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월엔 악처가 없다

▲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중국동포타운신문 주간
[서울=동북아신문]전통사회 여자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서만 존재했다.『나는 지방대 시간강사이다』『대리사회』저자 김민섭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전통사회 여자는 자녀의 대리인이었고 남편의 대리인 역할만 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의 여자는 이 두 대리 역할을 잘하면 현모양처로 평가받고 그렇지 않으면 악처로 평가된다. 악처가 되기 싫으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현모양처가 되기에 노력해야 한다. 현모란 자녀를 교양 있는 인재로 잘 키우는 것이고 양처는 남편의 내조를 잘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내조를 잘하면 양처이고 내조를 잘 못하면 악처가 되는 것이다.

내조란 개념에는 여러 가지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내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무조건 남편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조건이라 함은 가령 남편이 남편 노릇을 못하더라도 또 가령 남편의 판단이 그르고 성사되지 못할 일을 추진하더라도 거스르지 말고 한 푼의 토도 달지 말고 조건 없이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기는 부인은 모두 악처로 평가받는다.

서양철학의 원조인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는 욕설은 기본이고 쩍하면 남편을 손찌검까지 해서 악처로 전해지고 있다. 크산티페가 처음부터 악처였을까?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결혼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 왜 그녀가 악처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에 대해선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남자는 결함이 없는 완벽한 존재인데 여자가 문제라는 것이 전통사회의 남존여비 기본관념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제자가 문전을 차고 넘쳐 수입이 짭짤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생활비 명목으로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 많은 돈을 모두 유흥에 탕진했다. 그것도 모자라 동성애에 빠져 아내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다. 이런 남편을 둔 아내가 악처로 변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고기잡이 달인이었던 강태공은 세상도 들어 올려 유명해졌다. 강태공은 젊어서 책벌레였다. 가족이 입에 풀칠 어려워도 전혀 개의치 않고 책만 붙잡고 있었다. 어느 하루 아내가 곡식을 말리려고 뜨락에 널어놓고 밭일 나갔다. 그 시대는 일기예보도 신통치 않아 설마하면서 널어놓았고 가령 비가 내리면 남편이 집에 있으니 당연히 거둬들이겠거니 하고 시름 놓았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곡식은 한 알도 남지 않고 몽땅 비에 쓸려갔다. 곡식이 없으니 뭘 먹고 살아간단 말인가? 이정도로 맹하기 그지없는 남편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강태공의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것이다.

훗날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이 크게 출세하자 집 나갔던 아내가 찾아왔다. 강태공은 대야에 담은 물을 바닥에 엎질러 놓고 아내더러 주워 담으라 했다. 아내가 이미 엎지른 물을 어떻게 주워 담느냐고 물었더니 강태공은 ‘너의 처지가 이 물과 같으니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했다.‘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은 이 고사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공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허생은 젊어서 아내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딱 10년 만 참고 기다리면 내가 크게 출세하여 호광 시켜 줄 것이니라.’ 그러니까 ‘나는 10년 동안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책만 읽겠으니 네가 고생을 다 하게나.’는 약속이었다. 아내가 약속은 했지만 7년을 버티고 도무지 더 지탱할 수가 없어 그만 집을 나가고 말았다. 후에 허생은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출세하였고 그의 아내는 집 나간 것이 죄가 되어 악처로 이름을 남겼다.

강태공의 아내와 허생의 아내는 제 발로 집 나간 사례이나 역사적으로 아내를 쫓아낸 유명인사도 꽤 많다. 따지고 보면 쫓아낼 사유도 아닌 것을 갖고 아내를 쫓아냈으니 어이없는 일로 보이지만 그 시대상황에서는 쫓겨난 아내들을 모두 악처로 평가했다.

공자는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늘 목이 좋지 않았다. 공자의 아내가 남편을 걱정하여 배즙을 짜서 다려 대접했다. 그런데 공자는 배즙이 제대로 덥혀지지 않았단 이유로 아내를 쫓아냈다. 공자는 이와 같이 별거 아닌 일로 아내를 세 번이나 쫓아냈다. 이유가 아닌 이유로 아내를 세 번이나 쫓아냈으면서도 불구하고 공자는 인류역사 이래 최고의 도덕권좌에 올라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지만 이것 갖고 후세 사람들이 공자를 폄하하지 않았고 그의 성인의 지위는 굳건했다.

오기(吳起)가 아내를 쫓아낸 이유는 더욱 가관이다.
오기는 전국시대 초기 위(衛)나라 사람으로 대략 기원전 440년에 태어나 기원전 38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노(魯)·위(魏)·초(楚)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공을 세우고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오기는 아내에게 실로 허리띠를 짜게 했는데 폭이 치수보다 좁았다. 오기는 그것을 고치게 했다. 그의 아내가 말했다.
“알았어요.”
허리띠가 완성되어 다시 재보니 여전히 치수에 맞지 않았다. 오기는 화를 냈다. 그의 아내가 대답했다.
“저는 시작할 때 날줄(經)을 매어놓았기 때문에 고칠 수 없어요.”
오기는 그녀를 내쫓았다. 그의 아내는 오라비에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오기는 법을 실행하는 자이다. 법을 실행하는 것은 만승의 나라를 위해 공을 이루려는 것이다., 반드시 먼저 처첩에게 실천한 뒤에 국가에 실행하는 것이다. 너는 집으로 들어가기를 기대하지 마라.”
오기의 처의 동생 또한 위나라 왕에게 중용했으므로 위나라 왕의 권세로 오기에게 다시 부탁했다. 오기는 따르지 않고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들어갔다.
일설에는 이렇게 돼 있다.
오기는 그의 아내에게 허리띠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위해 허리띠를 만들되 이것과 똑 같이 하시오.”
오기의 아내가 허리띠가 완성되자 가져왔는데 그 허리띠는 매우 훌륭했다. 오기가 말했다.
“당신에게 허리띠를 만들도록 하면서 이것과 똑같게 하라고 했소. 그런데 지금 것이 더욱 훌륭하니 어찌 된 일이오?”
그의 아내가 말했다.
“사용한 자료는 똑같은 것이지만 공을 더했더니 훌륭하게 됐습니다.”
오기가 말했다.
“내가 말한 것과 다르오.”
그러고는 아내를 친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서 딸을 받아주기를 요청했지만 오기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집안은 빈말을 못합니다.”
진짜 트집이라도 이런 트집이 없다. 그러나 억울한 아내는 억울한 여자가 아니라 악처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전통사회 악처들을 요즘 세월 기준으로 말하면 악처가 아니다. 물론 전통사회에서도 남편을 음해한다던가, 시댁식구들을 못 살게 군다든가 하는 부녀들이 꽤 많았는데 이런 부류의 여자를 악처라 부르지 않고 독부(毒婦)라 지칭하였던 것이다.

독부라 하면 대개 미녀가 떠오르고 미녀는 마음이 독한 여자로 취급되었다.
중국어 속담에 “만 가지 악 중에서 음란함이 으뜸이고, 가장 독한 것은 여자의 마음이다.(萬惡淫爲首, 最毒婦女心)”라는 말이 있다.
옛날 중국인은 일반 부녀보다 미녀는 바람기가 가득하고 음란하고 또 독하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수호지』에 등장하는 반금련, 염파석, 반교운, 가씨 등 미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호지』에서 반금련의 자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른봄 버들잎 같은 눈썹에는 언제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는 듯 한과 시름을 품고 있고, 춘삼월 복사꽃 같은 얼굴에는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었다.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렸고, 도톰한 입은 향기를 뿜어 벌과 나비가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기타 미녀들의 자태도 거의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을 모두 음란한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실제역사사실이든 가공이든 하여튼 모든 남자들이 미녀를 품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미녀에게 이상할리만치 편견을 갖고 있고 또 조건반사적으로 미녀를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썹이 이른 봄 버들잎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그녀가 “늘 운우의 정이 그리워 한과 시름을 품고 있다.”고 믿게 되고, “얼굴이 복사꽃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반금련은 자색이 뛰어난데다가 요염한 기운이 넘쳐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서문경은 반금련을 처음 보자마자 그만 몸이 흐믈해졌고 그녀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서문경이 퇴자를 맞을까봐 두려워 머뭇거리자 반금련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주동이 되어 “공연히 소란스럽게 하실 필요가 없어요, 정말로 저를 꾀어보려고 하세요?”라고 말하자 두 사람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한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염파석과 장문원, 반교운과 배여해, 가씨와 이고가 간통했는데 모두 남자들이 여자에게 혼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외에『수호지』에 등장하는 미녀인 이사사와 백수영은 작부와 기생이어서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는 여자였다.

다음 미녀는 대개 독부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수호지』에서 반금련은 제 손으로 무대랑을 독살하였고, 반교운은 애매하게 석수를 모함하였다. 염파석은 송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안달하였고, 백수영은 뇌형을 희롱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머니까지 구타하였다. 가씨는 관청에 출두하여 남편 노준의를 무고하고 증인으로 나서 자칫하면 노준의는 죽음을 뻔 했다.
한나라 초기 여후(呂後)는 남편인 유방이 죽자 애첩이었던 척부인을 산채로 돼지우리에 처넣었다. 개국공신이었던 한신도 그녀의 꾀임에 빠져 죽었다.

무측천은 더욱 악독했다. “호랑이가 아무리 독해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딸을 제 손으로 죽이고, 태자 이현(李賢)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젊어서는 물론이고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남자들을 끌어들여 난륜을 하는 등 음란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중국인은 미녀 하면 음란함이 떠오르고 독부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민간에서는 미녀를 며느리로 맞으면 집안에 화를 불러온다고 믿고 있어 설사 당사자들이 마음에 들어 해도 부모나 형제들의 관문을 넘지 못해 혼사가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녀들이 음란하고 독하고 일등신붓감으로 외면당한 데는 그녀들의 탓보다 남자들의 탓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사내다운 호한들은 대개 여자를 가까이 하면 영웅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사내가 아니라고 여자를 멀리했다. 그리하여 미녀들은 할 수 없이 백면서생이거나 병신 같은 남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백면서생이거나 병신 같은 남자들은 사내다운 면이 없어 그녀들의 생리적 욕구를 포함해 기타 사내에 대한 여러 가지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호한들이 그녀들을 멀리하므로 할 수 없이 반금련과 같은 미녀는 건달인 서문경(전통관념으로 보면 건달이지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여러모로 잘나가는 인간이었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문경도 무대랑이 간통현장에 들이닥쳤을 때 놀란 나머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반금련은 이렇게 원망한다. “평소에는 권술과 봉술을 잘한다고 떠벌리더니 급해지니까 종이호랑이처럼 아무 쓸모도 없네. 저렇게 놀라는 꼴이란!”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악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녀들이 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여 음란하고 독한 마음을 갖도록 만든 장본인은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남분여장하고 무대에 올라 앵앵거리는 여인의 목소리로 관객을 귀신 홀리듯 인기 높았던 전통희극을 보면 중국전통사회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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