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도에서 즐겁게 히링하는 박연희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서울=동북아신문]남도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과 ‘진돗개’의 고향으로 유명한 전남 진도는 한국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3번째로 큰 섬이다.

진도에서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동창생의 요청으로 추석날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서 드디어 전라남도 진도의 녹진에 도착했다.

마중나온 동창생과 점심을 먹고 녹진 역에서 십 여분가량 걸어서 진도타워에 올라서니 저 멀리 진도대교와 명량이 한눈에 안겨왔다.

진도타워에서 내려오니 바로 진도대교가 있었다. 진도대교의 양쪽에는 노란색의 진돗개와 흰색의 진돗개가 지키고 있었다.

진도대교는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 사이에 놓여진 길이 484m, 폭 11.7m의 사장교로 1984년 10월 18일 준공되었고 2005년 12월 15일 제 2진도대교가 개통되었고 특히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다.

진도대교의 개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진도는 약 200만 여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 명소가 되었으며 진도대교는 아름다운 경관과 수많은 특산명물,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고장 진도로 오는 첫 번째 관문으로 되었다.

진도대교 바로 아래 명량대첩으로 소문난 울돌목이 있었는데 울돌목 물살은 장관을 이룬다.

울돌목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서해의 길목으로 해남과 진도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이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노트의 조수가 흐르며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 흐르는 소리가 크며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 힘든 곳이다.

바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홍수가 진 강물로 보였으며 물길이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 내렸다.

1597년 일본군이 휴전협정을 깨고 재침공한 사건인 정유재란시기 전쟁에 투입된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과 전쟁 장소를 물색하던 중 울돌목이 아주 드물게 특정 시간에 해류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이곳을 전쟁터로 선택했다.

울돌목은 바다가 울다가 돌아온다고 해서 명량(울명明에 대들보량梁)이라 불린다. 조선어선 13척과 일본어선 133척의 대결, 울돌목의 지형적 특성을 활용한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여기 울돌목에 가만히 서서 저 멀리를 바라보노라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방불히 거북선을 탄 이순신장군이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찔끔찔끔 내리던 비가 소나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차를 타고 동창생이 있는 회사로 행했다.

해산물로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과 함께 진도홍주를 마시며 우리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40여년이 지났으니 생생한 기억은 없지만 즐거운 추억은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창문을 열고 보니 바로 뒤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이 밤에도 이순신 장군은 한손에는 칼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율돌목을 가리키며 위엄있게 서 있었다.

저 멀리에 불빛이 반짝이는 진도대교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명당이 따로 없었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넉 잃고 바라보았다.

이튿날 우리는 운림산방으로 행했다.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維)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5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 면이 35m 가량 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堂號)가 걸맞은 듯하다.

비가 내리는 날에 운림산방을 찾아가면 안개가 자욱하여 더욱 평화롭고 예쁜 곳이다.

백일홍과 연지, 가옥, 화실 그리고 소치기념관과 진도역사관의 감별초실, 유배문화실, 기획전시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못은 내리는 비에 씻겨 더욱 화사하게 안겨왔다.

소치 선생의 예술 혼이 200년 넘게 이어진 이유 중 하나가 이곳 운림산방의 뛰어난 경치 때문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곳에 있는 내내 예술과 자연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우리는 한 시간 가량 차를 타고 신비의 바닷길에 이르렀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약 2.8km 바다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바다 밑이 40여m의 폭으로 물위로 드러나 바닷길이 열린다는데 그 신비로움이 있다.

매년 이 현상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 수십만 명이 찾아와 바닷길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약 1시간의 기적을 구경한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씨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귀국 후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씨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라는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일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바닷길 입구에는 2000년 4월 제작된 뽕할머니 상징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뽕할머니 조형물 바로 앞에 우리 일행은 자리를 잡고 삶은 옥수수와 번데기, 음료수로 허기를 채웠다.

음식을 팔고 있는 주인집 할머니가 뽕할머니의 전설을 이야기해주었다.

아주 옛날 이 마을에는 호랑이의 침입이 잦아 마을 사람들이 모도라는 섬으로 피신하게 되고 뽕할머니만 섬에 남게 되었단다.

뽕할머니는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날마다 용왕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고 어느 날 꿈에 용왕이 나와 “무지개다리를 바다 위로 내릴 것이니 바다를 건너라”고 했다.

마을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뽕할머니는 “내 기도를 들어 바닷길이 열려 가족을 만나 이제 여한이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바람이 불어와 뽕할머니와 호랑이를 함께 하늘로 데려갔다 한다.

3월 9일부터 12일까지, 4월 7일부터 10일까지, 5월 6일부터 9일까지 세 번에 나누어 바닷길이 열린다.

신비의 바닷길 체험관 3층 커피숍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우리 일행은 커피를 마셨다.

여느 때와 달리 여행에서 커피를 마셔보기는 처음이었다. 커피 한잔의 여유가 여행의 색다른 묘미로 다가왔다.

다시 40여분을 달려 팽목항에 이르렀다. 세월호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도 팽목항은 언젠가는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팽목항의 노란 리본과 2014년 4월 16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빨간 등탑 앞에서 가슴이 무거워졌다.

3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바다를 한참 응시했고 정부의 무능으로 어린 자식들을 잃어야 했던 부모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도처에서 세월호 기억 지우기가 횡행하고 있어 팽목항의 이름이 진도항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조용히 섬을 걸으며 마음으로 진도를 느껴보았다.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던 것 같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국립남도국악원의 추석특별공연 기악합주와 판소리, 사물놀이, 무용, 거문고독주, 민요를 관람했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국악을 보게 되었다.

다시 녹진으로 돌아와 저 멀리에 펼쳐져 있는 다도해를 마주하고 앉아 ‘진도아리랑’을 들으며 우리 일행은 치킨에 맥주를 마셨다.

‘자연+역사+예술’삼박자가 맛있게 버무려져 있는 진도의 가을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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