. 티켓팅을 마치고 나오며 "혼자 와서는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못하겠다." 하신다. 내가 같이 와 줘서 참 다행이었고 고맙다는 말을 아버지 나름의 방식대로 표현 하시는 건 줄을 알면서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모르면 물어 보면 되죠 뭐." 아,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밉다. 곽미란, 너 요정도 밖에 못해? 좀 잘하면 안돼? 하지만 안 된다. 아버지가 내게 표현이 서툰 것처럼 나 또한 서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정다감한 나지만 유독 아버지에겐 늘 이랬다. 우리 부녀는 이런 사이다.  
▲ 30년 전 아버지의 모습
 “미란이 너 첨 태어났을 때 얼마나 이쁘던지.” 이 쉬운 말 한 마디를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30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홍콩에서 딸애를 낳고 한 달 만에 데리고 상해로 돌아와 딸애가 예뻐 죽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처음 하셨다. 딸 셋 중에 내가 맏딸이니, 처음으로 아비가 되는 기쁨이야 이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 컸으리라.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한 마디를 말로 표현하시는 데 장장 30년이 걸렸다.  어릴 때 ‘말새단지’라고 불리우며 집 문턱 넘기 바쁘게 재잘대던 나도 아버지 앞에서는 늘 할 말이 없었고 아버지와는 소통을 할 줄 몰랐다. 아버지가 필요할 때라곤 자전거를 수리해야 할 때나 해진 신발을 본드로 붙일 때나 무거운 짐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할 때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성격을 꼭 빼닮은 나는 동생들과 달리 아버지와 말을 할라치면 두 마디 안짝에 불꽃이 튀고 화약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니 엄마가 늘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하셔야 했다. 그런데 이젠 엄마가 안 계시니 나와 아버지 사이에 남은 건 불꽃 튀는 대화 아니면 어색한 침묵 뿐이다. "여기가 대기실 번호고 이게 좌석 번호예요." 손으로 탑승권의 번호를 가르쳐 준다."그래, 알았다." "아버지, 대기실에 도착하면 비행기 편명 다시 맞춰 봐요. 확실한지."계속 시름이 놓이지 않는다.나와 나란히 걷던 아버지가 드디어 이제 들어가실 시간이다. "그래, 잘 지내고.""아버지, 들어가서 해관 통과하면 전화해요." 아버지는 내게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서 들어가신다. 멜가방을 멘 아버지의 어깨가 구부정하다. 앞선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들어가신다. 고독한 여행자의 모습이다. 나는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안전하게 통과할 때까지. 해관 검사를 받으려고 줄을 서 계신다. 아버지의 검정 모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참, 해관 검사 받을 땐 모자를 벗어야 한다는 얘기를 안 했네. 또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언제 모자를 벗었는지 갑자기 완전 백발의 아버지가 해관 검사원 앞에 서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시야를 흐린다. 흐린 시야 속에서 해관 검사를 마치고 홀연히 안으로 들어가시는 아버지의 실루엣이 내 눈동자에 순간 정지라도 된 듯하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자꾸 흘러내려 나는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룽잉타이(龙应台)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소위 부모와 자식이라는 건 결국엔 하염없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거"라고, 자식이 부모에게서, 부모가 자식에게서 멀어져 가는 수많은 이별은 늘 이렇게 뒷모습으로 찍혀진다.  
▲ 고향의 기차역
아버지의 뒷모습, 많이 보아 온 모습이다. 외지에서 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어 집으로 가면 아버지는 새벽에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오셨다. 밤기차를 타고 온 나에게서 트렁크만 빼앗아 들고는 씨엉씨엉 앞에서 걸으신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푹 눌러쓴 개털모자엔 하얀 눈이 수북하다. 그래도 아버지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나는 부지런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벼 가을을 할 때면 나는 허리를 굽히고 부지런히 낫질을 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날랜 아버지의 솜씨를 따라 하려고 애를 쓴다.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은 날렵한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 상해에 나와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자주 여행을 떠나는 딸과 사위들의 물건을 들어 주느라 앞장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그때도 아버지는 늘 씩씩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는 정말로 늙으셨다. 온통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축 처진 어깨,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줄어든 키, 왜소한 몸집. 혼자서 가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울 텐데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신다. 경쾌하진 않지만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최대한 꼿꼿하게 걸으려고 애쓰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더욱 처량해 보인다.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여기 B12에 제대로 찾아왔다. 근데 이건 또 뭐지? 여기 다른 게 써 있네, 내 카드에 없는 글자가 씌어 있더라.""아, 그건 다른 항공 회사 비행기 편명일 거예요. 요즘 여러 항공사들이 같은 비행기로 가요.""아, 그래?""글고 방송 귀담아 들으세요. 가끔씩 대기 장소가 바뀌는 경우도 있으니깐요.""알았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드디어 한숨이 나온다. 다행이다.  한국에서 아버지를 마중할 막내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잘 들어가셨다고, 걱정 말라고, 근데 “뒷모습이 너무 처량해.” 하니까 동생이 그만 좀 질질 짜라며 나를 핀잔한다. “너도 아버지 뒷모습 봤더라면 이런 말 안 할 거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아,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 올해 아버지의 생신날
 편집자 주:  상기 수필은 딩웨호(订阅号) “지행자(知行者)”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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