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장꼬박?
혹시 밤을 꼬박 새가며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하는가?
아니면 누구의 별명인가?
아예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장독대!
이렇게 말하면 "장독대면 장독대지 무슨 장꼬박인가?"하고 눈을 흘길 것이다.
집마당에 된장을 담은 크고작은 항아리들을 돌이나 널판자로 받쳐 올려놓는 장독대.
지금은 도시생활을 하면서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손쉽게 된장이랑 구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거의 집집마다 집에서 된장을 만들었고 집마당에 들어서면 장독대가 보였다.
어렸을 때 나는 장독대 뒤에 숨어 애들과 숨박꼭질도 했고 올망졸망 모여앉은 항아리들 위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장난질도 했다.
여름이면 마당에 심어놓은 풋고추며 오이들을 뜯어 된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눈 내린 겨울아침이면 장독대 뚜껑위에 눈이 몇센치나 쌓였는가 재보기도 했다.
할머니가 장독대를 장꼬박이라 불렀기에 나는 그런줄로 생각했는데 장독대라 부른다는걸 알게 된 건 중학생이 되어 홍명희의《임꺽정》을 읽고나서였다.
어느 날, 옆집에 사는 형님이 마루에 앉아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있기에 나는 가만히 뒤에 다가가서 책속을 들여다보았다.
돌석이는 장독대에 뛰여올라가 작은 항아리 하나를 번쩍 들어 내던졌다.된장을 담은 항아리가 김씨의 머리에 맞아 깨지면서 된장물이 쏟아져나왔다.
"아이구.깜짝이야!"
인기척에 놀란 형님이 책으로 나의 머리를 가볍게 쥐여박는다.
"형님,무슨 책이요?"
"오.임꺽정이라는 소설책인데 너같은 애들은 봐도 몰라."
"형님,그 책을 빌려주면 안되겠어?"
"내일 또 봐야 한다."
"그럼 내일 돌려줄게."
나는 이튿날 아침까지 책을 다 읽고 형한테 가져다주었다.
"벌써 다 읽었어?엇저녁 자지 않고 읽었어?"
"아참 형님,이전에 할머니가 장꼬박이라 했는데 이 책 보고 장독대라는걸 알았어.왜서 장꼬박이라 했을까?"
"장꼬박이라? 음...글쎄다.너처럼 밤을 꼬박 새웠다는 꼬박인데..."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장꼬박을 그만 까먹고 있던 며칠 전이었다.
경주에서 번역컨설팅을 하는 친구가 출장차 연길에 왔다.일본에 함께 유학하면서 중국에서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만 먹는가 했다며 된장찌개를 맛나게 먹는 나를 놀란 눈길로 쳐다보던 친구였다.
친구가 볼일을 마친 날, 우리는 시교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겨울철이라 음식점 마당에 들어서자 담장아래에 눈 덮힌 장독대가 줄지어 서있는것이 보였다.
"아,장꼬박!"
장독대 쪽으로 뛰어가며 친구가 외치는 것이었다.
"장꼬박을 여기서 다시 보네!"
장독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친구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장꼬박.허허.여기서는 이런 말을 안하지?"
나는 시무룩이 웃으며 친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아까 한 장꼬박 말인데 이젠 수십년동안 들어보지 못했네.이전에 할머니가 그냥 장꼬박이라 하셨거던."
"그래?장꼬박은 경상북도 사투리인데 그럼 할머니도 경북출신인가 보네."
"그렇네.근데 장꼬박이 경상북도 사투리였어? 왜서 장꼬박이라 부르지?"
"글쎄 말이네.방언이라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 경북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네. 80고령의 어머니도 가끔 장꼬박이란 말을 쓰고 계신다네.언젠가 아버지한테 물어봤더니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는 흙덩이라고도 하던데..."
"흙덩이라고?..."
그날 저녁 나는 장꼬박을 검색해보았다.
장독대의 경상북도 방언이 맞았다.
헌데 왜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꼬박"을 붙혔을까?
"꼬박 밤을 새웠다.","꼬박 며칠이 걸렸다.","꼬박 이틀이나 잤다.","꼬박꼬박 챙겨먹다.","매년 꼬박꼬박 상위권에 오른다."등등의 꼬박을.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각지에서 사용된 우리말 방언의 진의를 알수는 없었지만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여기저기서 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지방에 따라 장꼬박, 장꽝이, 장뚝간, 장독거리 혹은 장독곳 등 방언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옛날 궁궐에서는 "장고" 라고도 불렀는데 "장고마마" 라고 하는 장을 담는 일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상궁도 따로 있었다 한다.
비록 그럴 법한 해석은 찾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시골집 장독대를 보고 친구와 함께 포근한 옛 고향집 된장 냄새를 서로 다시 떠올린것만으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된장은 잘 발효시킨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이며 조상들의 지혜이다.
맛있는 된장을 만들려고 메주를 써서 장독대에 넣고 매일이다싶이 뚜껑을 열어 해볕을 쪼이고 바람이 들게 하고 비가 올까 싶으면 빨래보다 장독대 뚜껑을 먼저 닫던 할머니의 정성과 물 한그릇 떠넣고 춧불 한대 켜놓고 천지신명님께 자식들이 잘 되라고 치성을 드리던 어머니의 숨결이 어려있는 장독대가 아니던가?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그 할머니들의 오랜 전통과 정성을 이어받고 이어가는 오늘 날,한국은 물론 중국,일본,미국 등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치고 된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오래 먹어도 평생 먹어도 싫증 나지 않고 세월이 흐를수록 새록새록 정이 드는 된장은 항상 우리의 식탁에서 빠질줄 모른다.
이튿날 나는 귀국하는 친구에게 우스개를 건넸다.
"한국 가서 장꼬박의 유래를 잘 알아보시게."
그러자 친구도 농담조로 대답한다.
"알았어.박형도 밤을 꼬박 새지 말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잘 알아보시게."
"하하하."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온 시내가 들썽하게 웃었다.
하늘의 햇님도 장꼬박의 얘기를 들으며 오늘도 구수한 된장 맛을 내느라 서로의 마음이 모여 빛을 반짝이는 장독대에 눈부신 햇살을 한껏 비춰주는 듯 했다.
[편집]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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