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아래 평론은 한국 예술가협회 제36회(2016)최우수 예술가상을 받은 김재황 선생이 류재순 작 단편소설 ‘하얀 무지개’를 읽고 보내온 평론입니다. 많은 참고바랍니다. 류재순 선생의 소설도 아래에 실었으니 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소설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읽고 싶다’라는 내면적 호기심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하얀 무지개’이니 그렇다는 말이다. ‘무지개’라면 형체가 있는 게 아니다. 허공의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반원형 일곱 빛깔의 아름다운 줄’인 무지개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얀 무지개는 무엇을 뜻하는가.  작가의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등장하는 ‘예금이’는 작가보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소위 ‘닭똥과자’를, 작가는 그녀를 통하여 맛을 보았다. 그 기억이 일생 동안 작가의 뇌리에 자리 잡고 있다. 여유 있는 가정의 ‘예금이’는 ‘채색 띠 같은 오색 무지개’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아니, 작가에게도 ‘그 무지개가 요정마냥 하늘에 동화 같은 다리를 걸어놓고 유혹’의 손길을 보내곤 했다. 그 정경이 이 소설에 다음과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예금이는 ‘재봉틀집’ 외동딸이었다. 그에게는 손재봉 일로 동네 사람들의 옷을 지어주며 품삯을 받는 재간 있고 인물 좋은 어머니가 계셨다. 그래서인지 예금이의 주머니엔 잔돈푼이 늘 떨어지지 않았다. 예금이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 인물 체격도 최고였지만 옷도 언제나 잘 입고 다녔고 책가방에 군짓거리도 늘 있었다. 특히 닭똥과자는 그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와 나는 친구들이 다 인정하는 십대 문학 소녀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틈만 생기면 저 멀리 세린하를 끼고 있는 우리 학교 근처의 버들 방천으로 가서 이해 못할 돈키호테의 대사를 모방해 보고 푸시킨의 시를 읊곤 했다.」   이렇듯 꿈이 많은 문학 소녀였고 집안 또한 넉넉한 처지였으니, ‘예금이’는 그 가슴에 이미 봄이 가득하였다. 나로서는 조숙하다고 여겨지지만, 연애 쪽지도 쓰고 초등 졸업 준비를 하던 어느 날에는 ‘예금이’와 반장의 연애편지가 공개됨으로써 ‘전 반이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그 후 ‘예금이’는 ‘가수의 꿈’을 지니게 된다. 그 꿈에 빠지면 유혹도 생겨나는 법, ‘예금이’는북조선으로 가서 방직공장의 고된 일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어찌어찌 문예 연출단의 어린 가수로 작은 명성을 얻게 되지만 그곳까지 찾아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돌아오고 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가수의 기회가 있기는 있었다. 어느 시의 가무단에서 가수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달려갔는데, 도진 편도선염 때문에 그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에금이’는 무작정 ‘가수가 되는 꿈’을 마음에서 놓지 않았다. 소설의 설명처럼 그녀는 ‘방법도 정보도 스승도 없이 꽉 막힌 구석지고 자그마한 촌마을에서 방향 잃은 사슴마냥’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때까지가 아마도 ‘예금이’에겐 ‘아름다운 무지개’를 쫒던 시절이었던 듯싶다. 그러나 ‘예금이’는 북경대학의 한 남자를 만나면서 일곱 색깔 무지개와 같은 ‘가수의 꿈’을 접고 말았다. 결혼은 ‘예술의 무덤’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니듯이, 그녀는 북경대학 학생과 결혼을 함으로써 무지개의 꿈을 접고 가정에 안주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무지개는 아름다운 빛깔을 잃었다. 이는 바로 소설 제목에서 밝힌 ‘하얀 무지개’를 상기하게 만든다. 그녀가 유능한 남자와 결혼하였으니 앞으로 그의 삶은 희망적이었을까. 어쩐지 자꾸만 ‘하얀 무지개’가 발목을 잡는다. 이 소설의 한 대목인 ‘항상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그의 얼굴엔 옛적 도도하던 빛이 사라졌다.’에서 크나크게 불길한 예감이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는 작가와 ‘예금이’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또, 흐르는 물같이 십여 년이 흘렀다. 작가는 ‘예금이’를 여러 경로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그녀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 당시에 ‘예금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불길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을까? 여기에 그 해답을 나타내는 한 대목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문 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예금이를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였다. 엉거주춤 서 있는 그의 자세는 옛날 버들가지처럼 쭉 뻗었던 멋쟁이 몸매가 아니었다. 그리고 검은 포도 알처럼 맑고 또랑또랑하던 눈망울은 물에 풀려져 있는 새알같이 힘이 없었다. 두서없이 그려진 그 눈가의 아이섀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퍼졌다. 낡은 아파트는 한 계단 한 계단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그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잘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예금이’에게 지녔던 ‘하얀 무지개’의 이미지는 여기에서 또 한 번 때가 묻는다. 아! 이제는 ‘회색 무지개’라고 말해야 옳지 않았을까. 금시에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끼고 금방이라도 슬픈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다리까지 절다니--- 왜?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와 남편과의 사이에 딸 셋이 있었으나,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별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 남편이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남편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남겼지만, 유명한 문학선배인 시인을 만나서 뜨거운 관계로 발전되자, 그 돈마저 세 딸들이 몰려와서 모두 가져가 버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금이’는 그와 결혼을 하였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 그마저 췌장암으로 그녀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어찌 신의 장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 기가 막히면 하얗게 질리게 된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회색 무지개’는 그래도 조금의 희망은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실낱같은 그 희망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하얀 무지개’로 다시 변해 있었다. 사소한 오해도 풀지 못하고 ‘예금이’는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전일까? 아니면 도피일까? 아마도 선택하기 쉬운 방법이 도피 쪽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 작가는 ‘예금이’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작가는 ‘그저 자살이란 두 글자만 그 머리를 후려치고 있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작가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이름 모를 무엇인가를 원망하고 한탄하며 밤거리를 방황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때 작가는 ‘하얀 무지개’를 분명히 보았을 것 같다.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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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재순 프로필: 중국작가협회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상임부회장 중단편소설집 베이징과 서울에서 각기 출판. 소설, 수필 등 100여 편 이상 발표. '도라지'문학상, '흑룡강신문'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  하얀무지개

후다닥 급작스레 쏟아진 소낙비의 시원한 세례를 받아들인 세린하(细鳞河)는 누런 흙탕물을 일구며 신나게 쏴쏴 흘러간다.

나는 예금 이와 나란히 책가방을 메고 흙냄새 확 풍기는 세린하강가의 젖은 풀숲 길을 밟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바짓가랑이가 다 젖어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세린하 강둑길로 왕가툰(王家屯)을 지나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예금이가 사는 영안툰(永安屯)이 보인다. 하학 후 의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토요일의 반나절 수업은 나로 하여금 친구네 집까지 따라가 놀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금이는 과자봉지안의 닭똥과자를 몇 개 꺼내어 내 손에 쥐여 준다. 닭똥과자-말 그대로 닭똥 모양으로 튀겨나온 과자 모양새를 보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불렀다. 모양은 그래도 그 특별히 바삭하고 달콤한 이색 맛은 우리의 입안에서 행복의 천국을 만들어 주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힘든 할머니손에서 자라며 공부를 하고 있는 나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간식이었다. 나는 친구가 주는 과자를 입에 한참 물고 바삭바삭 씹으며 신이 나게 “친구 따라 강남" 가고 있었다. 물기 가득 먹은 대기 속에서 씻은 듯 말끔해진 하늘 중천에 눈부신 태양이 우리 정수리를 따갑게 내려 쪼였다.“저것 봐,무지개!”예금이가 가리키는 저 먼 곳을 바라보니 채색 띠 같은 오색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찬란한 햇빛, 무한정 시야를 넓혀주는 청신한 공기 속에서 무지개는 요정마냥 하늘에 동화 같은 다리를 걸어놓고 애들을 유혹한다.“와!” 많은 무지개를 보아왔으나 그날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지평선 저 어딘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인 듯 했다. 우리는 고개를 젖히고 입을 하 벌린 채 아무 소리 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러던 중 예금이가 문득 한마디 했다.“근데 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전번 가을에 흰색 무지개를 봤데”“뭐? 무지개가 무슨 흰색?”나는 큰 소리로 말도 안 된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주말이면 번번이 그에게서 닭똥과자 얻어먹는 고마움에 억지로 꾹 참았다. 예금이는 “재봉틀 집” 외동딸이었다. 그에게는 손 재봉 일로 동네 사람들의 옷을 지어주며 품 삿을 받는 재간 있고 인물 좋은 어머니가 계셨다. 그래서인지 예금이의 주머니엔 푼돈이 늘 떨어지지 않았다. 예금 이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 인물 체격도 최고였지만 옷도 언제나 예쁘게 잘 입고 다녔고 책가방에 군짓거리도 늘 있었다. 특히 닭똥과자는 그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와 나는 친구들이 다 인정하는 십대 문학 소녀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틈만 생기면 저 멀리 세린 하를 끼고 있는 우리 학교 근처의 버들 방천으로 가서 이해 못할 돈키호테의 대사를 모방해보고 푸시킨의 시를 읊곤 했다. 머리가 좋은 그는 교과서에 있는 고리키의 '해연의 노래'를 큰 소리로 줄줄 낭송도 잘하였다. 물론 공부는 내가 더 잘하였다. 나는 숙제를 꼬박꼬박 완성하는 노력파였고 그는 대충대충 눈가림으로 해치워도 나와 조금 차가 날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음도 좋으셨고 아는 것도 많으셨다. 그날도 예금이가 나를 데려 온걸 보고 반겨 맞으시며 내가 좋아하는 감자볶음이며 절인 깻잎을 내놓으시며 배불리 먹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금이와 함께 오래 놀고 잠을 잔 후 내일 돌아가라 하셨다. 또 남은 헝겊 조박들로 만든 작은 속옷 하나도 입으라고 내 책가방에 넣어 주셨다. 나는 주말을 그의 집에서 보내기가 일수였다. 이 모든 걸 할머니는 다 알고 계실만큼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의 어머니에게 물었다."정말 하얀 무지개가 있어요?""그래, 분명히 봤다. 다른 사람들도 봤다고 하더라. 햇빛이 부족하거나 물방울이 부족하거나, 벼로 말하면 결실을 못 맺은 쭉정이 같은 것이지……" 우리는 어머니가 들으실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문학을 얘기했고 반의 남자애들을 얘기했다. 그는 반의 반장인 민철이가 책가방 안에 몰래 넣어줬다는 연애 쪽지도 나에게 보여 줬다. 이불 속에서의 예금의 커다란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다른 재간이 없는 나는 문학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는데 예금이는 좀 망설이고 있었다. 음악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학교 교경절(校庆节) 때면 번번이 무대에 올라 맑은 목소리로 독창을 하군 하는 그에겐 또 다른 꿈이 싹 트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선생님은 그가 꼭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졌다고 했다. 초중 졸업 시험 준비를 한창 하던 어느 날 이었다. 전반이 발칵 뒤집어졌다. 예금이와 반장의 연애편지가 선생님의 교탁위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발견된 것인지 난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연신 조용하라고 교탁을 탕탕 두드렸지만 들쑤셔놓은 벌집 마냥 교실은 끝없이 웅성거렸다. “잘난 척 하더니 연애질이나 하고”“누가 그러는데 세린하 다리 밑에서 둘이 뽀뽀 하는 것도 봤데 ”점점 이상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책상에 엎드려 울던 예금 이는 끝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같이 뒤따라 나서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꽥 소리를 지르셨다 초중반에서 수석으로 첫 입단(入共青团)신청서 비준을 받았던 그들 둘의 지표는 모두 다른 학생에게 돌려 졌다. 오랫동안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어수선한 학교생활 속에서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주말에 내가 그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나에게 하였다. 한 마을에 사는 어느 언니 벌 되는 친구와 함께 북조선에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외지로 옷감을 사러 나가신 어머니가 집에 없는 사이에 빨리 달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한창 북조선 김일성이 중국의 주은래 총리에게 조선족 인재들을 지원해 달라는 요구에 수긍하고 있는 시기여서 모든 것이 합법적이고 그곳에 가면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예금이 같은 경우, 나이 어리고 노래 잘하고 인물 좋으니 예술 대학 같은데도 거뜬히 입학시켜 줄 거란 것이다. 그 언니의 말이었다. 북조선에 가서 유명한 가수로 태어나겠단다. 예금의 얼굴은 또다시 생기가 돌았고 그의 입에선 계속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말렸다. 나는 예금이가 북조선에 가면 더 큰 출세 길이 트인다고 아예 생각지도 안았다. 단, 그와 갈라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 엉엉 울면서 말렸다. 그러나 자신감에 잔뜩 부풀어있는 예금 이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나를 마주하고 소리쳤다. “두고 봐, 이담 너까지 데려가지 않나, 거기 가서 너도 유명한 작가가 될 수도 있잖아! 생각해봐, 너는 작가 나는 가수, 우린 아주 유명 빵빵 하하하!"손뼉까지 치며 부산을 떨었다. 헤픈 웃음, 넘치는 열정, 안하무인식의 충만 된 자신감! 예전의 그가 다시 살아났다. 그의 마음속에 모든 것이 이미 돌처럼 굳게 결정된 상태였다. 그의 뒤에는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한동네 선배 언니가 있었다. 나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학교 숙소를 향해 세린하강변 길섶을 투벅투벅 걸었다. 세린하는 누가 어디서 부르기라도 하듯 햇빛 아래서 물고기 비늘 같은 잔물결을 이루며 반짝반짝 느긋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서 멍하니 수면만 바라보았다. 세린하의 강물처럼 이미 저 멀리로 출렁출렁 흘러가버린 이 모든 옛일들이 지금 다시 고향을 찾아가는 나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돌아갔다. "이번에 가면 꼭 한번 찾아가 봐야지!", 이번 귀향길의 가장 큰 계획 중의 하나였다. 사실 그때 집에 돌아와 딸의 행적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만사불구하고 압록강을 건너가 예금이를 찾기 시작하였다. 반년도 안 되어 예금이는 코 뀐 송아지처럼 꼼작 없이 끌려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평양의 어느 한 작은 방직공장에서 그를 찾아내었다. 일하는데는 보통 방직공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과외 문예 연출 단으로, 희망 있는 어린가수로 자그마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외동딸을 타향에 두고 떠나올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예금이는 징징 울면서도 그동안 그리웠던 어머니였는지라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겠다는 풍성같이 부풀었던 꿈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가수가 될 수 있을까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집에 사람이 없을 땐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나름대로 연습을 하였다. 소학을 졸업하고 집에 눌러 앉아도 방법 없이 농사꾼이 되어야 하는 그 답답하고 소통 없던 시절에 농사일에 바쁜, 하나의 이름 없는 작은 현성의 자그마한 촌부락에서 그의 두서없는 열정은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들은 예금이의 머리가 좀 이상하다며 수군거렸다.  뜻밖의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Y시의 가무단에서 가수를 모집 한단다. 그러나 그가 소식을 접했을 때는 면접 볼 날이 단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붙들고 생전 가보지 않았던 Y시를 향해 부랴부랴 떠났다.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불편한 교통의 자그마한 Y시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하루반의 시간이 다 소비된 상태였다. 긴장하고, 떨고, 지치고…끝내 그의 편도선염이 도지고 말았다. 완벽한 준비들을 하고 온 뭇 가수들 앞에서 그는 아무런 실력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저 원래 노래 잘해요, 나 병 나을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 이 낯선 응시자의 당돌한 말에 면접관들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렇게 두 모녀는 김빠진 공처럼 후줄근히 집으로 돌아왔다. 몇 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그는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그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면접 본 여느 가수들보다 노래를 잘한다고 자신했고, 평양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어머니와 행악질하기 시작했다. 사실 평양 방직공장에서 연출하는 것을 본 평양 어느 예술단의 단장이 그를 이미 주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실패를 보고 동네에선 더 쉬쉬 거렸다.  당시는 취업에 호적 거주지가 운명을 좌우지 할 때였다. 농촌호적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해보겠다고 저렇게 날뛰는 거여, 쯧 쯧! 저 머리가 어떻게 잘못된 게 아니냐? 는 소문이 나자 농촌 공연 팀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연애사건이 터지고 북조선으로 부모 몰래 “도망”갔다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벌써 비뚤어져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나는 가끔 그를 만났다. 내가 그에게 학교에서 우리끼리 만든 문학서클 얘기를 하면 그도 같이 흥분되어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적 운명을 얘기를 하며 그중의 대사들을 큰 소리로 줄줄 외웠다. 조기천의 시도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는지 몰랐다. 사실 자기도 가끔 시를 쓴다고 자랑하였다. 그가 낭송하는 자작시를 듣노라면 교실 책상머리 얘기만 알고 있던 우리 같은 단순한 문학도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넓은 폭의 생활의 감수성과 기발한 상상력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고 우리 문학 서클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그는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학교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그래도 자기는 가수가 되는 것이 적성이라 하였다. 정보도 스승도 없이 꽉 막힌 구석진 자그마한 촌마을에서 그는 방향 잃은 사슴마냥 마구 들뛰었다. 그때 우리 집은 시골이 아닌 국가의 양식 공급을 타먹는 작은 '시민'생활을 하고 있는 때여서 가끔은 밀가루를 갖고 한족들에게 배운대로 물만두를 만들어 먹곤 하였다. 조선족 시골사람들이 잘 먹어보지 못하는 중국식 물만두를 예금이는 너무나 좋아했다. 나의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그가 오면 꼭 물만두를 해 먹여 보냈다. 예금이가 노래를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었다. 그는 서슴없이 그 작은 방에서 목청을 높여 자기가 평양에 있을 때 항상 무대에서 불렀었다는 '박연폭포'를 불렀다. 그는 우리 둘만을 상대해서도 얼굴 표정과 몸 연기를 살려가며 목청을 제대로 돋우어 부르는 턱에 옆집에 사는 중국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들여다봤다. 할머니와 나는 급기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일단 옆에서 노래요청만 하면 완전 무대에 나선 가수 마냥 연기를 했었다. "저 정신병 아니야?" 소문은 이렇게 나번졌다. 그러나 그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소란스러운 문화대혁명의 비상 속에 수많은 학생들은 “투쟁”을 하러 다니느라 바빴고 놀려 다니느라 바빴다. 역전 대합실은 항상 중학생 대학생들로 웅성거렸다. 예금이는 문화대혁명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의 가수 꿈의 출로를 위해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찾아보려고 고군작전하며 항상 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녔다. 강성(江城)의 저녁 대합실에는 군복 같은 헐렁한 홍위병 복장을 입고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는 수많은 홍위병들로 법적 거렸다. 날씬하고 훤칠한 키꼴에 몸에 딱 맞는 평복을 입고 어디론가 빠져나가려고 출구를 찾고 있는 한 청초한 앳된 여자애의 커다란 맑은 눈동자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녀의 말쑥하고 하얀 얼굴은 이 열기 띤 대혁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조금은 두려운 듯 방황하는 어린양 같이 여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한 대학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문화 대혁명 때문에 휴학이 된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북경대학의 졸업을 앞둔 남학생이었다. 그는 예금이를 바라보며 대학교정에선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다는 확신에 넋을 잃고 있었다.  지루한 문화혁명도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예금이가 우리 집엘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희열에 덜떠 있었다. 그는 그 북경대학의 남자친구에 대해 끝없이 얘기하였다. 자기는 중학밖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실토 할 때 그 남자는 이렇게 예쁜 여자가 학벌이 뭐가 대수냐며 "그래도 이것이 힘을 냈어"하며 자기 대학마크를 시위하더란 것이다.  "그 남자는 공과전업이여도 문학예술 모르는 게 없어, 정말 내가 딱 찾고 있던 사람 같아"뜻밖에 자신의 소울 메이드를 찾았다는 행복에 푹 젖어있는 그는 잠시 가수의 꿈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는 수많은 사랑시를 밤낮 쓰고 있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해 하는 친구의 얼굴은 태양보다 더 찬란해 보였다.  그의 결혼으로 더 멀리 떨어져 살게 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애들을 키우고 직장 생활을 하느라 구태어 그를 찾아가 보지 못했다.어느 날 나는 강성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을 끝마치고 번화한 동시장(东市场)을 돌아보고 있었다. 옷가게 앞에서 체구가 늘씬하게 잘 빠진 어떤 여자가 옷장사와 가격 실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간 나는 깜작 놀랐다. "이런, 예금이 아니니?!" 나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휙 돌리던 그도 나를 알아보고 "야!"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니 너 남편 따라 남방 어느 도시에 간 거 아니었어?" 그의 남편은 남방의 어느 대도시의 큰 공장에서 공정사로 취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몇 해만에 만난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항상 자신감에 충만 되어 있던 그의 얼굴엔 옛적의 도도하던 빛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한 오리 가냘픈 웃음을 얼굴에 남기며 어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끌었다. 그의 집은 번화한 동시장의 뒤 모퉁이에 있는 한 아파트였다. 그가 차려준 밥을 먹고 우리는 또다시 한 이불을 덮고 밤을 새우며 얘기를 나누었다. 결혼 후 그는 줄줄이 딸 셋을 낳았다. 물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들이길 바랐다 .남편은 그를 자기 부모님들이 계시는 강성으로 집 한 채를 사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달마다 생활비를 보내온다 어쩐다 도와주었다. 생활은 이럭저럭 유지가 되었지만 남편 없이 혼자 애들을 키우느라 힘겨운 생활이 역력했다.  나는 그의 방을 둘러보며 옛날에 그가 추구하던 그 무슨 흔적 같은 거라도 남아있나 찾아보았다. 보풀진 소설책과 시집 몇 권이 있었고 음악책 몇 권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린 처녀시절에 가수가 되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닐 때 찍은 사진 몇 장이 크게 확대되어 액자 속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결혼사진에 담겨진 행복이 피어나는 얼굴은 말 그대로 한 송이 화려한 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의 화려함은 흔적을 잃었다. 왜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만 하느냐고 나는 따지고 물었다. 남편의 그 공장엔 대학시절 같은 전공이었던 여동창이 같이 일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대학 때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 남자를 벌주기 위해 평생 그의 옆에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아니, 네가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어?""이런 얘기 그 사람은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해"하느님 맙소사! 너의 자존심은 ?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당겨 마구 흔들었다. "에잇, 재미없다. 우리 다른 얘기하자"분명 많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찾아 온 친구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게다. 그는 또다시 문학에 대하여, 가수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즘 자기가 Y시의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 "푸른 머리야"를 작곡을 했다며 날보고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 밤중인데 무슨 노래냐며 내가 극구 말렸지만 그는 옛적과 똑같이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애들도 아랑곳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 감성에 푹 젖은 노래의 정서가 너무 내 마음에 와 닿았다."아니 너 언제 작곡 하는 것도 배웠어?" 그는 히히 웃으며 자기는 오선부도 잘 모르지만 일단 감정이 솟구치면 어디선지 알 수 없는 멜로디가 술술 나온다고 했다. 필기가 없어도 한번 작곡 된 곡은 순서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그럼 작곡해서 어디다 발표 좀하지?""내가 뭐 오선 부를 적을 줄 알아야지……"그는 자기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을 불렀다. 모두 서정 곡 들이였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곡들을 세상에 내여 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무튼 그는 천재인 것이 분명하였다. 세상살이에선 늘 조금은 이상한 퍼포먼스로 비춰 지긴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나는 다시 반시간 남아 급행열차를 타고 강성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생활 한지 이미 근 십 몇 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동창들과 고향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었지만 예금이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소식도 두절되었다. 만나보고 싶은 예금이는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너무나 많은 것들이 궁금해 났다. 나는 한국에 왔다간 고중 동창을 먼저 찾아갔다. 그와 얘기를 나누며 나는 혹시 예금이란 친구를 알 수 있느냐고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뒤따라 동창모임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 예금이는 없었다. 나는 조급해서 예금이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동창이라면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 다 섞여 있는데 예금이가 이 고장에 생활 하고 있기만 하다면야 당연히 이 좌석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애타게 찾고 있자 한 친구가 예금이가 확실히 아직 강성에 산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왜 안 불렀냐고 화를 내자 좌석이 금시 조용해 졌다."니 계 하구 친해? 왜 꼭 불러야 돼? 그 완전 미치광이야!"한 남자 동창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이람? 나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옆에 앉은 동창생에게 조용히 예금이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보았다.. 이튿날 나는 그 전화번호로 예금이를 찾아갔다. 그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문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예금이를 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엉거주춤 서있는 그 자세는 옛날 버들가지처럼 쭉 뻗었던 멋쟁이 몸매가 아니었다. 검은 포도알처럼 맑고 또랑또랑하던 눈망울은 물에 풀려져 있는 새알같이 힘이 없었다. 두서없이 그려진 눈가의 아이섀도우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쩐지 슬퍼졌다. 낡은 아파트는 한 계단 한 계단 걸어서 층계를 올라야 했다. 그런데 그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잘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올 봄에 Y시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 아직 회복이 덜 돼서.“나의 놀란 시선을 감지하고 그가 말하였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천천히 올랐다.문 앞에 도착하니 집안에서 깽깽 거리는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너 강아지 키워?”그는 말없이 씩 웃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새하얀 강아지 세 마리가 오구굿 달려 나와 깽깽 거리며 주인에게 매달렸다. 이상한 냄새가 콧속으로 확 스며들었다. 그는 강아지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담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먹이를 장만해 놓고 강아지들을 불렀다.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제일 먼저 나의 눈에 안겨 오는 것은 맞은 켠 벽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엄청 큰 사진액자였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그 액자 앞으로 다가갔다. 분명 예금의 결혼사진이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있는 남자는? 나는 근시안경을 추켜올리며 자세히 보았다. 저 남자-나도 알고 있는 Y시의 유명한 문학선배-바로 그 “푸른 머리야”를 쓴 시인이였다. 예금이가 그 옛날 그 시에 작곡을 하여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맑은 하늘을 떠이고 서있는 푸른 머리 벚나무- 가없는 들판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 푸른 스카프를 날리며 서있는 여름소녀의 상상에 심취되어 있었다. 그 시인은 나의 친구와는 적어도 십년이상은 연령차가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때는 우리 모두 그 시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내 친구의 얼굴도 사진사에 의하여 젊음으로 많이 손질되어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너 남편은? 딸들은 다 시집가서 잘들 살고?”나는 알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고 묻고 싶은 말들이 연이여 터져 나왔다.“뭐가 그렇게 급해, 다 얘기 할게. 우리가 서로 소식을 끊고 있은 세월이 얼만데, 나한텐 엄청 많은 일들이……”그는 내손을 잡아당겨 같이 소파에 앉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곤 한참을 머리를 수그리고 묵묵히 있더니 흩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금의 남편은 몇 번이고 이혼을 요구했지만 그는 끝까지 버티고 남편의 요구에 수응하지 않았다. 남편도 끝까지 외지에서 독신생활을 고집하였다. 원래 술을 좋아하던 남편은 잦은 연회와 파티에서 늘 만취된 생활을 이어갔었다. 혼자 있을 때도 맑은 정신일 때가 별로 없었단다. 어느 날 그 먼 곳에서 갑자기 소식이 들려왔다. 남편이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것. 그런데 그의 남편은 그때 돈 몇 십만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통장에 남겼었다. 공장에서 몇 번이나 뛰어난 연구 성과로 거금의 장려금을 탔던 것. 예금이는 같이 달려갔던 시집간 세 딸들에게도 얼마의 금액을 나눠주고 마음을 달래려 Y시로 떠났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 가수가 되겠다고 달려갔던,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던 곳이며 우리민족의 문화인들이 집결되어 있어 그의 적성을 얼마간 풀어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얼마 없어도 민족의 문예생활의 진한 내음을 마음껏 들이키고 싶었다. 그로서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그래도 무도장이었다. 아직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하는 미모와 몸매, 노래와 춤에 천부적인 재능은 금방 무도장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노래도 불렀고 춤도 추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십여 년 전에 상처하고 혼자 살고 있는 그 남자를 만났다. 퇴직하고 할 일이 별로 없는 그 남자는 가끔 이렇게 무도장에 나와서 고독을 푼다고 했다. 그런데 춤을 추며 인사를 하고보니 그 남자가 바로 “푸른 머리야”를 쓴 시인이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 남자는 오선부도 잘 모르는 이 미모의 여자가 자신의 그 옛 시에 그처럼 감성 깊은 멜로디를 맞춰 넣은 것에 깜작 놀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에서 예금의 숨겨진 천재 같은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하였다.“우리는 똑같이 미쳐 있었지, 역시 비슷한 사람끼리 알아보게 되어 있는 것 같아”예금의 말이었다. 그가 그 남자를 데리고 강성으로 돌아와 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남자가 떠나기 바쁘게 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몰려와 돈을 몽땅 내어놓으라고 달려들었다. 왜 아빠가 남긴 그 피 같은 돈을 갖고 이렇게 급급히 다른 남자의 품으로 들어가느냐고 했다. 해석하고 상의하고 빌고 싸우고……그는 기진맥진해졌다. 홧김에 그는 남은 돈을 몽땅 딸들에게 돌려주고 쫓아버렸다. 그리고 빈집을 뒤로 한 채 Y시로 다시 찾아갔다. 그 남자와 밤을 새우며 인생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문학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얘기 했으며 무도장으로 커피숍으로 공원으로 마음을 풀었다.“그래도 그 남자가 내 인생에서 제일 내 마음을 잘 알아 줬던 것 같아 참 좋은 사람이었지 ”액자의 사진을 보며 예금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말을 끊고 있었다. 그 힘없는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얘기를 계속했다. 어느 날인가 그 남자가 속이 불편하다고 말하였다. 검진을 끝낸 의사는 말기 췌장암이라는 무서운 선고를 하였다. 그는 첫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충격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몇 년 동안 병수발을 하면서 그는 뒤에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의 뒷수습을 다 끝내고 강성으로 돌아오려던 날 깊은 수심에 잠겨 있던 그는 무의식중 붉은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한 승용차에 부딪치고 말았다. 허리를 다치고 다리가 골절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그를 대신하여 해결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출원하자마자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동분서주하며 교통사고에 대해 보상을 알아보느라고 또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는 심신이 만신창이 되어 Y시를 떠나 다시 이고장 비어있던 옛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휭 해진 집안엔 낡은 가구들 몇 점이 조는 듯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저기에 개털이 날려 다녔다. 봄철이여서 강아지들도 털갈이를 하는 모양이다. 털이 묻을 것 같아 나는 내 가방 놓을 자리를 찾느라 한참 서성 거렸다 내 모양새를 보고 그는 웃으며 말하였다.“집안이……내가 다리도 허리도 잘 못쓰니 집안 꼴이” 침대는 두개였다. 그의 집에만 오면 항상 한 이불을 덮고 밤을 새우며 끝없는 얘기로 밤을 새우던 일이 생각났다. 오늘 저녁엔 어떻게 하는 거지?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그가 말하였다.“이 강아지들 셋 다 아직 어려서 내가 데리고 이 침대에서 잘 테니 넌 저쪽 침대에 가서 혼자 편하게 자라”“강아지를 데리고 한 침대에서 자?”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강아지들은 그의 유일한 식구니까 한 이불 속에서 외롭고 고독한 밤을 강아지들과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이불이라니, 그 털…….전등스위치를 눌렀다 방안이 캄캄하였다. 그의 입에선 더는 문학과 예술 자작곡들 아무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간혹 이것저것 물으면 그는 동문서답 식이었고 어찌 보면 이상하게 횡설수설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의 이불속에서 강아지들의 깽깽 거리는 소리가 가끔 들렸다. 아, 아,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독하면 저럴까!? 나는 코등이 찡해 났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겨우 잠이 들려 할 무렵이였다.“너 외로움이란 거 알아?"“알만 해”잠기어린 소리로 대답하였다.“알긴 무슨, 식구가 없어서 뿐이 아니야, 환갑이 다 된 여잔데도 한 밤중에 두 다리가 걷잡을 수없이 움씰거릴 때가 있지, 웬일인지 몰라 뒤척거리다 비로소 느낌을 알게 되는데 손을 팬티 속에 넣고 엉성해진 거웃 두등에 대고 투정부리는 애 얼리듯 한참 문지른다는 사실 상상 해봤니?” 나는 자던 잠이 싹 달아났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었지? 나는 숨을 죽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의 이런 “시크릿”을 들으면 분명 육십 된 늙은 여자가 미친 소리 한다고 할 것이다.이튿날 날이 새여 한결 환해진 방안을 보니 구석구석 손갈 데가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청소를 하며 침대 밑을 보니 하느님 맙소사 이걸 어찐 담? 강아지들의 똥 덩어리 털 무더기 들이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강아지들은 그 어둑한 곳을 자기들의 변소 칸으로 정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허리를 조금도 구부릴 수 없는 예금 이는 그 침대 아래를 한 번도 내려 다 보지 못 했던 것이다. 청소를 마친 나는 그에게 돈 오백 원을 주며 개집을 하나 사다 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론 다른 수요 되는 물건도 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큰돈을 주느냐며 그는 거의 허리를 굽히며 덥석 받았다. 물론 당시에 그 액수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 익숙해 왔던 콧대 높은 친구의 보지 못했던 이런 자아비천의 자세가 너무나 낯설게 안겨 왔다. 닭똥 과자 하나도 쪼개 먹던 우리가 아니었던 가, 너 왜 이러니? 나는 가슴이 저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북경의 친구가 오늘 강성의 어느 국장으로 있는 동창생네 집으로 오고 있으니 그곳으로 오란다. 나는 예금이도 동창이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아주 좋아했다. 그는 장롱의 옷들을 꺼내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하는 옷들은 대부분 Y시에 있을 때 그 사랑하는 시인 남편이 사준 거라고 자랑했다. 잠시 눈시울을 붉히는 듯 하더니 금방 기분을 되살리며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을 견주어 보았다. 나보고도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하나 골라 가지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보아하니 이런 모임에 오랫동안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 아픈 다리와 허리가 엄청 불편해 보였지만 모처럼 좋아진 그의 기분이 보기 좋았다. 국장네 집은 넓고 고급스러웠다. 강성에서는 꽤 손꼽히는 사람들이 모인 듯 했다. 내가 절룩거리는 예금이를 데리고 들어서자 나를 반겨 맞던 북경의 그 친구가 금방 낯빛이 흐려졌다. 다른 동창들도 애써 불쾌감을 감추고 있었다.“너 아직도 재하고 친하니?”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어제저녁도 예금이네 집에서 잤다고 대답했다. '쟤 강성에서 소문났어, 다들 미쳤다고 해. 툭탁하면 분수없는 말이나 지껄이고 저 주제에 노래도 뭐 가수보다 지가 더 잘 한다나?“친구가 내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예금이는 내가 자기에게 돈까지 줬다는 자랑을 널어놓았다.  나는 다니던 직장에 볼일도 있고 하여 그와 함께 세린하가 흐르는 고향을 찾아갔다.우리는 세린하강변을 거닐며 옛날을 회억했다. 세린하다리에 서서 다니던 모교, 저 멀리 높은 굴뚝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시체를 태울 때 고약한 연기를 내뿜는 화장실 굴뚝이었다. 그 화장실을 학교 근처에 지을 때 우리 모두 재수 없다고 몇 날 며칠을 불평을 부리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 그 굴뚝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어떤 한들을 풀어내고 있을까?”예금의 이 뜻하지 않은 말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울적해 졌다. 글쎄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한들을 풀려고 할까……. 나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향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특히 예금이의 변한 모습이 나를 계속 우울하게 하였다. 어쩌면, 인생이 그렇게 되었을까? 나는 폰을 들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돌아온 후 잘 있느냐고,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굳세게 살아가라고 얘기 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받았다. 그런데 내가 미처 인사를 다 하기도 전에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혹시 내 그 옷 가져갔어? 나비 리본 한 하늘색 블라우스 말이야?”“뭐? 무슨 말 하는 거야? 옷이라니?”“그 있잖아, 그날 놀러 가던 날, 내가 너에게 보여줬더니 니가 엄청 예쁘다고 했잖아 그 옷 Y시에 있을 때 우리 그 선생님이 사 주신 건데”나는 예금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가까스로 그의 용의를 알아차렸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띵해 났다. 설마 나를 도적으로?……. “너 밖에 왔다간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 질렀다“너 과연 미쳤구나! 정말 무섭다!”그리고 전화기를 닫아버렸다. 이런 상대에겐 구구절절 해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나를 그렇게나 모르고 사귀여 왔단 말인가? 어쩌면 나를 그런 상상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온 천하가 그렇다고 말해도 예금이만은 아니라고 말 했어야 할 판에. 나는 주위 친구들이 왜 그를 피하며 미쳤다고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됐다. 이렇게 그와 나의 우정은 끝이 났다.  한 일 년쯤 지나서이다. 한국에서 일하다 고향에 갔다 온 친구가 나를 부러 찾아왔다. 역시 우리 강성사람이었다. 그가 예금의 소식을 전했다. 예금이가 고향에 돌아온 자기를 찾아왔더란다. 예금이는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반년 후에 그 옷을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생전 손님이라곤 없는 자기 집에 나 밖에 왔다 간 사람이 없었기에 경솔하게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후에 알고 보니 강아지들의 수작이었단다. 그러니 제발 용서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제발 전화 한통 걸어 달란다. 할 말이 많다고……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않았던 나는 그 말이 나온 김에 찾아온 친구에게 내 생각을 쏟아 놓으며 실컷 화풀이를 하였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소리쳤다. 그 후에도 한국에서 강성에 갔다 오는 친구들은 번번이 나를 찾아와 그의 용서를 전하였다.그런데 한번 굳어진 나의 마음은 풀리지가 않았다. 그 후 그의 소식은 다시 잠잠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몇 년이 지났을까? 나도 점점 늙어가고 실수도 잦아졌다. 주위 친구들도 심드렁해 갔다. 저마다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들 하고 이 세상에 사는 것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며 너그러움으로 세상살이를 하려는 깨달음에 한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문득 예금이를 떠올렸다. 소녀시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갖가지 색상으로 떠올랐다. 때 늦은 회한과 성찰이 내 가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금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그는?…….  또다시 고향길에 들어섰다. 강성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예금이를 찾아갔다. 그가 살던 집은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번화해진 강성은 낯선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아는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전화를 해서 그에 대해 알아봤다 .마지막에 한 친구가 분명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내가 그 집 큰딸을 만났었는데 저네 엄마 소식을 물었더니, 엉엉 울더라.”“왜?”나는 다그쳐 물었다.“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었나봐 집안에서 목을 메여…….” 그 뒤에 친구가 뭐라고 세세히 상황을 얘기하는지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살이란 두 글자만 내 머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엄마를 방치하고 무관심했던 딸들의 마음도 천벌을 받고 있으리라!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이름 모를 무엇인가를 원망하고 한탄하며 밤거리를 방황하였다. 아, 용서한다는 그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었던가! 이튿날 직장의 퇴직금 때문에 다시 세린하가 흐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린하 강변을 홀로 거닐었다. 둘이서 닭똥과자를 먹으며 마냥 즐겁기만 하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듯했다. 그가 큰 소리로 낭송하던 고리키의 “해연의 노래”가 귀에 쟁쟁히 들려왔다. 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 가슴을 파고드는 자작곡들도……. 저 멀리 화장터의 굴뚝에선 오늘도 연기가 피어 올랐다. 저승에 가시는 저 사람들은 어떤 한들을 풀어 놓고 있는 것일까!?  아아, 사라져 버린 하얀 무지개여……. 2016년 12 19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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