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박씨 성의 유래와 신라왕의 호칭에서 나타나는 주체성

▲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중국동포타운신문 주간
[서울=동북아신문] 4. 박씨 성의 유래와 신라왕의 호칭에서 나타나는 주체성

BC2세기경 고조선이 연나라한테 패망한 후 부여, 예, 맥 등 수많은 부족연맹국가로 나뉘었고 아리수(한강) 이남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 등 부족연맹국가들이 병립하였다가 드디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정립의 시기에 접어든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삼국을 부를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부르지만 사실 건립연대를 따지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나열해야 마땅하다.
신라는 삼한 가운데 진한(경상도)의 영토 범위를 바탕으로 건립된 국가였다. 진한은 한문으로 辰韓이라 적지만 일설에 의하면 秦韓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삼국사기』에 실려 있는데 진나라 유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한은 신라로 되기 전에 6부로 이뤄져 있었다.
1은 알천 양산촌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이다. 마을 어른은 알평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왔다. 이가 급랑부 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2는 돌산 고허촌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라 하여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다. 이가 사랑부 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3은 무산 대수촌이니 마을 어른은 구레마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에 내려왔다. 이가 점량부 또는 모랑부 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4는 취산 진지촌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라 하여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다. 이가 본파부 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5는 금산 가리촌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 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6은 명활산 고산촌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이라 하여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다. 이가 습비부 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前漢 지절 원년 임자(BC69년) 3월 초 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을 가지지 못하고 보매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나정 우물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매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젠 천자님이 이미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자를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날 사랑리 알영정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계집아이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입부리 같은지라 월성 북쪽 냇물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입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천의 이름도 따라서 拔川이라 하였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지라 알은 바가지 같이 생겼고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이라 하므로 따라서 성을 박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오봉 원년(BC57년)에 남자는 왕위에 올랐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자아~ 이 대목에서 부연설명하자면 1960년대 남한에서 배달민족의 성씨를 조사한 결과 전통 성이 278개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김씨가 가장 많은데 전체 인구의 19%였고 다음 이씨, 최씨, 박씨, 순인데 이 4개  성이 무려 전체인구의 50%를 웃돌았다. 배달민족은 김씨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씨이지만 이 두 성씨는 모두 중국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278개 성씨 가운데서 박씨 빼고는 나머지 277개 성씨가 모두 중국 성씨문화를 따서 유래된 것이다.

한족도 朴氏가 있지만 배달민족처럼 ‘PIAO’가 아니라 소박하다는 뜻인 ‘PU’로 읽는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배달민족의 박씨는 바가지에서 유래되었다는 뜻이므로 중국 한족에게 없는 유일하게 배달민족의 성씨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배달민족 고유의 성씨는 박씨이고 그 외 다른 모든 성씨는 중국 성씨문화를 본떠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배달민족의 성씨문화를 알려면 먼저 중국성씨문화여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朱駿聲의『說文通訓定聲』에 의하면 “성이란 것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나타낸다. 女라는 글자와 生이란 글자로 분해되는데 회의자다. 이때 물론 生을 聲字로 볼 수 있다. 옛날의 신령스러운 성인들은 모두 그 어미가 하늘에 감하여 아기를 낳아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칭하여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하는 것이다. <春秋>隱公 8년조에 좌씨가 단 주해에 이르기를 ‘하늘의 아들이 덕을 세울 때 그 태어난 바를 따라서 성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건대 신농의 어미가 姜水에서 살았고, 黃帝의 어미가 姬水에서 살았고, 舜의 어미가 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어미가 산 지명을 따서 그 성을 삼았다. 그러므로 성이란 어미의 생한 바를 따르는 것이다.”

성이 어미가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면 씨도 역시 마찬가지로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 이에 관해선『通志·氏族略序』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삼대(夏商周)에 성과 씨를 구분하였다가 漢代부터 성과 씨의 구분이 없어진다. 『通志·氏族略序』에 의하면 “삼대 이전에는 성과 씨를 둘로 나누고 귀한 자는 씨가 있고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그러므로 성을 씨라 부를 수는 있으나 씨는 성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사마천은『사기』를 지으면서 성과 씨의 구분을 없애고 혼동하여 썼다(姓氏之稱,自太史公始混而爲一). 허나 성과 씨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예하면 ‘복희는 성이 풍씨였다’를 결코 ‘복희는 씨가 풍성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 뿐 결코 성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달민족의 성씨는 중국성씨문화를 본떠서 사용해왔지만 중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한족들은 조적 혹은 적관이 있기는 하나 조선민족의 본관과는 개념이 다르다. 한족들이 말하는 조적 혹은 적관은 조상들의 고향을 의미할 뿐 배달민족처럼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식으로 ‘무슨 왕씨’ ‘무슨 진씨’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족은 한고향이라는 향토의식이 뿌리 깊지만 조선민족처럼 초면인데도 본이 같다고 해서 벌을 따져보고 환갑이 넘은 노인이 새파란 젊은이를 삼촌벌이나 형님벌이 된다고 당장에서 깍듯이 대하면서 친척을 만났다고 기뻐하는(한국에서 아직까지 이런 기풍이 심하다) 등 유사한 행위가 없다.

모두어말하자면 씨는 상대를 높이는 존칭이지 결코 성이 아니며 성을 대체할 수도 없다. 때문에 성과 씨, 본과 씨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할 때 될 수 있는 한 씨를 붙이지 말고 그냥 ‘김가’ ‘최가’라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신라 초대 왕은 성이 박씨였고 이는 배달민족이 창안해낸 유일하게 독자적인 성이다.

신라 초대왕의 성이 박이고 이름은 박혁거세였다. 뜻인즉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2대왕인 남해왕은 居西干이라고도 하고 次次雄이라고도 불렀다.『삼국사』에 이르기를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으니 辰 땅 방언으로 왕이란 말이며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차차웅은 자충이라고 하는데『화랑세기』를 남긴 신라 최대의 역사가인 김대문은 "차차웅은 방언에 무당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외경하다가 마침내 높은 어른을 자충이라 하였으며 혹은 尼師今이라고도 하였으니 잇끔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남해왕이 죽고 그 아들 노례가 왕위를 탈해에게 사양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매 갸륵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더라.”하면서 곧 떡을 씹어 시험해 보였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가 이렇다. 혹은 또 麻立干이라고도 하니 김대문이 이르기를 “마립이란 것은 방언에 말뚝이란 말이다. 말뚝표는 직위에 맞춰 설치하므로 왕의 말뚝이 주장이 되고 신하의 말뚝은 아래로 벌려 서게 되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羅王曆에 의하면 초대왕 박혁거세를 제외하고 거서간 또는 차차웅으로 부른 임금은 제2대 남해왕 유일하며, 제3대 노례왕부터 제16대 乞解王까지 이사금이라 불렀고 제17대 奈勿王부터 제22대 智訂王까지 마립간이라 칭했다.

이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세 가지 왕에 대한 호칭에서 고대 신라문화의 독창성을 보아낼 수 있다. 차차웅은 무당이란 뜻인데 2천 년 전 배달민족의 문화는 무속문화가 가장 활성화 되었던 시기였다. 당시 왕은 정치 지도자이자 제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런 패턴을 우리는 ‘제정일치시대’라고 말한다. 전 연세대 교수였던 유동식 선생은 무당이란 巫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巫란 글자는 위 가로가 하늘, 아래 가로가 땅, 양 옆의 두 인은 사람이 춤추는 모습이며 내리 금은 사람이 춤으로서 하늘의 신을 지상의 인간과 교감시키는 메시지다.” 지금도 대한민국 무속문화는 지구촌에서 으뜸으로 성행하고 있다.
이사금을 사서에서 이빨이 가지런하게 많이 나 있는 모습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충분치 못하다. 원시인류는 동물에 비해 생존능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을 숭배하게 되었으며 많은 토템문화를 비롯해 많은 문화들이 이로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왕은 그 누구보다 힘이 으뜸이고 따라서 생존력이 으뜸이라는 메시지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마립간을 말뚝이라 했는데 말뚝은 모계시대에서 부계시대에로 과도하는 과정에 남성을 의미하는 상징물이었다. 즉 모계시대에는 씨족과 씨족 사이, 부족과 부족 사이의 경계를 도랑을 파서 나타냈던데 비해 부계사회에 진입하면서 경계를 말뚝으로 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지위가 높을수록 말뚝을 크고 높게 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등으로 작고 낮게 했던 것이다. 계급사회에 진입해서 일정 기간 말뚝은 신분을 가리는 징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신라의 이와 같은 왕의 호칭을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와 백제는 왕의 호칭을 중국식을 따랐던데 비해 신라는 중국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 문화를 영위하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신라는 AD6세기 중엽까지 중국과 별로 왕래가 없어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다. 그래서 독자적인 문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 뒤 제23대 법흥왕(?~540년)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려고 하였고 아울러 왕의 호칭을 불교를 흥기시킨다는 의미로 법흥왕이라 지었던 것이다. 제24대 진흥왕이란 의미도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불교로서 나라를 일으키기엔 역부족이라는 한계를 실감하고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되어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는 기치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자체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갖고 나라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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