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미영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 수필 시 다수 발표
[서울=동북아신문]지나간 시간은 다 그립다고 한다. 그래도 생각나고 그리운 때가 그리운 것이다.

6~70년대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집집마다 많이 어렵게 살았다.  지금의 전자제품이나 아파트 같은 건 아예 꿈도 못 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많이 불편하고 어렵게 살았지만 그중에서도 양식고생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았다. 한창 먹을 나이인 남자 형제들이 많다 보니 배급소에서 한 달 양식을 타 오며는 보름 좀 넘으면 다 떨어졌다. 배급소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많이 모자라니 초겨울이 되면 우리 집은 감자와 무우는 몇 마대 씩 김치움에 넣고 밥에 보태 먹었다.  팔다 남은 감자국수도 싸게 사서는 한 끼씩 떼우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당면은 아예 보기도 싫다.  늘 시래기 국에 밥반찬이라야 감자볶음 아니면 김치가 전부였다. 그래도 저녁이면 온 식구 다 모여서 하하호호 하면서 맛있다고 떠들어가면서 먹었던 일이 어제 같고 꿈만 같다.  지금도 어릴 적 기억에 제일 남는 것은 손꼽아 기다리던 구정이다. ᆞ구정이 돌아오면 엄마는 우리들에게 양말 한 컬레 씩 사주셨다.  그 양말 한 컬레에도 너무 좋아서 밤에 꼭 쥐고 잤던 일이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 모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만두를 빚었는데 새해 누가 제일 운이 좋은가 본다면서 만두 속에 동전도 넣고 개구쟁이 셋째는 만두 속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그거 씹는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물마시면서 난리법석 하던 일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또 우리 외갓집에서는 2~ 3년에 한 번씩 도문에 계시는 작은 할아버지네 집에서 온 친척이 다 모여서 설을 보냈다.  2박3일 한40여명정도 모이는데 그 누구하나 불평불만 없이 신나게 먹고 마시고는 저녁이 되면 우리 외삼촌이 사회를 보고 오락회를 열었는데 누구나 장기자랑해서 1등한 사람에게는 자그마한 상품도 주었다. 모두들 그 상품을 받겠다고 별의별 노래와 춤자랑다해서 온 동네방네 떠나갈듯 웃고 떠들었던 것이 모두가 옛 추억으로만 되었다ᆞ 또 우리 친정엄마는 아무리 어려워도 몇 달에 한 번씩 열콩을 듬뿍 넣어 옥수수 죽을 한 가마씩 써서는 양옆집 앞집 뒤집 모두 청해서는 잔치를 벌리셨다. 그러면 이집에서는 깍두기, 저 집에서는 배추김치, 옆집에서는 마른반찬, 하여간 한 가지씩 가져오다 나며는 상다리 부러질 정도였다.  그렇게 맛있게 잡수시고는 1전내기 민화토를 밤새도록 치고 화토안치는 분들은 뜨개질 하면서 수다 떨고 놀던 일도 지금은 새삼스레 그립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지만 동네 민심과 정은 지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때는 집집마다 경제적인 여유도 없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세월이었지만 마음과 인심만은 항상 넉넉하였다. 예전에 추억은 몇날며칠 새 가면서 말해도 다 못할 것 같다. 이제 곧 새해가 찾아 온다.  매년 새해가 올 때마다 옛 추억에 그리운 친척들과 어릴 적 고뭇줄 놀이하고 숨박꼭질 놀이하던 친구들이 모두 생각나고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도, 한집에서 서로 부비며 살던 형제도 그립고 모두 다 그리워지면서 마음이 아련해 진다.  그렇게 많던 친척과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자기 삶을 찿아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어떤이는 소식조차 없이 하늘나라에 간 이들도 많다. 참, 그 넉넉하고 후한 정과 인심마저 어쩌면 모두 떠나버렸는지?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여유 있게 살고 있지만 각박한 삶에, 냉엄한 현실 속에서 아직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무겁고 답답한 인생을 살아갈 때마다 양말 한 컬레에도 짜릿하게 행복했던 그때가 그립다.  배는 좀 고팠지만 풋풋한 인정에, 뜻하지 않은 행복에 가끔씩 가슴이 울렁이던 때가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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