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국화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오랜만에 고향에 가게 되었다. 또 어찌 가랴, 근심부터 앞선다. 트렁크에 짐을 담고 위로 끌고 아래로 끌고 공항버스 타고 탑승, 도착하면 또 짐을 끌고 버스 타고 가야 한다.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 하니 기뻤다. 오랜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친정집 가는 기분이었다.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이번 길에 남편과 딸과 같이 가게 되었다. 고향에 간다하니 딸애는 온 밤 들떠서 친구와 전화한다. 

"연길에 가면 먼저 냉면을 먹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소고기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지." 친구가 부러워 걸어온 전화다.

"글쎄, 너 먹고 싶으면 같이 가." 

딸애가 웃으며 어깨가 으쓱 해 골려준다.

"글쎄, 가고 싶은데 난 좀 더 있다 가려고 해. 갔던 바에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오라, 마라탕, 미섄, 궈보러우 많이 먹고 오라."  진심으로 축하하는 말이다. 

"알았다, 감사하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고맙다." 애들은 길 떠나면 먹을 걸부터 계획한다. 몇 해 동안 객지 생활에, 낯선 음식에 얼마나 고향의 향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트렁크가 생각 밖에 술술 잘 끌린다. 세 식구는 다급한 걸음을 내 디디고 있다. 남편은 벌써 저 멀리서 걷고 있다. 성격이 어찌 급한지 걸으면 날아다닌다, 항상 같이 길 떠나면 그냥 달아야 한다, 오늘은 더 빨랐다, 나는 딸과 같이 줄달음을 한다. 집에 간다니 저리 좋은지. 딸애가 화를 낸다.

"아버지 좀 천천히 가면 안돼요?"

그제야 남편은 웃으며 검음을 늦춘다. 

그렇게 아득히 멀어 보이던 길인데 벌써 배행기가 연길 공항에 착륙하고 있다. 아침까지도 한국이었는데 지금은 연길이다. 비행기에 내려 걷는 걸음이 마치 한국공항에서 탑승 길에 오르는 같다.  

집에 도착하자 딸애는 흥분에 들떴다. 먼저 마라탕에 접어든다, 고약한 냄새가 뭐 좋다고 그러는지 침을 질질 흘리며 게걸스럽다. 미섄도 사고, 궈보러우도 사고, 냉면도 사고 엎친데, 덮친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서 다 먹지도 못하면서, 남편도 나도 그걸 먹어 주느라 힘들었다. 결국 딸애는 속탈이 났다. 체하여 약을 먹고 아쉬워 입만 쩝쩝 다신다. 그만 웃음이 나온다. 

딸애가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난다. 소학교 1학년 때 학교 마당에서 양고기 뀀을 팔고 있었다. 양고기 뀀을 사달라고 하니 하나에 25전하는 양고기 뀀을 2개 사 주었다. 그때 딸애는 그 양고기 뀀을 받지 않고 달아나며 울었다. 왜 우는지 몰랐다. 양고기 뀀을 파는 장사 군이 말한다. 

"그깟 2개 가지고 어느 코에 바르겠어요, 애가 억울해서 우는 거예요." 

그때는 양고기 뀀이 금방 나왔기에 나는 먹어 보지 못했고 얼마 쯤 먹으면 되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는 고기를 크게 좋아하지 않으니 고기에 관심이 없어 딸애의 비위를 상한 것이었다. 그 후부터 양고기 뀀을 사 달라면 몇 개먹고 싶은가 물어보고 사 주었다. 그 후 부터는 먹을 걸 사 달라고 하면 얼마 먹겠는 가 물어보고 사 주었다.  

반찬을 너무 많이 사지 말라고 했다가, 괜히 그때 상처를 건드릴 가봐, 또 인색한 엄마가 될 가봐, 또 오랜만에 만나 포식 하고 싶어 하기에 내버려 두었더니 속탈이 난 것이다. 흐흐… 

한 때는 이곳을 많이 원망 하였다. 왜 왔던가, 시골에서 농사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매일 벌어도 나머지가 없으니, 하루 일 못 하면 주머니가 텅 비였다. 

그러나 역시 생각의 차이인 것이었다. 집 팔고 땅 팔고 온 것은 딸애를 공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 하며 열심히 살았다. 남편은 삼륜차를 몰고 온돌 수리도 하였고 나는 삯 기음도 매고 처음으로 땅 판 서러움도 느껴 보았다. 우리가 이 곳에 오지 않으면 딸애가 시골에서 불쌍하게 되는 것이라고 시골은 점점 아이들이 적어져 학교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딸애가 공부를 끝마치고 직장을 찾으니 나는 남편과 같이 한국 길에 올랐다. 처음 1년은 고향 생각에 많이 울었다. 힘든 식당 일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할 때면 내가 왜 이 곳에 와서 바보처럼 헤매는가. 좋은 새 아파트 사놓고 땅굴 같은 월세집에서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전등을 켜 놓고 살면서 하며 서러워, 잠 못 이루었다.

"사장님 퇴근 할게요."

파출로 식당에 설거지 갔다가 끝나서 돈 받고 사장한테 인사를 하였다.

"에이 씨 발."

주방에서 들려오는 실장의 욕설이다. 나는 참을 수 없어 주방에 뛰어 들어가 따졌다.

"실장님 나한테 하는 소리죠, 왜 그래요?"

실장의 세던 기가 생각밖에 약해져 떠듬거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좀 있다 내가 차로 버스 정거장 까지 실어다 주려 했는데."

그 말속엔 좀이라도 더 부려 먹으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내 돈 받고 내 발로 버스 정거장 까지 걸었다. 

내가 화를 내도 그냥 일 하러 오니 아무 말 없이 잘 대해준다. 너무 힘들어 가지 않으니 사무실에 전화해서 퇴근 시간이 되었다고 즉시 옷 갈아입고 가면 뭐냐고 마무리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파출이 시간 되면 퇴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 가, 끝이 없이 들어오는 그릇들을 매일 마무리 까지 하면 먼 길 버스 타고 집에 와서 또 이튿날 버스 타고 10분이라도 일찍 도착 해야 하는데 집에 와서 쉬는 시간이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월급제 하면 힘들 때 쉬지 못해 파출을 뛰니 또 힘든 일만 차례지는 것이다. 사무실에 사장은 내가 좀 참아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건 아는데 참 받아 드리기 힘들었다. 남의 돈 벌기 진짜 힘든 것이었다. 

태산처럼 실어오는 그릇들을 아침에 힘이 날 땐 번개처럼 치워 버린다. 그러나 힘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기계도 쉬지 않고 내내 돌면 불이 날 것이다, 밥도 밥상에 앉아 먹을 시간이 없어 주방에서 쫓아다니며 먹는다. 에라, 모르겠다, 감당이 안 되면 도아 주는데 하면서 슬슬 눈치 보면서 천천히 손을 놀린다.  

"야, 너 참 일도 빨리 잘 하는데 머리 또 참 좋다, 너 보통 사람이 아니야, 사람 그럼 못써."

나이 70 되는 한국 왕언니 하는 말이다. 

내가 몸 빼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다. 할 수 없지 뭐, 왕언니 그릇을 정리하라 하면 그릇이 세척기에서 막 쏟아져 나오니 수습을 못하고 그릇을 정리해 세척기에 넣으라, 해도 산처럼 부리어 놓으니 감당을 못 하니 나 혼자 한사람 반의 몫을 끝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왜 왔는가, 하면서 후회 하였다. 그렇게 살기 힘들다던 연길이 가슴 뜨겁게 안겨 왔다. 연길에서도 이만큼 일 하면 잘 살 수 있을 텐데 역시 생각의 차이었구나, 하면서 눈물을 쏟았다. 

남편은 지방에서 용접을 하면서 얼굴도 몸도 화상을 입기가 일수였다. 새 보일러에 불을 달아 보려 높이 올라섰다. 다리에 불이 달렸는데 뜨거운 걸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사다리 타고 올라와 불을 꺼 주었다.  

힘드니 서로 원망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일만 하겠는가,하면서 식당 노래방에서 밤늦게 돌아오지 않으니 나는 찾아다니느라 힘들었다. 역시 생각의 차이에서 고향 떠난 걸 서러워하였던 것이다.

  딸애를 중국에 혼자 두고 온 것 때문에 더 힘들었다. 어데서 누가 두고 온 자식들 사고 났다 하면 속이 꿈 뜰 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딸 데려 오기를 돌아쳤다. 2년 만에 딸애도 한국에 오게 되었다.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딸 역시 눈물을 많이 흘렸다. 한국에 와서 발전 하려고 배우려고 왔는데 아무 곳에서도 써주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자기 또래들은 중국에서 발전 하는데 한국 온 것이 잘못 되었다, 한다. 

한 1 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잡일에 심부름을 하면서 배웠다. 2년이 되니 경력을 따져 컴퓨터에 오를 수 있었다. 역시 생각의 치이었다. 그때 돌아갔더라면 이것도 놓치고 저것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중국에 있는 친구들 다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남편은 지금 현장에서 오야지로 일 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반찬 가게를 하고 있다. 역시 생각의 차이었다. 그때 눈물을 흘려도 돌아가지 않기를 잘한 것이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었다. 만일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으면 이곳에 오지를 않았을 것이고 만일 잘 살려는 마음이 없었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의 차이는 어두움과 밝은 면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남편은 오래 만에 고향에 왔다고 늘 친구 만나러 나가서 또 밤중에 들어온다. 나는 또 밤늦게 까지 기다리며 근심이다. 세 식구 좀 오래 있으려 했는데 남편 술 때문에 떠나기로 했다. 일이 바빠야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세 식구 또 다시 탑승 길에 오르기로 하였다.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항상 밝은 면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개떡 같은 남편 만나 개고생 한다 하면 남편이 개떡처럼 보이고 고생하는 남편으로 바라보면 성공하는 남편으로 바라보게 된다. 쓸모없는 아내 만나 개고생 한다하면 쓸모없는 아내로 보이고 고생하는 아내로 바라보면 훌륭한 아내로 바라보게 된다. 자녀를 커서 사람 질 하지 못 한다 하면 사람 질 할 것 같지 못 하게 보이고 우리 자녀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하면 훌륭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비결은 어두움과 밝은 면,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맨발로 걸어 다니는 도시가 있었다. 한 신발 장사 군이 이곳에 와 보고 "이곳 사람들이 다 맨발로 걸어 다니니 신발을 신을 이유가 없다, 신발을 파는 것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신발장사꾼은 "이곳에 사람들 맨발로 다녀서 엄청 큰 시장이다, 대박이다."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은 생각의 차이에서 서로 말이 달랐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세 사람 비행기에서 내리니 비가 억 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 세 사람 다 물참봉이 되었다. 택시도 보이지 않고 우산 장사도 보이지 않아 젖은 몸으로 무겁게 짐을 끌며 힘겹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의 차이에서 밝은 면만 바라보고 걷고 있다. 만일 콧구멍을 위로 뚫었으면 콧구멍에도 빗물이 들어갔을 것인데, 콧구멍을 아래로 뚫었기에 콧구멍에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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