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위이(花語)탐방시리즈 속편

 [서울=동북아신문] 본지는 산동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의 저명 시인이며 출판가인 마치다이의 인터뷰를 싣는다. 시인의 삶의 철학과 인생관이 너무나 잘 녹아있는 글이다. 편집자     
 
1. 선생님의 시집 <허이바이뺀>(黑白辨)이 2016 춘완(春晚)에서 10대 우수시집을 수상하였고 최근에는 또 '2016 제1회아시아시인상'을 수상하셨네요. 수상시집과 수상소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마치다이: '허이바이뺀'은 제가 활동을 안 한지 17년 만에 복귀 후 쓴 두 번째 작품입니다. 2015년 3월에 산동화보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제가 편집한 ‘창허어원충(長河文叢)’도서시리즈에 속한 것이지요. 알려진 저의 시들 중에 <팡관저어(旁觀者)>, <하늘, 빛이 없어지다, 푸름도 없어지다> <세엔스(獻詩)>, <하인리히‧만에게(寫給亨利希·曼)> 등은 모두 이 책에서 나온 시들이에요.

첫 번째 시집 <허이루바이조우(黑如白晝)>는 센쫭수쥐이(線裝書局)에서 2014년 8월에 출판했고, 그 중에 알려진 시들은 <스즈어쒀어(詩者說)>, <의문>, <지렁이, 지하시인이다>등 있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은 2011년과 2012년에 쓴 것이고 제 인생 중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 시절에 쓴 작품들에게 ‘하느님의 복지’란 제목으로 지었어요. 제가 어느 탐방에서 이나모리 가즈오의 말을 인용해 "재은 나로 하여금 영혼에게 달라붙어 있는 업(보)을 시로 만들어 배우게 한다(灾难让我学会了把在灵魂上的业障变成诗)"는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시절에 저는 628편의 시를 썼고 '허이바이뺀'과 '허이루바이조우'는 단지 그 중에 일부분이었죠. 그리고 그 전에도 이미 책 19권을 출판했어요. 그 시절에 쓴 작품들은 예전 작품과 많이 다르지만 한결 같이 영혼이 중심이에요. 제 자신도 이상하다 싶었어요. 반생의 부침을 거치고 돌아보니 나는 일찍 필을 놓은지 몇 년을 보냈었지만 한자를 얕보지 않았어요.

'허이바이뺀'이 2016년 10대 우수시집을 수상할 수 있어서 의외였지만 기쁘기도 했습니다. 아마 시인에게 영예가 더 필요하겠죠. 그러나 저 같은 수많은 어두운 밤에 직면해 눈물을 흘리며 류우환(劉歡)의 "오늘의 모든 영예는 이미 먼 기억이 된다……"를 부른 사람이라면 상에 대한 면역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지요. 그래도 베이다오(北島), 양롄(楊煉), 어우양장허(歐陽江河)등 함께 상을 받을 수 있어 흥분되기도 했죠. 이런 감정은 순간에 사려져 버리지만. 사실은 '흑여백주(黑如白晝)'를 출판한 후에 업계의 더 많은 분에게 인정받았고 <특구문학(特區文學)> 2015년 제2기에서 쉬찡야(徐敬亞), 샹웨이꿔(向衛國) 두 분이 진행하는 칼럼에서 소개되어 장쯔(張智), 당쓰(唐詩) 두 분이 평가문을 발표하였으며, <명작감상(名作欣賞)> 2015년 7월 중순 호에도 '마치다이 <흑여백주(黑如白晝)> 논평집’을 발표했어요. 그리고 한 번에 줘안(左岸), 리타오(李濤), 왕쯔칭(王志清), 왕쟈(王嘉), 뇨뎅칭(牛殿慶), 꿔지어린(郭久麟), 왕요신(王游鑫)등 일곱 분의 시인, 교수, 평론가들의 문장을 게재했어요. 그에 비해 '흑백변(黑白辨)'도 까오야빈((高亞斌) ,꽁바이윈(宮白云), 신보핑(辛泊平)등이 쓴 평론 몇 편을 받았지만 신문, 잡지에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은 아직 수 백편이나 있는데 그들이 해 뜰 날을 기다리고 있지요.

'2016 제1회아시아시인상'을 수상한 것에 관해서는 의외이지만 기쁘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했습니다. 저의 시는 그 전에 몇 수만 한국어로 번역해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나라나 어떤 언어로 번역해 발표했는지 관심이 없었어요. 하나는 번역된 시를 전혀 못 알아보고, 그건 어차피 번역가의 일이니까요. 또 하나는 외국친구들이 제 시를 봐도 우리 동포들처럼 그렇게 감탄을 하거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수상 때 마샤우강 (馬曉康)이 저 대신 수상했어요. 그 당시에 저는 청해 차이다무분지의 사막를 통과하고 있었고 피로 때문에 고공병증도 조금 있었어요. 직접 못가더라도 저에게 상을 주신 한국 분들께 감사하고 그 분들이 이 상에 대한 엄숙함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노동을 상으로 받쳐주신 것에 존경스럽습니다.

기억에는 한국의 故허세욱선생님께서 이런 시를 쓰셨어요. "내가 양발로 /그렇게 그렇게 따뜻한 어머니의 양수를 차 버릴 때부터/ 포대기가 다른 고향이 됐다."

수상은 어떤 일시적인 소속감을 들게 해주었지요. 저는 인간의 따뜻함에 대해 되게 민감해요. 저에게 더 많은 것은 두려움과 외로움이니까요.

 
2. 왜 이런 감정을 느끼시는 거죠? 정신적으로 모든 시인들이 다 공감을 하겠지만. 선생님 편집하는 ‘창허어원충(長河文叢)’과 '산둥스런(山東詩人)'이 잘되어 있지 않나요? 금년에도 대형 잡지 <창허어(長河)>를 창간하셨잖아요. 제 인상에는 당신은 항상 쾌활하고 근면하게 사업하시는 것 같은데,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난 거죠? 제가 알기에는 20세기 80년대 그 화사한 황금시절에 선생님은 계속 생기, 청춘, 꿈의 대표 이미지로 보였는데요.

마치다이: 당신은 모를 수도 있어요. 저는 2013년에 알몸이 된 적이 있었어요. ‘나라’와 ’집’을 완전히 잃었어요. 자신 또 반드시 살아가야 하니까, 정신상에 의지와 '시가'에 의존할 수 있는데 생활상에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환경에서 해야 하니까 책을 편집하던 예전의 직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었어요. 장담하건데, 가장 어려웠을 때도 오래 전해진 ‘퉁소우우치(童叟無欺)'란 상업도덕을 지켜왔어요. 그 뿐만 아니라 그에 더 맞는 인도와 공익정신을 융합하였어요.

이 세상에는 언제나 우리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죠. 우리는 성인군자인양 점잔을 뺄 수도 있지만 정의감과 선심은 태생인 거예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어요. 이렇게 말하는데 전 그래도 늘 박탈당하는 수치감을 느껴져요. 이것은 저의 무기력에서 비롯한 것이고 더욱 사고(四顧)의 무력함에 기원한 것이에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의(道義)가 흔들렸지만 최저선이 다르면 포기해왔어요. 약자가 약자를 잘 대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타락하고 야만적인 행동인지 아니까요. 결코 모든 문자를 사랑하는 분들은 다 약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강세군체(强势群体)가 아닌 것은 당연하죠. 사회의 대다수는 항상 약자들이 차지하는데 서글픈 것은 사람들이 늘 불공평한 것에 대해 참고 침묵하고 있으며, 작은 불쌍한 미끼에 매혹되는 겁니다.

제 경력이 저를 알게 하는데 사람은 죽어도 남아있는 고결한 품성과 정신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에요. 전 확실히 더 열심히 일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할 수 있는 것 따로 없는 노동에 종사해 왔어요. 이것들은 아마 근년에 보이는 ‘창허어원충(長河文叢)’의 도서편집과 <산둥스런(山東詩人)>, <창허어(長河)>잡지의 성과들일 거에요. 그런데 보이는 것은 대부분 외재적인 것밖에 없죠. 아까 얘기한 것은 제 마음에 있는 느낌이에요. 전 기쁘지 않아요. 기쁜 건지 괴로운 건지 아무리 만개의 이유로 증명할 수 있더라도 제 괴로움은 저에 관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요, 제 중년에 파멸적인 일이 한 번 일어난 적이 있는데 재난은 그의 의외적인 결과가 항상 있어요.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요. 저에게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은 대부분 다 알아요. 저는 불행에 대해 계속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이 한평생에 일들을 원상회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이것도 제가 강인하게 살아남은 이유예요.

다른 층면에서 본질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당연히 속죄 의미도 있었어요. 인생 중의 재난이 인내심에 대한 인지를 강화해 종교 감정과 비극정신도 끊임없이 세속적으로 연마해야 이 동양문화가 키운 사람들과 통하게 되었어요. 하여튼, 고난 때문에 지지를 얻게 된 인생은 기대할만 하고 글쓰기는 이제 유일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면, 20세기 80년대의 "생기, 청춘, 꿈"이란 것으로도 대학교시대 나의 우울, 방황, 고민, 외로움 등을 대체할 수 없었지요. 심지어 제 마음속에 후자를 인정하고 전자는 단순히 시대란 단어로 많은 사람의 진실한 정신 상태를 덮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중에 저도 포함되어 있죠. 그 시대에 문학이야기에 관한 것이라면 타이안사범전문학교의 탄하이스원스어(探海石文学社), 교내외 시가대회 개최, <지이펑(季風)>시가신문 창간 포함해, 심지어 나중에 교외 시친구 요엔봉(友岩峰), 탄젠(譚踐)등과 시집 <타이양누(太陽淚)>를 출판한 것 등 다 쟝훙워이(姜紅偉)와의 어느 탐방 중에서 언급했으니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다시 설명하고 싶은 것은 시대추세의 대세도 생명체의 흔적과 영혼의 변화과정을 삼킬 수도 없고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거예요. 저는 그 강력한 거대 서사방식은 계속 잘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허위로 꾸미고 거짓으로 꾸민 역사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니까요. 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타고 난 것 같아요. 저는 이 때문에 위선, 악, 거짓말에 대한 면역력을 얻게 됐고 세상에 대해 영원히 무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3. 선생님께서 확실히 사람들에게 어떤 우려의 심미관을 많이 제공했어요. 많은 양의 평가문장 외에 두 가지 수상 평가에 대해 관심을 가졌어요. 하나는 중국당대시가상(中國當代詩歌獎2013-2014 창작상)에서 드린 수상 평가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16년 '제1회 아시아시인상'에서 드린 수상평가입니다. 이 수상 평가는 선생님의 시의 특징과 기본정신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나요? 또 선생님께서는 이론적인 생각을 잘하시는 시인이시잖아요. 며칠 전, 중국 작가망(中國作家網) ‘금일비평가’칼럼에서 선생님의 컬렉션을 집중 전제하였지요. 최근 몇 년 시 업계에서 강장 유행한 것은 선생님 제의하고 실행한 ‘양심을 위해 글을 쓰자’인데, 선생님의 시학이론과 ‘양심을 위해 글을 쓰자’의 의미를 좀 알려 주세요.

마치다이: 어떤 것은 뼈에 속하고 하늘이 정해주는 숙명이에요. 20세기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부터 ‘우환시인’이라고 불려왔어요. ‘우환’은 제 정신적인 바탕색이고 제 글씨들이 꼭 그 바탕색에 차츰 감염된 거지요. 순수한 진학 시험을 보고 나온 농촌청년으로서 3대 독자의 외로움, 소년(청소년)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외로움과 아픔이 있었지만 대다수 중국 사람들에게 운명을 바꿔주는 수능다리를 지나갈 수 있는 자체가, 30년 전의 중국에서 "시간이 시작한다"는 기쁨과 행복이 있었을 거고요. 하지만 제 열광적인 청춘은 불길함에 끊임없이 자란 추위와 안개였습니다.

나중에 평론가 런푸센(任孚先)이 저에게 "인상을 쓰면서 세상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정말로 한 마디로 저의 시와 문장의 영혼을 잡아주었어요.

초반 몇 년간 저는 많은 선배, 독자와 시인평론가들의 평가문을 수확했고, 또한 류꾸이추안(劉桂傳)이 주도해서 편집한 <마치다이시가정품감상(馬啟代詩歌精品鑑賞)>도 그 당시에 출판했어요. 저는 늘 팔대산인의 글에 있는 새와 물고기와 같이 사람들에게 눈총을 주고 세상의 모든 불합리한 현상에 대해 분개하고 증오했어요. 그런데 이것은 당연히 시에서 구현한 특징이 됐죠. 일상생활 속의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제 성격이 좋다는 얘기를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성격이 좋다는 것은 너그럽고, 포용하고, 다정하다는 최고의 세속적인 평가예요. 수호전(水滸傳)의 고향의 후인으로써 혹시 의협적인 의미도 있었을 거예요. 그 두 가지 수상평가를 말하면 개관사정(蓋棺事定)의 뜻이 있어요. 물론 저는 심사위원들이 제 시를 읽고 분석하고 인정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죠. '제3회 중국 당대 시가상(中國當代詩歌獎2013-2014창작상)'에 대한 평가에는 "시인에게 세계는 거울이고 등대이다. 그들이 비출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마치다이는 거울과 등을 찾았고, 그의 글이 생존의 원형까지 다가갔고, 그의 문자들은 가장 은밀한 사상의 빛을 드러냈다. 이런 빛은 시인의 양심을 고문하여 더더욱 눈부셨다."라는 평이 있어요. "거울", "등", "사상", "양심", "고문" 등은 다 수없이 내 영혼을 건드려 아프게 한 단어들이고 현상들이입니다.

2016년 제1회 아시아시인상의 수상 평가는 더욱 포괄 적었어요. 그들은 마치다이의 "양심을 위해 글을 쓰자"에서 시를 아름답게 실천한 것은 뛰어난 상상력, 통찰력과 표현력으로 한어신시가 다시 진실의 힘을 얻게 했다. 그는 한결같은 정신적인 지킴과 도덕적인 방어로 현대한어에게 새로운 미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표현했지요.

여기서 말한 "상상력, 통찰력과 표현력", "정신적인 지킴과 도덕적인 방어"는 다 예술의 본질과 제 개인의 인격특징을 제시한 의도였지요. 저는 모든 칭찬을 인생에 외로운 여행길에 있는 우호적인 지침으로 생각했어요. 저에게 따뜻함을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도도함에 그 정신 터널은 어둡고 길어요. 세심한 친구들이라면 제가 편집한 출판물에 한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론코너(理论栏目)가 출판물을 받쳐주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에요, 80년대 중판부터 제가 편집한 신문 <지평선(地平線)>, <동악시보(東岳詩報)>, <동악시간(東岳詩刊)>, <산둥스런(山東詩人)>, <창허(長河)> 등에서 중요한 이론문장을 게재했어요. 그 중에 <동악시보(東岳詩報)>와 <산둥스런(山東詩人)>에서 다 이론전문문장을 편집해서 게재했어요. 이것도 제가 시를 쓰면서 평가도 쓰기 때문에 90년대 초반에 벌써 <쌍허엉창룬(桑恒昌论)>과 평론집 <앙칸워이푸스(仰看與俯視)>를 출판했어요. 그 중에 <앙칸위이푸스>는 <제1회 산동성 류우세원 문예평론 쫜주우상(山東省首屆劉勰文藝評論專著獎)>도 받았어요. 하지만 전 자기가 학원에서 말하는 비평가라고 함부로 공언하지 못 합니다. 며칠 전 중국 작가망 ‘금일비평가’ 칼럼에서 며칠 동안 소개를 해줬어요. 저의 <난 번잡지미를 추구한다(我追求繁複之美)>, <타이산샤스워지(泰山下說詩)>, <상허엉창: ‘감정시학’의 인도자(桑恆昌: '情感詩學'的布道者)>와 양엔봉이 저작한 <한 명의 시의가 있는 사상가—마치다이 시가평론인상>이 있었어요. 전 더 언급하고 싶지 않는데 그 중에 양엔봉의 글은 제 평논에 대해 포괄적으로 얘기 했어요. <양심을 위해 글쓰기>, <나의 ‘연기’설(我的"煉氣"說)>, <나의 '시의비평설'(我的'詩意批評說')>과 <신 한시 13문제(新漢詩13題)>는 다 자기의 독특한 시학사고인데 학리 상에는 학술논증을 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사고형의 시인이고 혹은 시인형의 비판가지요. 그 중에 <양심을 위해 글쓰기>는 저의 정신선언인데, 꼭 그 실질정신을 말하자면 ‘양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도덕범위에 속한 것 같은데 사회, 정신,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작가, 시인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기점인 것 같아요!

 
4. "마치다이씨는 20세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업계에 ‘반비주류’의 성장의 길로 왔다. 시 쓰기, 평가, 책 편집, 출판일을 하면서 시에 관련된 활동도 참여하고 인생 흥망성쇠의 기복과 절필의 고통을 겪어 오니 처세를 자제하고 혼자 지내면서 개성 있는 문장을 쓴다."라는 것은 제가 인터넷하고 <시가를 뿌린다(滴撒詩歌)>, 그리고 ‘중국 제3대 시인 특별추천’특집호에서 읽은 문장이에요. 이것은 선생님의 인생과 시학의 길을 다 포괄하고 있는 거죠? 저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인생 흥망성쇠의 기복과 절필의 고통'을 겪어왔으니 말입니다. 혹시 이에 대해 좀 말씀해주실래요?

마치다이: 이 말은 그래도 저의 인생 전반부에 대해 잘 포괄하고 있어요. 하지만 문장의 의미는 다가 아니에요. 사실은 제 인생길에는 고난 가득 있었어요. 전에도 다른 곳에서 언급했지만 문학을 사랑하고 역사를 전공하였고, 중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친 자유사상자인 제가 어느 당파의 ‘부시장’과 구에 속한 ’정협부회장’의 직위를 담당하기도 했고, 상업계를 친구 만난 곳으로 보던 지식인이 얼떨결에 ‘죄수’라는 이름으로 수갑을 찼어요.

저는 이미 다른 면의 인생도 요약해서 말씀 드린 것 같아요: 교사로 본업을 하고 부업으로 문학을 했는데 중간에 관직을 좀 맡다가 상업계에서 기복을 일으켜 도망치게 되었어요. 부처님 말씀에 삼계 밖으로 뛰어나오고 오행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자기에 대한 평가를 <묘지명(墓誌銘)>이란 시에 쓰고 이 문장을 블로그 첫 폐지에다 놓고 ‘개인소개’로 사용했어요. 원문은, "한 중투을폐이(中途而廢)한 교사쟁이/ 아무런 성과도 없는 신사/ 실패해서 맥성으로 들어가는 장사꾼/ 분발한 죄수 사상자/ 태어난 반대파 시야비야/ 모든 것이 다 마지막의 결론이 아니다"

1985년 첫 번째 시를 발표하고 나서 중간에 절필한지 거의 17년 가까이 됐었어요. ‘저자세’, ‘혼자’, ‘개성’이 바로 제가 지키는 정신 원칙들이에요. 30여 년 동안 제 정신원칙은 한 번이라도 변한 적이 없고 제가 쓴 글도 시련에 견딜 수 있었어요. 일부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라 마음에 있는 양심과 개인의 본성이 시켜서 그렇게 했어요. 2009년에 <태산(泰山) ’태산논검’>에 <한시19편(漢詩十九首)> 발표를 계기로 점차 새로운 창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운명이 제게 장난 친 것은 시작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바로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었죠.

2013년에 다시 복귀할 때 이미 628편의 작품과 수십만 글자의 시학필기가 쌓여 있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사람들이 많은 ‘명분’을 주었지요. 예를 들어 여진(呂進)교수님께서 선택 편집하신 <중국 신시기 ‘씬라이즈어’시선(中国新时期“新来者”诗选)> 런위(人與)가 편집한 <썬스(審視)>, <제4대 시인 특집호(第四代詩人專號)>, 방운쭈(方文竹)이 편집한 <시가를 뿌린다(滴撒詩歌)>, <중국 제3대 시인 특별추천특집호>, 싸크(沙克) 편집한 <중국 새로 돌아온 시인(中國新歸來詩人)>등이 있어요. 사실 이런 호칭들은 다 의미가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 분들이 역사를 위해 답해주는 위험한 행동들이 존경할 만한 하다는 것이죠.

그 특별한 경험에 관해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복지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계속 말했듯이 사람에게 손해 보는 것 있으면 하늘에서도 보상을 내려주셔요. 그 일은 그냥 넘어가고 2013년 <지루우쪼우칸(齊魯周刊)>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와요. 하지만 저는 그 정신적인 경력과 연옥의 아픔을 대대로 보여줄 시기가 아직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기다려라, 다시 견뎌내자! 영원한 어두움은 없고 침묵이 가장 좋은 대답이니까 진상이 밝혀질 때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제 시는 모두 ‘어두움’과 ‘아픔’에서 나온 것이니까 앞에서 말한 ‘많은 우려’란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5. "한 범인이 앉아서 죽었다/ 운동장에서, 감옥에서, 오후에, 밤에/ 한바탕 바람이 지나갔다, 누가 손을 흔든 것처럼/ 한 생명에게, 살짝 마침표를 찍었다// 망상의 철창 안에서, 나는 이 과정을 목격했다.// 구급차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것은 기체와 기체가 격렬하게 부딪치는 것이다// 그 자가 햇빛 밑에서 차가워질 때까지/ 봄이, 죽은 자에게 온도를 조금도 내주지 않는다// 햇볕이 내리 쬐고, 밝고, 침묵하고, 깨끗하고/ 끝없는 하늘, 한 장례식을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속에 있는 불꽃을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은 선생님의 <어느 봄날의 오후(一個春天的下午)>의 시인데 읽고 나니 저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나요. 왜냐하면 저는 명운이라는 감독을 알고 있어요. 그 분은 영예, 희비, 행운과 불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지요. 이것은 하느님께서 드린 복지를 즐기며 쓴 작품인가요? 그리고 전 제목이 가장 긴 시도 읽어봤어요. 그 것은 선생님의 <소묘: 한 노랑 갑옷을 입는 그림자를 눈에서 머리로 내쫓고, 머리에서 시로 내쫓고, 시를 떠나지 않다>인데 어떻게 이런 시를 쓰게 되신 건지? 그 배경에 대해 말씀 좀 해주겠어요?

 마치다이와 다이퍼이(代非)
마치다이: 사실은 지금 이 얘기를 하면 시대에 맞지도 않고 시기에 맞지도 않아요. 그래도 얘기해달라고 하니까 살짝 얘기할게요. 이 두 편의 시는 같은 시기에 같은 환경에 같은 심정으로 쓴 시였어요. 이런 시는 200편이나 있어요.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단 일부분이에요. 그 시기에 쓴 시들은 두 가지 정신목표가 있었어요. 하나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존재하는 증언을 시화해주는 거예요. 방금 말한 그 시 두 편은 다 두 번째 목표에 속한 것이고요. <어느 봄날의 오후>는 ‘사망’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소묘: 한 노랑 갑옷을 입는 그림자를 눈에서 머리로 내쫓고, 머리에서 시로 내쫓고, 시를 떠나지 않다>는 현장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과 ‘사망’, 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의 “생”은 모두 극한에서 나타나는 정경이지요.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이해하기 쉬워 일일이 해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들은 모두 매우 “서사”적이고 매우 “진실”되며 매우 “회화”적입니다. 시인은 응당 시종일관 사람에 대한 “존엄”을 수호하고 타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그 어떤 이익과 법률을 초월하는 가장 큰 신념으로 여겨야 해요. “이익”과 “법률”은 의심할 수 있지요. 심지어는 사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엄”과 “생명”은 인류문명은 공동한 인식입니다.

저의 대답이 짧아서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제공한 것은 이 두 시편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의 전반 시 창작에 있어서 원칙과 정신, 그리고 이 시대와 사회를 체현한 것입니다.

6.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저는 본래 가정했던 문제를 뒤집고 이 생각의 실마리를 따라서 묻고 싶네요. 앞에서 당신의 “걱정”에 대해 말했는데, 지금은 “기개”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만약 “걱정”에 미학에 치우친다면 “기개”는 정신에 치우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그들은 당신의 시학으로 통일되어 있지요. 공정력과 공신력이 결핍된 배경아래에서 자신의 시와 이상을 견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당신의 창작을 지금까지 견지해오도록 지탱해왔는지, 또 어떻게 시인의 신분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지요?

마치다이: 제 개인의 관점에 의하면, 지금은 문명이 파열된 시대입니다. 저의 독서와 사고범위는 늘 경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이 알듯 말듯 하지만, 어떤 사물이든지 모두 보편적인 연관을 갖고 있지요. 이 면에 있어서 유물론적 변증법 원리와 맞물립니다. 읽고, 겪고, 쓰고, 생각하고……갑자기 어느 순간 명랑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듯한 느낌이지요. 20세계 마지막 해에 저는 자신의 사상수필집 <수난자의 사고>를 완성하였지요. 그 때 세속의 기준에 따르면 마땅히 “득의양양”해야 할 때이나, 밤에 붓을 휘둘러 열심히 써내려온 문자들은 저의 현실의 생존상태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문자는 마음속의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 원칙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 책에서는 저의 정신과 사상을 완전히 함축시켜 표현해내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보면 재료의 인용과 나아가서 개별적인 관점은 수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나의 중요한 정신적인 수확입니다. 게다가 90년대 초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마치다이시가정품감상>으로부터 개인적으로는 “문단을 등지고 영혼을 향해야”하는 때가 왔다고 여깁니다. 문단 역시 오염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장소이며 심지어 민간 강호보다 못합니다. 황제의 새 옷이 천하에 유행될 때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어린이는 못되지만 재미없는 관중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굿빠이! 기껏 얼핏 들여다보는 것은 그 진실을 말해내는 아이를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마치다이시화>의 후기에서도 언급했습니다.

다행히, 비록 미약하지만, 등불을 든 자들이 모두 죽지는 않았습니다. 백은시대를 마주한 작가들의 선택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저는 시간의 황야에 흩어진 한점 한점의 불씨를 보았습니다. 불굴의 사상가 외에 시인을 놓고 말하면 외국의 시인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겠어요. 중국의 우한, 창휘 등 시가 중에서 나타나는 깊고 넓으며 불굴의 정신과 죽음을 향한 생존은 모두 저에게 있어서 시학과 정신적인 격려입니다.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저는 외로움 속에서 천천히 성장하게 됩니다.

궁바이윈의 '마치다이—역사에 남은 시인'이란 이 평론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중국 시단을 놓고 말하면 마치다이는 문미(门楣)와 같이 돌아가려 해서는 돌아갈 수 없다. 피할 수 없어 직접 들어갔을 때 우리는 올바른 곳에 서서 마음으로 이곳에 속한 번성함을 찬양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우리들을 시초로 데려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이미 존재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마치다이는 그의 '이미 존재하는 곳', 즉 시를 쓰고, 평론을 하며, 책을 편집하고, 잡지를 내며, 시가활동에 참여하면서 '양심을 위한 창작'을 제창하고 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시를 쓰는 장애를 넘어 서서 자신의 마음속의 관점과 현실의 주제로 시가문체를 구상하고 영혼과 양심으로 시를 쓰면서 자신을 빻아 부시어서 다시 비벼 넣고 있다. 이리하여 그의 시가는 거대한 감당력을 갖고 있고, 시가에서 내뿜고 표현되는 에너지와 깊은 내용, 골격과 타고난 지혜, 현실과 진상이 훤하고 심오하여 시를 씀에 있어 천하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의 시는 세속에서의 비환, 인생의 막막함, 심령의 고독, 존재의 허무, 현실의 맹랑함, 인성의 복잡함에 대해서 모두 깊이 있는 지적과 채찍질을 하였다. 예를 들면, '나의 강강에게', '양의 독백', '의문', '지렁이는 지하시인이다', '스스로를 잡다', '그럭저럭 되는 데로 살아가다' 등이다. 그는 태연하게 그의 시가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그 지혜와 통찰력은 선각자와 같다. 시가 풍격상 마치다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반복 미학을 갖추고 있고 예사롭지 않은 통찰력과 상상력은 그의 시가로 하여금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이하고 특출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지평선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자루다/ 석양은 그 위에 앉아 천천히 자살하고 있다.(지평선)'를 보면, 이런 시구가 나타내는 탄성과 시의 성격은 그가 역사에 남을 시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죄송하지만, 이런 증언을 제공하는 것이 저와 저의 시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키를 제공하는 것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 지난해 11월 베이징에서 마치다이와 쩡민(郑敏) 시인이 함께
7. 문제에 대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당신은 산동 산평 사람인데, <수호>에서 묘사한 양산 대장부들은 바로 그 고장 출신이지요. 만약 당신을 양산 108명 대장군에 속한다고 했을 때 당신은 어느 영웅이 되고 싶나요? 당신의 저작이 많은데 아직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으니 써내려가지 못해서 필을 멈춰야 하는 어려운 경우가 생기지 않는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마치다이: 허허, 수많은 버전의, 시단의 108위 시인 순위차트를 보았습니다. 시인과 영웅을 등가 교환하는 것은 아주 재밌는 행위예술입니다. “시인”과 “영웅”에 대한 이해는 당연히 저의 표준이 있습니다. 현행에 존재하는 것에 “아니”라고 말하는 외에 “시인”과 “영웅”은 같은 범주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도 영웅으로 여겨질 수 있고 영웅도 시인으로 여겨질 수 있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 할수록 어려워집니다. 흥미가 있다면 이 각도로 중국문화전통을 해석하고 나아가서 박사논문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수호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 자연히 영웅에 대한 숭배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문화에서 영웅숭배 정서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저의 고향에는 유명한 량산백 유적 동평호가 있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안개 낀 수면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양산 영웅 외에 '수당연의'에서의 정요금도 이 고장 출신인데 부자 장원이 탄생한 고장이지요. 현명한 군주가 기탁하고, 청렴한 관리가 숭배하는 것과 같이 영웅의 정서 즉 '협객정서'는 모두 중국의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협객문화”는 유가가 제시한 나라통치방법의 민간에서의 보충인데 그는 중국사회 몇 천 년의 통일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류문명의 진척가운데서 부적응성과 부패하고 낙후한 점은 일찍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느 영웅과 우위를 다투고 싶지 않고 순위를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시인은 경계로 따질 수 있지만 순위로 우위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1988년 시집 <태양의 눈물>(3인 시집)이 출판되어서부터 저는 연이어 자체로 두께가 다른 22권의 문집을 출판했는데 시집, 산문집, 사상수필기, 시화, 평론, 연구저작, 서문집이 있습니다. 책임 집필한 도서를 일일이 나열하라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현재 '창허원충(长河文丛)'과 <산둥스런(山东诗人)>, <창허어(长河)>의 편집 업무는 아주 바쁩니다. 손 안에는 아직 출판하지 않은 저작이 몇 권 있습니다. 써내려가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상황은 아주 정상입니다. 서경아 선생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의자 몇 개 적게 만들었다고 목수가 아닌가? 우리들은 문자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더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를 많이 쓰는 시인들이 아주 무섭다고 합니다. 몇 달동안 한 수의 시를 못써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섭습니다. 시인은 모두 개인의 존재방식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모두 대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박수소리는 종래로 대가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진정한 시인은 영화부귀를 누리는 자들이 극히 드물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시간밖에 없습니다. 시간 앞에서는 승리의 개념이 없지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전에 풍채가 넘치는 시들을 쓴 적이 있었으나 진실로 내적으로 습작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놓고 말하면 명제작문은 공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저축하고 쌓아올려 풍부한 정신적인 자원이 없이는 우물의 입구를 파낼 수가 없습니다. 써내려 갈 수 없을 때에는 절대로 억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글쓰기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고 두뇌는 아직도 사고하고 있으며 두 눈은 아직도 관찰하고 있습니다. 쓸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빛을 발할 것을 망칠까봐서입니다. 책을 쓰고, 잡지를 편집하고, 여행하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몇 명의 친한 친구들과 허풍을 떠는 등등은 모두 저로 놓고 말하면 글쓰기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저는 스트롬 트럼프 이런 유형의 글을 금처럼 여기는 시인을 따라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의 모어가 갖고 있는 시의 성격은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글쓰기에 명확한 계획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스스로 계획해 놓은 것들이 몇 가지 순조롭게 완성된 것이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올해에 저는 금방 50세 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성이 마씨이고 말띠인 저는 여전히 달리고 있습니다. 살기위해, 존엄을 위해, 존엄이 있게 살거나 혹은 살아 있는 것을 존엄이 있게 하기 위해, 저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無)”에서 “유(有)”를 찾으렵니다.

질문에 감사를 드립니다.

▲ 마치다이와  쉬이징야(徐敬亚)와 함께

마치다이 프로필
“양심을 위해 글을 쓰자!”의 창도자, 남, 1966년 7월생, 산동 동평 사람, 자유기고인, <창허워언충(长河文丛)>, <산둥스런(山东诗人)>, <창허어(长河)>잡지 책임편집, 제남시에 거주.

1985년 11월부터 저작을 발표하여 <동악시보(东岳诗报)>등 민간잡지를 창간했으며 <태양의 눈물>(3인), <잡색황혼>, <우러러 봄과 깔봄>, <마음의 둥지>, <불의 목욕>, <어둠이 백주와 같다>, <허이바이뺀(黑白辨)>등 시문집 22부를 출판하였다.

각종 선집 200여 부가 있고 산동제1차유협문예평론전문저서상, 제3차당대시가창작상, '2016제1회 아시아시인상(한국)' 등이 <산동문학통사>에 편집되었다.

그의 시는 개성이 선명하고 경지가 넓고, 언어가 곱씹기 좋으며, 심도 있는 사상을 은유하고 있으며, 대범하고, 강인하고, 진실하고 분방한 아름다움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 그의 시작품이 나타내는 정신적인 풍격, 종교정서와 미학개성은 점점 더 시단에서의 주목을 끌었다. <어둠이 백주와 같다>는 그의 연옥작품이다. 628수 시작품에서 세심하게 선별해 낸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시 가운데는 양심이 멸하지 않는 시의 혼이 타오르고 있고 생명의 존엄에 대한 수호와 진리에 대한 갈망을 나타냈는데 정신적인 긴 노래이자 구하기 쉽지 않은 정신적인 시의 의지이다. <특구문학>(2015.2)과 <명작감상>(2015.7중순 간행물)은 선후로 그의 작품에 대한 평론전문집을 발표하였다.

마치다이는 독자적인 품격을 지닌 시가를 대량으로 써냈을 뿐 만 아니라 숙고를 충분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시학적인 수필을 대량으로 써냈다. 계대의 처지와 시가와 시학적인 수필을 통해서 나는 계대가 인격과 시가는 서로 식별하고 서로 빛나게 하는 시인이다.
-난오우(南鸥)

마치다이의 작품은 견고함과 풍부함이 드러나며 깊이 있고 순수하다. 그에게 있어 시가라는 이 단어는 오색찬란하며 여러 가지 맛이 버무려진 기분이 들고, 차가움과 따스함의 되울림이 있으며, 슬픔과 기쁨이 섞인 깊이가 있고, 견고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반짝이면서 생명의 좌표를 나타내면서 현대인이 모어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쫘앙워이제(庄伟杰)

마치다이의 시를 읽으면 생명의 감각과정을 진실로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념과 지혜를 체험하는 극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감각들과 감성적인 풍경은 문화와 이성적인 엑스레이로써 아득히 먼 심도 있는 세계를 비추어 냈다. 그는 일종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듯, 문화와 생명의 균열을 봉합하여 분리할 수 없는 전체로 만들었다.
-쑨지이린(孙基林)

시인이 예술탐험의 길에서 그의 전기는 광명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것이며 그의 후기는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둠의 쥐죽은 듯한 고요속에서 만이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다. 시인들은 현실에서는 속임수를 당하지만 뮤즈여신의 보살핌으로 어둠속에서 다시 태어나며 사상의 경지는 다시 승화되곤 한다.
-챈쯔푸(钱志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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