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상렬 프로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박사연구생, 북한김일성종합대학 조문학부 객좌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전국어전업 박사, 한국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사천대학교 박사후 과정. 연변대학조문학부 교수 및 교연실 주임 역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수필가, 평론가. 저서 다수.

[서울=동북아신문]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끊임없이 삶의 질을 추구해오는데 있다. 동물이 그 모양 그대로 다람쥐 채바퀴 돌듯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진행한다면 인간은 앞을 보고 달리는 끊임없이 상승하는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데 있다. 이 새로운 삶은 과학기술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이로부터 문명이 개화하고 문화가 산생되었다. 분명 삶의 질이 높아졌다.

 

교통도구 하나만 놓고 보아도 우리가 언젠가 나귀, 소차를 타고 다니다가 자동차, 기차를 거쳐 인젠 비행기가 보편화되는 시대에 들어섰다. 모두들 앞으로 우주선을 탈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삶의 질이 높아짐에 따라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정비례 관계인 듯 했다. 현대문명을 노래하는 미래주의가 전형적인 보기다. 그래 씽씽 날아다니는 비행기와 세월아, 네월아 굼뱅이 소차 사이를 놓고 볼 때 전자가 삶의 질이 훨씬 높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과학기술의 효율성, 편리성이 되겠다. 일일생활권이요, 지구촌이요, 하는 말도 이런 차원에서 생겨난 줄로 안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큼 급해졌고 바빠졌다. 그렇게 한가로울 수 없고 여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삶이 힘들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우리 삶을 되돌아보며 과학기술에 기초한 삶의 질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성의 획득, 과학성에 기초한 우리 인류의 쾌거다. 자연은 정복되고 인류는 못 해내는 일이 없는 듯하다. 마음만 먹으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행복지수가 문제다. 물질은 풍부해졌는데 정신이 메마른다. 크게는 어머니 자연이 노했다.   사실 자연은 우리가 정복하는 만큼 그 몇 백배로 보복을 해온다. 그것은 일종 부메랑효과다. 공기오염, 오존충 파괴, 생태평형 파괴, 지진, 쓰나미, 기상이변…우리는 어쩌면 속수무책이다. 너무나 엄청난 충격 때문에. 여기에 인간성이 기형화되어 간다. 개개인은 모두 자기 중심적인 울타리를 쌓으며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고 타자화한다. '타인이 나의 지옥이 아니더냐!'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소통과 교류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중심적인만큼 외롭고 쓸쓸하다. 감정이 그 만큼 메말라 있다. 대신 팽창하는 것은 욕망-가지고 또 갖고픈 물욕. 우리는 다람쥐 채바퀴 돌 듯 하는 물욕의 덫에 걸려있다. '현대'병에 단단히 걸려있다. 그래 힘들다. 삶의 질과 더불어 상승될 듯한 행복지수에 삐긋 금이 간다. 따라서 자연히 금불여석(今不如昔), 즉 오늘이 어제보다 못하다는 탄식이 나오게 된다. 우리 중국의 개혁개방 전후도 마찬가지다. 개혁개방 전 우리는 물질적으로 빈곤했다. 삶의 질이 낮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너도나도 고만고만한 사회주의평균주의하의 평등은 어쩌면 우리의 행복지수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특히 시장경제가동 후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부해졌다. 물품이 너무 많아 선택의 곤혹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우리의 행복지수는 밑바닥을 기고 있다. 금전만능주의, 생존경쟁, 빈부격차 등이 우리를 울린다.   학자들은 인문정신의 추락을 슬퍼했다. 그래서 사람들 역시 노스텔지아적인 개혁개방 전에 대한 향수에 빠지기가 일쑤다. 우리 조선족도 마찬가지.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참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 왔다. 실로 역동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느 민족보다도 해외진출이 빠른 것 같다. 여기에 모국인 한국이 우리에게 프러포즈를 해오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도나도 한국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진출하며 부를 창출하기에 바빴다. 손에 돈을 쥐게 되었다. 그래 아파트도 사고 자가용도 사고……그런데 우리는 가족이 산산조각이 나고 민족교육이 엉망이고 확고한 삶의 터전을 상실했다. 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를 놓친 격이 된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현대 노마드적인 부평초에 다름 아니다. 그래 행복지수는 고사하고 너도나도 힘들고 바쁘다.   삶의 질과 행복지수, 그래 까닥 잘못하면 반비례로 흐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찍 18세기 프랑스계몽주의시기 루소가 지적했다. 유럽에서 자산계급산업혁명의 쾌거를 부르며 과학기술문명을 자랑할 때 루소는 일갈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도덕성의 타락을 가져온다고, 그래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럼 우리 인간에게는 삶의 질과 행복지수의 정비례 내지는 윈윈의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하겠는가?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 우리 동아시아 전통문화, 이를테면 유교와 도교의 천인합일, 불교의 범아합일의 경지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하여 도교의 소국과민(小国寡民), 즉 작은 규모의 나라에 적은 인수의 국민을 소유한 그런 퇴영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 무슨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가장 못 사는 나라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소, 티벳이나 불교국가인 인도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소, 하는 식의 기본 물질적 생활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아 삶의 질을 운운할 수 없는 나라나 종교적 자아최면에 빠진 상태의 행복지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정녕 삶의 질과 행복지수가 같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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