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순 프로필 중국 심양 소가툰 출생. kbs방송국에 수필 다수 발표, 우수상과 장려상 여러 번 수상, 특집에도 당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지금의 남녀노소 누구나 생일이 되면 이름모를 맛있는 음식이며 아름다운 꽃과 케익에 생일축하노래며 사진촬영 녹화 기념까지 하며 한해 또 한해 더 멋진 추억을 남긴다.

생일날 입쌀밥만 먹고 지냈다하여도 너무 만족스럽게 느껴졌던 그 시절 우리집과 100미터 거리를 두고 살고있는 먼고모의 집을 나는 내집처럼 다녔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음력9월초의 어느날이였다. 나는 숩관적으로 아침밥을 먹고 또 고모의 집문턱을 밟았다. 문고리를 놓기도 바쁘게 고무가 하시는 말씀 " 화순아, 니 오늘 아침 뭐 맛있는거 먹고 왔노?" 평소와 마찬가지로 풀대죽을 먹고 온 나는 대답하기가 싫어졌다. 알고보니 나보다 고모집의 두살아래 남동생 기송이도 저와 한날을 가진 생일이기에 그날이 바로 나의 생일이기도 하였다.

기송이 생일에는 미역국에 입쌀밥이며 과자 사탕까지도 먹었다는것이다. 고모는 과자와 사탕도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평상시 그처럼 좋아하는 과자와 사탕이지만도 그것들이 나의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가슴에서 울분과 슬픔이 막 솟아올랐다. 나는 다짜고짜 집에 달려가서 어머니한테 행패를 부렸다. “엄마, 기송이 생일에는 쌀밥에 미역국이며 사탕과 과자까지 사주었는데 나는 생일인데도 풀대죽만 끓여줘요…?”하면서 엉엉 울음보까지 터뜨리고야 말았다. 입쌀밥 못해주신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리라고 생각조차 할줄 모르는 저는 어머니의 그 긴요한 말씀만 들렸다. “다음 생일에는 엄마가 잊어먹지 않고 우리 화순이의 생일에는 꼭 맛있는 입쌀밥을 해주마. 이렇게 약속하마.”라고……

식량정책이 아주 불투명할 그때 우리집은 아이없는 장정들이라서 풀대죽을 끓여보태도 해마다 식량 고통은 면치 못했다.

이듬해 어머니는 생산대의 모내기를 끝마치고 사람눈에 잘 안 띄는 곳에다 벼모 한줌을 줏어서 벼한단 날대를 찾아서 캐왕을 냈다. 한포기의 곡식 심을대를 캐왕을 내서는 안되는 그 시절. 누가 알면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분자의 큰 모자를 씌울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겨우 벼한단을 수확해냈다.

어머니는 채 여물지도 못한 벼를 베어다가 손으로 잘 훑어서 몇근의 벼를 장만하였다. 이 귀중한 벼를 햇뼡에 말렸으면 빠르고 좋을텐데도 그렇게 할수가 없어서 삿자리밑에 구들에 불을 피여서 말리였다. 며칠이 지나서 잘 말린 벼를 나무절구에 쿵쿵 찌어냈다. 찌어낸 벼를 키에 넣고 부르니 금사락같은 귀중한 쌀이였다. 이렇게 만든 쌀은 끝내 나의 생일밥상에 올라왔다.

음력 9월초엿새 아침, 김이 무럭무럭나는 나의 밥그릇에는 누구의 그릇보다 더 높게 담겨져 있었다. 밥은 물감을 넣고 지은 것 같이 파란색 밥이였다. 하지만 언젠가 먹어본 밥보다 윤기가 돌고 구수하였다. 다른 밥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맛있었다. 아마 벼가 절반은 익고 반은 안익은 벼인가싶다. 

어머니가 그처럼 힘들게 손수해주신 저의 생일밥은 아마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상상할수 없는 밥으로만 느껴진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생일이 아닌 평상시에도 습관적으로 지어먹는 여러가지밥, 현미밥, 잡곡밥, 이름모를 영양밥, 수도 없이 많이 먹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저의 생일에 손수해주신 생일밥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을 아마 영원토록 못 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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