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빈

중국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소장


1. 머리말  

 

지금 중국경내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200만을 헤아리고 있다. 이들은 동북3성을 비롯하여 전국 29개성과 사에 분포되어 있는데 길림성에 약 120만명, 그중 연변에 85만명이 살고 있다. 이외에 흑룡강성에 45만 정도, 요녕성에 23만명 정도 살고 있다. 1)

 

이들 조선족들은 한민족의 한 개 분지로서 명말청초로부터 시작하여 특히는 19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으로 대량 월강 이주하여 온 이주민족이다. 이들은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여 온 후 점차 집거구를 형성하고 이 땅을 개척하였으며 기타 민족들과 함께 반제·반봉건투쟁을 진행하여 왔다. 이러한 장시간의 역사행정을 거치면서 실제상의 의미에서와 법률상의 의미에서의 중국 소수민족으로 되었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근현대사의 범주에 속하지만 또 조선족 역사가 갖고 있는 2중적 성격으로하여 한국근대사 범주에도 속한다. 조선족들은 이주 이후 청조의 통치, 민국시기 동북군번의 통치, 위만주국시기, 일제의 통치, 이렇게 역대의 통치계급과 외래 침략자들의 2중 3중의 가혹한 통치와 민족시기, 압박을 받아 왔다.

역대의 통치자와는 달리 중공당은 지난 혁명전쟁년대에 줄곧 조선족을 중국 안의 소수민족으로 간주하고 조선족들의 반제·반봉건투쟁을 지지하여 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과 함께 법률상에서 조선족을 중국 안의 소수민족으로 승인하고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족들은 이 땅의 떳떳한 개척자, 수호자, 건설자로서 명실공히 주인으로 살아왔고 개혁, 개방 이후에는 이 땅을 남부럽지 않은 낙원으로 꾸리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역사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다. 지난날의 역사를 알아야만 오늘을 정시할 수 있고 또 현실을 똑바로 정시해야만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고는 개혁, 개방 이후 중국 조선족의 현실을 정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어제를 돌이켜 보면서 내일을 기약하려 한다.

 

2. 조선족 역사의 회고

1) 동북변방의 개척과 조선족 집거구의 형성

 

조선족의 이주는 일찍이 명말청초로부터 시작되었다. 2)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조선조 부패통치와 해마다 갈마드는 자연재해로 하여 죽음의 사선에서 허덕이던 북부 조선변민들이 대량 이주하여 점차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구를 형성하였다.

 

조선족들이 처음 이주한 지방은 압록강대안 동변도 지구였다. 1870년을 전후하여 집 안현 내의 이주자는 이미 100여 호에 달하였고 임강, 짐안, 혼강양안 산간지대의 거주민은 거의 모두가 조선변민들이었다. 3) 1875년 청조의 '성경동변간광지개간조례' 반포이후 1897년까지 청화, 환인, 관전, 홍경 등 현에 이주한 조선변민은 이미 8,722호, 37,000여 명이나 되었고 28개 행정면까지 실시하였다. 4)

 

1900년 이후 이주민 수는 급격히 증가되었는바 1905년 변외북로와 남로 5) 의 이주민은 9,940호, 44,580명이었고 1911년에 와서는 13,590호, 58,950 6)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렇게 되어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이주민부락은 19세기 90년대 28개면, 1909년에 32개 촌으로 늘어나 점차 압록강 북안 조선족집거구를 이루게 되었다.

두만강 북안은 압록강북안보다 뒤늦게 이주하기 시작하였지만 1822년에 봉금을 해체 하고 1885년 두만강 길이 700리, 너비 40∼50리 구간을 '한민전문개간구'로 확정한 이후 이주민 수는 급격히 증가되었다. 1894년 화룡욕총상국 관할구역 내에 있는 조선간민은 5,590호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당시 이곳 총호수의 95.8%를 차지하였다. 1897년 조선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의 조사에 의하면 무산대안으로부터 도문에 이르는 600리 강북지역의 이주민 수는 당시 이곳 거주민수의 99%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7)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이주민 수는 급격히 증가되었는 바 1910년에는 109,500명의 이 주민이있었고 8) 1910년 9월부터 1911년 말까지 기간에만 하여도 이주하여 온 조선간민은 19,000명에 달하였다. 9) 이렇게 되어 두만강 700리 북안 40∼50리 너비의 국경지대는 조선간민들에 의하여 독차지되었고 남강, 서강일대에는 조선간민들이 절반이상이었으며 로두구 서쪽에는 조선간민들이 아주 적은 분포정형을 이루는 조선족집거구가 형성되었다.

1910년 이후 일제가 조선에서 실시한 무단통치와 토지약탈로 하여 수많은 파산농민 과 애국지사들이 동북지방에로 이주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1911년 동부지방 조선간민수는 169,450명이었는데 10) 1917년에는 358,428명으로, 1922년에는 515,865명으로 증가되었다. 11) 그중 1922년 연변의 조선간민수는 323,806명으로 동북 조선간민수의 62.7%를 차지하였고 연변총인구의 82.2%를 차지하였다. 12)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가 실시한 강제이주정책으로 하여 조선간민수는 지속적이고 빠른 증가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분포지역도 압록강, 두만강 북안에만 제한되지 않고 멀리 북만과 내몽골 지역에 이르는 전반 동북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1930년 이후 전 동북 조선족인구는 1930년에 607,119명, 1936년에 854,441명, 1939년에 1,065,523명, 1944년에 1,658,572명이었고 13) 1945년에는 216만 명이었다. 14)

 

조선족의 이주사는 개척사였다. 조선족은 이 땅에 이주하여서부터 이 땅을 개척한 개척자로서 동북의 농업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특기해야 할 것은 조선족들에 의한 수전개척이다.

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1875년 총화현 상전자와 하현자의 조선족농민들이 벼재배에 성공을 하였다. 이것은 근대 동북수전개발의 첫 시작으로 된다. 15) 연변지방에서는 1890년을 전후하여 두만강연안과 해란강 연안에서 벼농사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벼농사는 남만과 연변지방에 점차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세계시장에서 쌀 수요량이 늘어나고 쌀값이 폭등함에 따 라 동북의 벼농사는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는바 1921년 전 동북 수전 면적은 30,323정보, 벼산량 939,920톤으로 16) 1930년에는 수전 면적 98,140정보, 벼산량 1,540,350톤으로 17) 각각 증가되었다. '9·18'사변 이후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집단이민', '개척이민'으로 조선 3남지방 파산농민들이 동북 각 지방에 이주함에 따라 동북의 벼농사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말부터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족집거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집거구의 형성은 반일민족독립운동의 대중적,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여 주었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게 하였다. 이들 조선족은 이 땅의 개척자였고 동북수전의 개척자였다.

 

2) 조선족들의 반일민족해방투쟁

 

이주 이후의 조선족들은 청말민국초기의 '치발역복, 귀화입적'정책과 민족압방정책, 기층향약과 패두들의 노략질, 엄청난 가연잡세를 반대하는 반봉건투쟁을 진행하였다. 1907년 8월 용정에 '통감부간도파출소'가 성립되고 1909년 4월 '간도협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족들 은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일민족투쟁을 진행하였다. 이리하여 이 투쟁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장장 40년간 진행되었다.

 

1930년 이전시기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10년대에는 근대사립학교교육운동과 반일단체조직을 중심으로 거족적인 반일민족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하에 일어난 용정 '3·13'만세시위운동 이후 3월과 4월에는 전 동북 조선족 집거구들에서는 거족적인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반일시위운동이 일제와 동북군벌의 진압에 의하여 실패되고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대두되었던 외교론의 실패를 계기로 민족해방운동은 반일무장투쟁에로 전환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역'과 같은 반일무장투쟁앙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신년초벌'이후 반일무장투쟁은 저조단계에로 들어갔고 많은 반일단체들은 이산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1925년을 좌우하여 참외, 정의, 신민 3부로 정립되었다. 1927년 이후 3부는 민족유일당운동을 거쳐 해체되고 남만의 국민부, 북만의 한족총연합회로 다시 통합되었다.

한편, '경신년 토벌'이후 사회주의 사조가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고 1926년 조공당 만주총국과 산하 동, 남, 북만 구역국이 성립됨에 따라 사회주의 사조와 공산주의 계열의 반일운동은 전반 조선국 집거구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조공당 만주총국은 "조선혁명연장론"이란 그릇된 노선과 내부의 극심한 파쟁으로 하여 공산국제 '12월 테제'정신에 의하여 해산되고 1930년부터는 '1국1당'의 원칙에 의해 개인신분으로 중공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1927년 중공만주성위 성립, 1928년 연변에서의 첫 지방당조직인 중공용정지부가 성 립되고 이어 조공당 당원들이 중공당에 가입함에 따라 조선족 집거구들에는 중공지방당조직이 건립,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1920년에 말기의 동북 농촌에서의 중공당조직은 대부분이 조선족들로 구성되었는데 연변, 반석, 목단강연안과 송화강하류 등 지방에서 모두 그러했다. 18) 1931년 4월 24일 중앙에 보내는 '중공만주성위의 보고' 19) 에서는 "당시 동만의 혁명정세는 좋았다. 전 만주에는 1190년의 중공당원이 있었는데 동만에 636명이나 되고 조선족이 90.5%를 차지한다. 동만의 간부정황을 보면 현급이상 간부가 18명이고 구급간부가 41명이며 황포조관학교 출신 혹은 소련에서 전투를 지휘한 적이 있는 '군사적 특수기능을 가진 사람'이 9명이며 여성간부가 14명이다"라고 하였다.

각 지방에서 건립된 지방당조직은 조선족들을 이끌어 각종 반일단체를 조직하여 반제·반봉건투쟁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 중공당이 영도한 대중운동은 연변지방에서 비교적 활약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대규모적인 대중폭동만 해도 1930년의 '붉은 5월의 투쟁', '5·30폭동', 돈화, 액목 농민 '8·1길돈폭동' 등이 있었다. 이러한 대중 폭동 속에서 여러 지방들에서는 중공당이 영도하는 적위대, 별동대, 유격대 등 초기 무장단체가 조직되었다.

 

1930년 이전 조선족들의 반일투쟁은 민족주의 계열에 의하여 영도되다가 20년대 말 기에는 공산주의 계열에 의하여 영도되었다. 반일투쟁의 중심은 1910년대에는 연변지방이 중심이었고 20년대에는 그 중심이 남만에로 옮겨졌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조와 그 운동의 중심은 연변지방이었고 그 후 점차 전 동북지역에 파급되었다.

1930년 이전 민족주의 계열은 보수적인 민족주의로부터 공화민주적인 민족주의에로 의 사상전환을 가져왔고 또 민족독립을 위한 여러 가지 독립론들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성공되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2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민족주의 계열은 저조단계에 들어갔고 따라서 그들의 반일운동도 침체상태에 있었다.

 

1920년 이후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공산주의 계열은 사회주의 사조의 파급, 조공당 만주총국의 건립, 중공당 지방조직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공산주의 계열은 조공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공당에 가입하였으며 노선상에서 종전의 '조선혁명연장론'으로부터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긴밀히 결합하는 데로, 혁명슬로건에서 종전의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로부터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하여'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 이후 동북지구에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1938년 가을까지 계속되기는 하였 으나 그것이 주류를 이루지 못하였다. 전반 1930년대와 1940년대 조선족들은 중공당의 영도 하에 14년 동안 가열 처절한 항일투쟁을 벌이었다.

'9·18사변 이후 동북지구 항일운동 고조 속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반일운동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북만지구 한족총연합회 산하에 건립된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은 당시 중국반일군인 정초의 호로군, 이두의 길림자위군, 왕덕림의 구국군 등과 중한연합작전을 협의하고 대일항전을 벌이다가 1933년 하반년 한국독립군이 해산되고 20여 명 간부진이 중국 관내지구에로 전이함에 따라 북만지구에서의 대일항전은 결속을 보게 되었다.

 

남만지구 국민부 산하에 건립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당시 중국 항일의용군인 등철매의 둥북민중자위군, 당취오의 요녕민중자위군, 왕봉각의 요동민중자위군, 중공당이 영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등과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과 조선국내침공작전을 벌이다가 일제의 동변도지구에 대한 종합대 '토벌', 체포, 희생과 투항, 조선혁명군 군사위원회 내부의 분열 등 원인으로 하여 1938년 가을에 이르러 남만지구에서의 대일항전은 결속을 보게 되었다.

'9·18'사변 이후 중공당 영도하에서 진행된 조선족들의 항일투쟁은 항일유격대시기, 도북인민혁명군시기, 항일연군시기를 거쳤다.

 

항일투쟁 초기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근거지가 창건된 지방은 모두 조선족 집거구들 이었고 당책임자와 유격대 책임자 그리고 유격대원들은 대부분 조선족들이었다. 동만 4개 현만 보더라도 유격대원중 조선족이 90%이상을 차지하였고 남만유격대 230명 중 조선족이 80여 명이었으며 북만의 영안유격대는 대부분 조선족으로 구성되었다. 동만의 최광, 김일성, 신춘, 방상범, 김은식, 김일환, 남만의 양림, 이홍광, 이동광, 북만의 최석천(최용건), 김책, 이학복, 이복림, 허형식 등은 최초의 항일유격대와 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 데서의 걸출한 지도자들이었다.

주보중은 동북지구 항일투쟁을 회고하면서 "1932년에 건립한 견강한 동만유격대와 1933년에 건립된 강대한 반석유격대, 주하유격대, 밀산유격대, 탕원유격대, 요하유격대는 모두가 혁명적인 조선족동지들에 의하여 창건된 것이었다. 이들 유격대는 후일의 항일연군 제1, 2, 3, 4, 5, 6, 7군으로 발전되었다. 항일연군 제5군에도 적지 않은 우수한 조선족동지들이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20)

 

동북의 항일투쟁은 1936년 이후 항일연군창설시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전성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1937년 말에 이르러 항일연군은 11개 군, 44,000여 명으로 발전장대되었고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적들과 무려 3,976차의 전투(그 중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1,891차)를 진행하여 일제침략군이 중국 관내에로의 진공을 결제하였으며 일제침략자들의 "북부국방선에 숨어 있는 화근"과 "남만공산비적화의 위기"로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각 군에는 수많은 조선족 전투원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수한 지휘 원들도 있었다. 양정우가 지휘한 제1로군에는 제2방면군을 지휘한 김일성을 비롯하여 이동광, 안길, 최현, 김일, 서철 등 주요 책임자들이 있었고 주보중이 지휘한 제2로군에는 총참모장 최석철(최용건)을 비롯하여 제7군 군장 이학복, 강신태(강건), 김광협, 김근 등 주요한 책임자들이 있었으며 조상지와 이조린이 지휘한 제3로군에는 중공북만성위 서기 겸 제3로군 정치위원 김책과 제3군 군장이었던 허형식을 비롯하여 마덕산, 서광해, 김정국 등 주요한 책임자들이 있었다.

특히 조선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동만에서 창건되고 발전된 항일연군 제2군내의 각급 지휘원과 전투원들의 다수는 조선족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주요한 활동무대가 중국 동북지방이었던 만큼 조선인부대의 단독활동보다 중조연합부대인 항일연군의 명의로 활동하는 것이 더 유리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는 중국인 지구에서 활동할 때에는 항일연군의 명의로, 조선족지구에서 활동하거나 조선국내에 진출할 때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명의로 활동하였다.

 

1938년 중국항일전쟁이 대치단계에로 들어감에 따라 동북의 항일투쟁도 어려운 단계 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제침략자들의 정치, 군사, 경제상에서의 "전면적인 대토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의복, 식량, 무기, 한약, 약품 등의 극부족, 수많은 전투에서 연속되는 전투원과 지휘원들의 희생으로 하여 항일연군대오는 1939년 말에 이르러 1,500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역량을 보전하고 투쟁을 견지하며 항일투쟁의 최후 승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항일연군은 대부대활동을 정지하고 소련경내로 들어가 정돈과 훈련을 진행하는 야영훈련과 소부대활동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소련경내로 들어간 항일연군은 주보중을 사령으로 한 교도려와 최석천을 서기로 하 는 중공동북당위원회를 건립하고 정돈과 훈련을 진행함과 동시에 15개의 소부대를 동북에 파견하여 소부대활동을 진행하면서 항일전쟁의 최후 승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북에 진출할 때 항일연군은 할빈, 장 춘, 심양, 세 개 지방과 56개 지점에 진출하여 중국관내로부터 동북에로 진출하는 팔로군, 조선의용군과 함께 일제에 대한 최후의 일전을 벌여 일제를 패망시키고 항일전쟁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였다.

14년간의 한전에서 조선족들은 민족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사상전변을 완성하였고 "조선혁명연자론"과 단순, 반일로부터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며 반일과 반봉건을 결합하는 노선에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슬로건도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에서부터 '중국혁명을 위하여'에로 전환되었다. 투쟁의 주요한 형식은 무장투쟁이었 고 조직형식은 중국 동북지방의 실제로부터 출발한 항일연군이란 중조 연합부대형식이었다.

 

3)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기 위한 조선족들의 투쟁과 민족구역자 치의 실시

 

항일투쟁의 승리로 하여 40년 항전에서 일관되었던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와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하여'란 두 가지 역사사명 중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란 역사사명은 완성되고 이제 '중국혁명을 위하여'란 역사사명만이 남게 되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이후 100여 만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한반도로 돌아갔기에 동북지 구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110여 만밖에 없었다. 이들은 동북 각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47년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당 총지구에 210,953명, 연변지구에 521,900명, 통화지구에 73,918명, 목단강 지구에 108,611명, 송강지구에 64,585명, 합강지구에 42,134명, 내몽골 지구에 5,718명, 이외에 흑하, 용강, 열하, 여순, 대련 등 지구에 일부분이 살고 있었다.21)

1946년 7월 장개석은 항일전쟁의 승리과실을 탈취하기 위하여 전면내전을 발동하였 다. 이리하여 중국역사는 3년 해방전쟁시기(제3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동북에 남아있는 11여 만의 조선족들은 중공당의 영도 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위대한 투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광복이후 조선족들은 중공당이 제기한 '공고한 동북근거지를 건설하자'는 호소를 받 들고 중공당 지방조직의 건설, 정권건설, 인민무장건설을 진행함과 동시에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무장 79,000여 명을 소멸하고 사회안전질서를 바로잡아 놓았다. 이 기초 위에서 1946년 6월부터 1948년 4월까지 토지개혁운동을 진행하여 봉건적인 토지관계와 착취제도를 철폐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여하였다. 연변 5개 현에서는 94,000여 세대의 농민들이 190여 만 무의 토지를 분여받았고 송강성에서는 4만여 세대의 농민들이 80여 만 무의 토지를 분여받았다. 이리하여 조선족 농민들은 이주이후 처음으로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되었다.

 

1946년 7월 장개석이 전면내전을 도발한 이후 조선족들은 '자위전쟁으로 장개석의 진공을 물리치고 전국을 해방하자'는 중공당의 호소를 받들고 참군참전, 대생산운동의 열조를 일으켰다. 해방전쟁기간에 전 동북에서 63,000여 명 조선족청년들이 참군하였으며 이것은 조선족 매 17명당 1명이 참군한 셈으로 된다. 연변 5개 현에서만 해도 34,855명이 참군하였으며 이것은 전 연변 참군자 총수의 85%에 해당된다. 이들은 요심전역과 평진전역에서 우리 민족의 영웅적 기개를 떨쳤고 장강도하작전과 해남도를 해방하는 전투에까지 참가하여 전국을 해방하는데서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1950년의 통계에 따르면 해방전쟁시기 3,550여 명 조선족청년들이 전국의 해장사업을 위해 자기의 청춘을 바쳤고 100여 명에 달하는 사단급 전투영웅, 수많은 영웅집단과 모범인물들이 용솟음쳐 나왔다. 22) 실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붉은기에는 우리민족의 붉은 피가 슴배여 있으며 흑룡강으로부터 해남도에 이르는 중국 땅 어디에나 우리민족의 발자취가 찍혀 있다.

 

1949년 9월 전국제1기정치협상회의가 북경에서 열렸다. 주덕해는 120만 조선족을 대 표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공동강령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여러 민족 이 함께 창건한 다민족국가이다', '중화인민공화국경내의 각 민족은 일율로 평등하다', '각 소수민족이 집거하고 있는 지방들에서는 마땅히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해야 하고 민족집거구의 인구의 다소와 지역의 다소에 따라 분별있게 각종 민족자치기관을 건립해야 한다' 23) 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족은 법률적으로 승인받은 중국안의 소수민족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이 되었다.

1952년 9월 3일 연변 조선족들은 '공동강령'과 '중화인민공화국민족구역 자치요강 '(1952년 8월 9일 발표)에 근거하고 중앙인민자치기구를 설립하고 민족구역 자치를 실시하였다. 1955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 따라 자치국을 자치주로 고치었다. 1958년 9월 15일에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이 건립되었고 길림, 흑룡강, 요녕, 내몽골 등 지방에는 42개 조선족향이 선후하여 건립되었다. 이렇게 되어 중국 조선족들은 중공당의 민족정책 하에 민족평등의 권리를 갖게 되었고 주, 현, 향에 이르는 민족구역자치를 실현하여 우리 민족의 오랫동안의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

 

3. 개혁, 개방 이후의 조선족

 

중공당은 '문화대혁명'이 가져다 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1978년 12월에 제11기 3차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문화대혁명' 기간과 그 이전의 '좌'경적 과오를 비판 시정하고 '조절, 개혁, 정돈, 제고'의 방침과 '대내적으로는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개방'하는 방침을 제정하였다. 하여 중공당의 사업중점은 종래의 계급투쟁중심노선으로부터 사회주의 현대화건설 즉, 경제발전의 중심노선으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당 11기 3차 전원회의는 중공당 역사에서 또 한 차례의 획기적인 중요한 회의로서 중국 개혁, 개방의 기원이 된다.

11기 3차 전원회의의 이후 조선족들도 전국과 마찬가지로 개혁, 개방의 조류 속에서 경제, 문화교육, 민족의식 제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1) 경제영역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들에서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당 11기 3 차 전원회의 이후 개혁과 개방이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었다. 농촌체제개혁은 이러한 경제개발의 첫 시작이었고 돌파구였다.

농촌체제개혁은 1979년부터 시작되어 두 개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 계는 1979∼1984년까지로서 농민과 집체 간의 관계를 개혁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 인민공사제도 폐지, 농산물 수매가격의 대폭 인상 등 개혁조치를 실시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84년 10월 이후로서 농민과 국가간의 관계를 개혁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낡은 유통제 타파, 농부산물에 대한 국가의 계획적 수매와 배정수매제도 폐지, 계약수매 실시, 농부산물 가격자유화 등 조치를 실시하였다.

 

농촌체제개혁을 통하여 조선지구의 농업은 자급적인 경제로부터 상품경제에로, 식량생산위주의 폐쇄적인 소농경제로부터 재배업, 양식업, 축산업, 임업, 향진기업, 합영기업 등을 경영하는 다각 경영에로 전화되었고 조선족농민소득도 늘어나 생활수준이 높아져 농촌의 모습은 크게 변하였다. 무공해기업(線色企業)을 발전시켜 총인구당 수입을 높인 길림성 용전시 장동촌, 산업구조를 적극 조절하여 촌 총생산액과 인구당 수입을 높인 길림성 영길현(永吉縣) 아라디촌, 향촌기업을 크게 발전시켜 촌 고정재산과 인구당 수입을 몇 배 혹은 몇 십배로 늘인 심양시 교외 영수촌과 흑룡강성 해림시 해남조선족향은 농촌체제개혁에서 농촌의 모습을 일변시킨 사례라 할 수 있다. 24) 45만 명 정도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흑룡강성에는 504개의 조선족촌이 있는데, 1990년 인구당 순수입이 1,000원을 넘은 촌이 143개 촌(28.37%), 그 중 65개 촌(12.89%)이 1,200원을 넘었다. 25)

 

농촌체제개혁을 이어 1984년 당중앙 12기 3차 전원회의 이후로부터 도시에서의 경제체제개혁을 전면적으로 진행하였다. 도시에서의 경제체제개혁은 기업개혁을 중점적으로 기구 간소화와 권력의 하부이양을 통한 기업의 외부환경정리, 여러 가지 형식의 경제책임제 실시를 통한 기업의 내부환경정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를 통한 경영기반의 수립 등 3개 단계로 진행되어 공업경제로 하여금 행정기구의 간섭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독립된 체제로, 생산설비가 부족하고 생산력이 낮은 수공업식 작업장으로부터 일정한 생산규모를 갖춘 현대화한 공장체제로 변모하게 되어 공업생산은 계속 온당하게 장성되었고 경제적 효과와 이익도 높이게 되었다.

민족상업경제는 전국 상업경제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종래의 유통경로가 적고 절차 와 규정에 얽매여서 공급과 구매력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많이 벗어나 대내 및 대외교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상품유통체제를 폐쇄식으로부터 개방식으로 전변시켰으며 상품유통 가운데서 시장기제의 역할을 더 발휘시키고 도시와 농촌시장을 활기 띠게 하였다.

 

대내적인 개혁과 함께 대외적인 개방도 힘껏 추진시켰다. 중국의 대외개방정책은 11 기 3차 전원회의 이후 종래의 자력갱생이란 폐쇄적 정책으로부터 외국의 자본, 기술, 경영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대외개방정책에로 전환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5개 경제특구의 설치, 14개 연해개방 도시의 확정, 연해경제특구의 설치 등의 순서를 밟아 남북 18,000km에 이르는 전 해안지역을 개방하고 1988년 1월에는 '연해지구경제발전전략'을 제정하여 연해지구의 대외개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결과 외자도입과 무역확대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매년 10% 수준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지속하였다. 무역규모도 연간 16% 수준의 증가율을 보여왔다. 26)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혁과 개방을 연해지역중심정책으로부터 내륙지역과 변방지역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시켰다.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개혁개방을 강조한 이후 개방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리하여 중국의 경제는 장기적인 고도성장의 궤도에 진입하여 경제발전속도는 연평균 성장률이 9.8%에 달하였다. 27)

 

개방정책이 내륙지역과 변방지역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연변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