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찬 재한동포문인협회 청년문학회 회장/청년공동체 세움 대표/ 시인
[서울=동북아신문]아래 글은 한국 연세대학교 재학중인 박동찬씨가 지난해 말 (사)동북아평화연대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많은 참조 바랍니다. 편집자  

안녕하세요. 20년 가까이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다가 작년부터 한국에 정착하여 중국동포로 살고 있는 박동찬입니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있고 동북아 곳곳으로 진출한 조선족 대학생, 청년들의 네트워킹을 추진하는 청년공동체 세움에서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저희를 정의하는 많은 고유 명사가 있습니다. 조선족, 재중동포, 중국교포, 중국동포, 한국계 중국인, 당사자들마저도 혼란스럽습니다. 저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고, 더불어 잘사는 동북아를 그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국적은 있어도 조국은 없다

언제부턴가 조국에 대해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교과서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 해결하고자 나섰던 것 같습니다. 사전을 펼쳤습니다. 해석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가 조국이라고 합니다.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제 본관은 밀양 박씨이고 조상은 경상북도 구미, 의성 일대에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박우동은 3.1운동 후 1920년에 핍박 속에 거처를 옮기시는데 그곳이 바로 저의 태생지인 만주,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입니다. 고조할아버지에 관해서는 있다가 조금 더 이야기 드리려고 합니다. 고조할아버지 때에 이주했으니 계산해보면 제가 5세입니다. 4대, 5대가 만주에서 백년을 생활했으니 중국도 조상이 살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에게 조상 대대로 살던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해석은 이렇습니다. 자기의 국적이 속하여 있는 나라. 저희 할머니는 일찍이 한국으로 귀화하셨습니다. 외할머니의 경우도 만주로 가시기 전에 여기에 호적을 올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에 호적 기록을 통해 국적을 쉽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전의 해석대로라면 할머니는 조국을 갈아타셨다 할 수 있고, 외할머니는 조국도 두 곳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저를 설득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이나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서 다른 나라에 합쳐졌을 때에 그 본디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저희 조선족이 어쩌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들뜬 마음에 이곳을 조국이라 불렀는데 화답이 없었습니다.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재외동포법>이 제정될 때 적용대상에 조선족이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통해 정정되었지만 중국동포들에게는 정말 가슴을 찌른 비수였습니다.

조국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조국이 어딘가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국적은 있어도 조국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 끄적였던 저의 졸작입니다. 짤막한 시인데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 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슬픈 족속

슬픈 일이 있다
조국을 등진 채 오랑캐령을 넘어간 일이다
더 슬픈 일이 있다
돌아가고 싶으나 그러지 못했던 조국을 가진 일이다
가장 슬픈 일이 있다
여기에 섰으나 내 조국이라 할 수 없는 일이다.


접목의 아픔을 참고 남의 뿌리에서

사과배라는 과일을 아십니까. 사과 쉼표 배가 아니라 이어진 사과배입니다. 조선족이 창조해낸 과일입니다. 중국 연변자치주에서 사과나무 가지와 배나무 가지를 접목시켜 사과와 배의 맛이 혼합된 새로운 품종을 재배했던 것입니다. 그럼 사과배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닙니까. 저는 오히려 사과라고 해도 맞고 배라고 해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의 정체성은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논쟁의 대상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저도 한동안 이것을 수없이 자문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두 개의 조국을 가졌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하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늘 소수자라는 자비에서 탈출하지 못할 때도 허다했습니다.

사과배의 본질을 추궁하는 모습은 마치 조선족이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따지는 것과 흡사합니다. 사과면 어떻고 배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민족을 7000만 겨레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세계상 유일한 분단국가를 갖고 사는데, 이미 5천만과 2천만으로 나누어졌다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리고 저희와 같이 해외에 산재한 조선족, 고려인, 재일교포 등등 700만 명에 달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대신 아직도 서로를 나누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길인지 자숙해봅니다. 이제는 각각의 정체성을 떠나 한민족(조선민족)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한번 가져볼 것을 제의합니다. 미래지향적으로 세계의 한민족, 한 민족(하나된 민족)으로 거듭나자는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심양에는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인 서탑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흥미로운 광경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평양관’ 식당 앞에서 북한 복무원(종업원)들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손님을 맞는다면, 길 건너편에는 ‘청와대’ 한정식 식당에서 트로트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한국 연예인 사진을 내세운 치킨집이 있는가 하면, 맞은편에는 목단관, 모란관 같은 북한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변 조선족이 창업한 양꼬치 식당 ‘백옥’, 한국의 ‘롯데리아’, 또 서탑거리 안쪽으로는 조선족 소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위치했습니다. 저는 이 작은 거리에 우리 통일의 미래상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생각을 가져봤습니다. 하나의 공간에서 ‘조선족’, ‘한국인’, ‘조선인’을 따지지 않고 공존하고 상생하는 것이 곧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 아니겠습니까. 여기는 경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재한중국동포 70만 시대입니다. 지하철에 다니시다 보면 저처럼 살짝 이상한 억양을 가지고 대화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아직도 조선족에 대한 왜곡보도가 허다하고, 편견과 차별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감정의 골은 아직 너무 깊습니다. 오늘 행사를 마련한 동북아평화연대와 동포모니터링단 ‘강강숲래’는 이러한 보도를 정정하고 이미지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 중인데 저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응원 메시지도 받고, 함께 어울리면서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나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오해를 풀 수 있는 지름길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정서상 다르다는 이유로 조선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담이 점점 무너지고, 경계는 모호해지는데 울타리를 다시 쌓아올려서야 되겠습니까. ‘구동존이’라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 공통분모를 살리고 차이는 먼저 보류하자는 말입니다. 굳이 우리의 다름을 부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계란 결국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가능성은 경계의 또 다른 이름

경계란 곳이 때로는 위태롭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남북경제협력이 ‘경계의 땅’ 개성에서 구체화되고, 북한의 개방과 변화를 유도하는 신의주와 나선특별시가 북중 접경지역에 조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조선족은 평화에 대한 열망이 각별한 공동체입니다. 조선족이 왜 생겨났고 왜 만주로 이주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저희 또한 전쟁의 산물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삶의 터전이 빼앗겼기 때문이고, 그런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갔던 것이 아닙니까. 저의 고조할아버지 박우동도 일제에 맞서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1920년에 경상북도에서 만주로 이주했고, 불의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연변에는 ‘산산 진달래, 촌촌 열사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쟁에서의 희생과 피해가 막대합니다. 저는 전쟁의 아픔을 직간접적으로 맛보았던 우리가, 평화를 외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산가족이 남북 사이에만 있을 줄 아셨겠지만 중국동포 중에서도 그 수가 상당합니다. 올해 초에 KBS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녹화에 참여했습니다. 30년 전에 저희 외할아버지가 한국에 있는 혈육을 찾아주셨으면 하는 내용으로 제작진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손주인 제가 그 자리에서 육필 편지를 전달받아 대독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왔지만 아버지의 형제들은 다 한국에 남아 계셨던 상황입니다. 나중에 찾으려했지만 연락도 다 끊기고, 아시다시피 한중 수교 전이라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애타는 마음은 외할아버지 편지에 그대로 묻어있었는데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다행히도 1984년 제작진의 도움으로 외할아버지는 사촌누나를 찾게 되었고, 수교 후에는 친척방문 비자로 입국하셔서 극적인 상봉을 이루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디아스포라여서 겪었던 이별 외의 이별도 있습니다. 조선족 사회에 한때 거세게 불었던 출국붐을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저희 부모세대가 좀 잘 살아보자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을 남겨두고 한국으로 떠나고, 일본으로 떠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3년, 어머니와 10년, 그리고 할머니와 20년 떨어져 살았습니다. 지금은 저희 세대가 어느 정도 자랐기에 우스개로 얘기할 수 있는데 저희가 학교 다닐 때 글짓기를 하면 전부 이런 내용들이었고 백일장에서의 수상작을 보면 거의 다 이런 가슴 아픈 내용들로 도배됐었습니다. 우리의 5년, 10년이 이산가족들의 7, 80년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아픔도 아파봤던 사람이 이해하고 체휼할 수 있듯이 통일의 당위성을 아는 세대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귀한 자리를 빌어 청년공동체 세움에 대해서도 잠깐 소개드릴까 합니다. 세움은 조선족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우리 세대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의제들의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 ‘청년’과 ‘조선족’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우리의 독특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동시에 추진하고 온라인상에서는 자체 채널을 통해 팟캐스트, 청춘대담, 이슈토론회와 같은 코너를 선보입니다. 현재 3000명이 정기구독 중이고 월평균 12만 명이 다녀가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행사들은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토크콘서트, 글쓰기 특강, 전통문화축제, 캠페인, 멘토링, 워크숍, 역사탐방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미래를 묻거든 청년이라, 청년이 있는 세움이라 답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백 년 전, 만주에서 구슬프게 울려 퍼졌던 아리랑은 오늘 평화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조선족 공동체는 백년의 한과 서러움을 딛고 평화를 이루는 소중한 재료로 준비됐습니다. 척박한 만주벌판을 비옥한 삶의 터전으로 개간했듯이 이제는 동북아가 더불어 잘사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 사회에 작은 바람 하나를 전하려고 합니다. 중국동포들도 어쩌면 새터민과 마찬가지로 이남에 먼저 찾아온 통일입니다. 더 크고, 더 성숙된 통일의 그날을 위해서 우리 먼저 서로 포용하고, 서로 이해하고, 나아가 하나가 됩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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