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비수기의 관광지처럼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국강원도의 어느 작은 도시 D. 사방 몇 키로 미터 내에 거리는 끝나고 남북으로 계곡을 이루며 뻗어 오른 산발을 따라 보라 빛 엉겅퀴와 자주색 자운영 같은 야생화가 피어 눈길을 끌고 동서로는 푸른 바다 가 에메랄드빛의 거대한 공처럼 날아올랐다.  요즘 들어 거리의 여름은 풀이 죽어 저녁이 되면 무언가와 교신하듯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수은등의 불빛들에 쫓기는 것 같았다. 그 여름은 새벽으로부터 들려오는 한탄 같고, 지난 세월을 향해 울리는 경계의 종소리 같고 거울에 멍든 얼굴을 비춰보는 누군가의 붉어진 눈빛 같다.  부두에서 배 고동이 울려온다. 차이니스 레스토랑과 호텔 레스토랑, 자전거가게, 간이우체국, 은행, 서점, 공원 겸 어린이 놀이터, 공중전화박스,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는 담배 자판기들, 그 다음 내 발길이 겨우 멎은 곳은 부두였다. 비린 바다바람이 불어왔다.  꼭 한해전의 여름, 이 부두에로 처음 왔다가 오물을 들이킨 듯 속이 울렁울렁 해나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많이 체질화된 셈이다. 서로 이웃한 어선들이 파도에 출렁출렁 몸체를 들추고 상공으론 갈매기들이 분주히 떠돌며 울음을 쪼갠다. 부두에 촘촘히 앉은 어물가게들에서는 장군들이 가끔씩 지나가는 길손들을 부르고 나는 회 쳐 먹을 어류들이 시야로 날아들면서 목젖이 춤춘다. 돔, 가오리 우럭보다는 오징어들에 눈길이 끌린다. 꼴뚜기, 오징어, 화살촉오징어 그리고 7키로나 나간다는 왕 발 오징어들로 풍성하다. 살아 이글거리는 날 오징어 고기를 맛 본적 없다가 한해 전, 한국의 여기 D시로 와서야 회라는 것에 맛을 들이게 되였다. 등갓 푸른 물고기나 배 바닥이 눈처럼 흰 가오리보다는 마귀를 연상시키는 오징어 회를 자주 안주상에 올린다.볼꼴 사납고 역겹던 오징어, 내 날카로운 이발에 씹히면서도 그 다리들을 이 새로 내밀어 내 살에 찰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내 얼굴에 먹물을 뿜어댔던 오징어를 회치고 굽고 삶아 저녁끼니가 즐거워 갈 무렵이던가. 내 평온해진 삶의 수면에 “먹물”이 뿜길 줄이야.  동서였다. 2주쯤 전에 고향에서 아내가 한밤중에 전화를 한 것 이였다. 처제의 남편이 한국 비자를 넣었으니 책임져주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큰 체통에 남산같이 내민 배, 번대 머리에 얼굴은 호박 같고 밤을 팼던가 피 발 선 눈동자엔 지나친 어떤 욕망이 황황 내뿜는다. 나이는 마흔아 홉, 탄 갱이 싫어서 무직업자가 된지 오래다.  고향은 석탄의 도시였다. 거리의 주변의 산들은 빠끔빠끔 갱 구가 뚫려서 40년대 일본제국주의 헬기가 갱에 떨어졌다는 전설도 있다. 온 시의 공장, 학교, 가게는 물론 가가호호마다 석탄, 콜타르를 때고 사는 때문에 저녁이면 온 상공이 시커먼 매연으로 뒤덮인다. 하얀 마스크를 끼면 대뜸 시커멓게 된다. 병원에는 폐병환자들로 넘친다.  나는 부추 밭의 파처럼 한족들 속에 끼여 살던, 자기 말과 글을 모르고 살던 그녀를 왜 찾아갔던가를 자문 할 적마다 그럴 수밖에 없게 했던 중국의 10년 대 동란, “문화대혁명”- 그 아비규환 때문에 몸을 떨군 한다. 내 이름은 박문성, 순 토종 조선족, 나이는 27세. 소설 한편 쓰고 있음. 우연히 집의 큰따님이 소설(한족소설)독서광이란 소식이 찾아온 계기가 됨. 꼭 한민족 총각에게로 혼인 할 내심 의도가 섰겠고…그런 고백이 뜻밖으로 큰따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집안의 허락을 받았을 줄이야… 그렇게 맏사위로 들어 서의 첫 발견이 아래로 한 둬 세살 차이의 말 같은 처제 넷이나 시집비위에 설치고 있었다. 나는 결혼한 이듬해에 완전히 한족처럼 돼버린 둘째 동서를 만나게 되였다.  ※ 아내의 전화가 온 것은 한국시간으로 밤 9시였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불쾌해나는 기분에 잡혀 핸드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동…동서를 돈 벌도록 책임져주면 안될까요?”나는 대뜸 화가 동해하였다. “정신 있소? 그 동서가 한국에 오면 한글에 까막눈이고 그러면 지하철이나 회사를 찾을 수 없는 건 말고라도 귀머거리가 될 터인데!”“… …”“게다가 원체 술, 도박, 음욕에 이골 튼 놈 아니오. 내 곁에 두고 먹고 자고 쏘다닐 그런 꼴을 어찌 참고 본 단말이오.” 전화에서 아내는 “내…내 여동생이…병든 내 여동생이 불쌍해…”하고 울음소릴 들려주곤 “뚜뚜”통화가 끊긴 것이다.  나는 심장이 뛰고 눈빛이 충혈 져있었다. 웃옷을 벗은 채로 좁은 집안에 버티고 선 채 깜깜한 천장을 쏘아본다. 지난 세월의 음력설께나 장인장모의 생일마다 관청에 잡아놓은 촌닭의 꼴로 기 눌리기만 했던 일들이 성난 파도로 되여 내 가슴을 후려쳐 온다. 처제들과 동서들, 그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옷매무시나 음식 어느 한곳도 조선족임을 알아 볼 수 없게 저희들끼리 집안을 채워 웃고 떠들고 즐겁던 “한족집안”, 여위고 우울한 내 모습, 일몰의 잔광이 소리 없이 외로이 번지는 소설책 갈피마다에 내려앉고 이따금 고독감 때문에 괴로움에 가까운 한숨이 흘러나오던 그 어둠만 켜켜이 쌓인 구석구석을… 꼭 28년 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뒤늦게 야 정책 락 실로 현 성의 담배공장공인이 되여 사랑에 담을 키운 것이다. 기차표 한 장으로 바람처럼 불려간 곳, 난생 처음 떠나본 신비스런 행선지였다. 흑룡강성리수진- 거기에 엄마의 소학교적 동창생 몇이 살고있다고 그랬다. 겨울이 되여 강이 꽁꽁 얼면 병약한 엄마는 입쌀을 지고 그곳으로 팔러 가군 했는데 엄마로부터 그 곳에 나이 25살이 되도록 소설책귀신이 되여 시집 갈 궁리를 않는다는 “한족처녀”가 맘에 쏙 들었다는 말을 들은 때문이다. 나의 한어(대국) 수준은 엉터리였으나 당시 문화대혁명이 갓 결속된 중국문단을 눈뜨게 한 소설가, 량 효성의 “이것은 신비한 땅이다”란 소설에 푹 빠져있었던 나로서는 그 한족소설독서광인 조선족처녀에게로 전류가 통하고있음을 억누를 길 없어 했다… 약혼은 뜻밖으로 쉽게 이뤄질 줄이야. 우불구불 거리 속을 뻗어나간 청 빛의 철길이 얼어 튀게 추운 겨울의 그날, 퇴근길에 오른 처녀를 가로막아선 것이다.  “난 공인이면서 작가요. 난 처녀를 사랑하오”그런 서툰 한족말로 그녀에게 나의 갓 발표된 단편소설이 게제 된 “은하수”잡지와 중국작가, 량효성이 최근에 발표한 소설, “이것은 신비한 땅이다”를 내밀었을 때 처녀는 대뜸 의혹과 어색함을 가시고 이 초면강산의 총각을 구면처럼 밝게 맞은 게였다…하늘을 뒤덮은 매연 낀 거리에는 얼어붙은 말똥들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쿵쾅. 쿵쾅. 챙 챙챙. 삐삐…북소리, 꽹 꽈리 소리가 어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추어 양 걸대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옆으로 “두 번째 악수”를 읽으면서 걷는 처녀의 도고 한 모습이 천사처럼 안겨 온다.  매주 토요일 오후이면 나는 한 40분을 기차 타고 처녀네 집으로 다니 군 했다. 그런데 고작 네 번째의 만남 때였다. 내가 약혼식도 전인데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청년이 있었다…곧 동서로 될, 처제와 사귀고 있는 사람이란다. 말이 오가다가 “중국어를 바로 못하는 ‘꼬리’가 어떻게 이 집안의 맏사위로 될 자격이 있는가….”라고 나에게 망언을 퍼부은 사람이 바로 지금의 저 동서가 던진 “민족상잔의 폭탄”이였다…그때 난 동서가 될 청년의 유창한 중국말과 거만한 틀 거지와 멀어져가던 오토바이의 엔징 소리에 기가 질렸고 수치와 분노를 암으로 재웠었다.  ※ 결혼 후, 몇 년이 흘러가자 동서들이 한 술상이나 되였다. 아래로 동서 넷 이였는데 둘은 “가짜한족”, 둘은 진짜한족이였다. 아내보다 더 고와 보이는 처제들이란 말을 무심히 들어왔건만 내 눈으로 처제 넷 다 저주 할 만큼이나 미웠다. 단 한마디의 조선말을 못 할뿐더러 자기 이름자도 쓰지 못하는 처제들, 그보다는 명절이나 생일로 합석일 때마다 “큰아저씨"하고 인사말 한마디는 몰라도 그 눈길들이 “큰언니가 어쩌다 저 같은 사람에게 다 시집을 간 거지? 믿을 수 없다니 깐.”그러한 의혹과 찬 눈길들이다.  그러나 처제들과 맏동서와는 달리 한족들인 두 동서는 언어소통이 잘 안 되여 묵묵부답인 나를 비웃거나 괄시하지 않았고 번마다 “따 꺼, 쌘 라 이 바.”(큰 형님께서 먼저 드셔요.) 술잔을 먼저 권 하군 했는데 그게 얼마나 다행이든지 모른다.  한 번씩 처가 편 모임이 있었던 후마다 나는 불쌍한 아내와 화풀이를 하군 그랬다. 그때면 아내도 내 화를 풀어주느라 잘 안 되는 조선말로 그 동서를 나무랐다. “제 허물은 통 모르는… 제 똥에 물 앉게 콱 내버려둬요.” 나는 그때 위축되고 따돌림을 받는 나보다 더욱 억울한 사람이 있는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았었다. 라일락 향과 다투어 피는 영산홍처럼 그런 부드러운 눈길과 미소로 아픔을 가렸던 아내였다.  나는 나를 어쩔 수 없어 했다. 나는 때때로 늦봄의 라일락 향과 영산홍을 사정없이 떨어뜨리는 찬바람이 되고 있었다. “우리 이혼해. 생활습성이 서로 다르잖아…”그담엔 동서에 대한 원망이 터진다. “날 노예로 쳐. 난 나무 패고 석탄을 퍼 들이고 하는데 자긴 동생들을 끌 구 앉아 마작을 치고 …어디 그 뿐이야, 술만 들어가면 거리낌없이 ‘꼬리’를 불러대면서 자기 조상을 욕하는 줄도 모르는 …저게 어디 사람이여.”그마저도 성 차지 않으면 아내와,“너도 그래. 어쩜 자기 민족의 언어와 글마저 모르다니…”“나 이제 아들애가 소학교에 다니면 아들애에게서 조선말과 글을 많이 배울게요…난 이제 당신이 쓴 소설까지 읽어 볼 거야요.”그럴 때마다 아내는 귀여운 아들애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남편이 젤 듣기 좋아하는 남편이 쓴 글까지 읽어준다는 말로 나를 위안하군 했었다. 동서를 동물적으로 본 것은 그 이듬해 음력설 이였다. 사위들은 정월 초하루 날은 집에서 쇠지만 정월초이튿날은 처가 집으로 떠난다. 귀여운 내 아들애가 장모님 앞에 엉덩이를 천장으로 쳐들고 꾸뻑 절하는 모습, 그리고 세배 돈을 받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를 때, 그보다는 “그래도 너만이 조선말을 똑똑하게 잘 해 참 다행이야. 어이쿠, 내 외손주야, 뽀뽀.” 장인장모의 사랑을 독차지 할 정경이 천지에 눈꽃 날리고 만리에 사슴파리 달리는 북국의 풍광처럼 가슴 부풀게 한다.  칙칙폭폭. 기차 타고서 처가 집에 이르니 때는 오후 세시 반. 벌써 처제와 동서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런데 풍성한 음식상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저녁 무렵까지 큰 처제 부부가 오지 않고 있었다. 모두 조급해하고 근심이 태산 같았다. 쩍하면 티격태격하는 그들 사이인데 손찌검이라도 나 가장기물을 박산 내고 무슨 큰일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들 부산을 떨었다. 결국 나와 아내가 저물어 가는 저녁 대기 속에 식어 가는 설음식상을 등지고서 큰 처제네 집으로 떠났다.  밖은 매연 낀 상공 때문에 하늘을 가려볼 수도 없었다. “뭔가 배탈이라도 났거나 아니라면 지금쯤 오는 길이겠지 뭐.”나는 아내의 반쪽이 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위안해 주려했다. 아내는 폐기종 환자처럼 콜록거렸다. 나도 영감처럼 호흡도가 불편했다. 내처 경사도가 급한 비탈을 올라야했다. 무시로 틀고 앉은 탄갱들과 거무튀튀한 집들에서 컹컹 짖어대는 개들 때문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사이조차 없게 공포에 질려했다. 대를 이어 석탄을 캐먹고 사는 탄부네 들은 소의 내장처럼 복잡하게 집들을 짓고서 살았다. 처제네 집도 그 속에 끼여 살고 있었다. 여느 한족들과 똑같이 동서네 집 출입문발에는 붉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쓴 “복”을 소원하고 “귀신”을 쫓는 주련 들이 붉은 초롱 불빛 속으로 황급히 날아 들고 있었다.“어마나.”갑자기 아내의 입으로 비명처럼 소리가 나왔다. “뭐, 뭐가?!”처제네 집이 깜깜하게 불이 죽어있었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에 싸여 한달음에 달려가 그 집 문고리를 힘껏 당겼다. 문은 얼음 깨여지는 소리를 내며 겨우 열렸다. “유…유 런 마 아-”(사람 계셔요?)허둥지둥 들어온 아내가 등 뒤에서 혼 들린 소릴 뽑았다.“따제에(언니)-" 어둠 속으로 처제의 갈린 목소리가 덮쳐왔다. 이어 전등이 켜지며 눈앞에 날아든 것은 참담함 이였다. 폭력이 몰아온 저주와 절망으로 어두웠던 집안은 부서진 식기와 경대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울다 잠이 든 네 살 잽이 아들애의 때 국진 얼굴이 처량해 보였다. 그때까지 소파에 비스듬히 비껴 앉은 채 마른 오징어 한 쾌나 부려놓고서 캔 맥주를 따대는 동서를 마주할 때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주질 않았다. “동서, 설에 이게 뭐요 글쎄…” “난 복…복이 없는 놈이오. 내 전도를 망쳐먹은 년…설은 무슨 개똥같은 설…”동서가 오징어를 찢어서 씹어대면서 앙천대소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찾아온 우리에게 분풀이라도 하듯 오징어 쾌를 들었다 메쳤다. 자던 아이가 놀라 깨여나 울어대기 시작했다. 처제도 더는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이래요? 뭐가 모자라서? 자꾸 투정 질 야요! 한족글자로 결심서 한 줄 못 쓰고 조선족글자는 자기 이름자두 못 쓰는 주제에 과장, 국장을 할 수가 있어요? 소 웃다 꾸러미 터질 일 아닌가요…허튼 욕심 버려요! 절로 쉬파리 씹고 개 배때기 차는 꼬락서니를…” 어둑한 구석에서 나오며 하소연이듯 남편을 향해 피멍을 쏟는 여동생을 그제야 뜯어보고 아내는 놀라했다. 시퍼렇게 멍든 눈언저리와 터진 입술을 발견하고 분개로 몸을 떨었다. 언니의 눈가로 아픔과 동정의 눈물이 맺힌걸 보면서 처제는 더 깊숙한 “수술”에 칼부림을 했다. “지 아내가 허리 휘도록 석탄과 연탄을 주어서 모은 돈까지 도박에 처넣고 그것도 모자라 갱에 이불 쓰고 들어가 과부들과 지랄을 하는데 돈 다 날리는…못 살아, 이 설날마저 바람난 짐승 같은 네 놈과는 못 살아…”아내도 가만있지 않았다.  “애초에 내 여동생을 생명처럼 여기고 사랑하리라 한 것이 이따위로 놀리라곤 몰랐지 뭐요. 정말 실망이야, 실망! 완전히 타락했구먼. 세상천지에 젤 더러운 두 가지가 뭔지 아나? 도박! 바람피우는 거…에그그, 망신스러워라, 억울한 처지가 된 내 여동생은 어쩌나…”그런데 동서는 누그러들 대신 더 낯짝 두껍게 나올 줄이야. 실로 입에서 나온 말은 말이 아니라 구렁이라면 구렁이였다.  “그래, 타락했지요. 아니, 타락이란 요? 남들은 날 두고 사내답다고, 멋있다고 칭 하든데. 난 나 또래들의 ‘우상’ 이지요. 아무나 우상이 됩니까, 돈 잘 벌고 기운 좋고 통이 크고 소통능력이 있고…하하. 이런 남잘 미인들이 따르는 법. 하긴 타락이랄 법도 하지. 따지고 보면 나 처 언니 때문에 이 집 사위가 된 것 같아…”“뭐, 뭐야? 이…이게 보자보자 하니까…”난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내 아내까지 넘보고 드는 동서의 멱살을 거머쥐고 말았다.“내…내 말마저 들어봐…”거구의 동서가 날 콱. 밀치는 바람에 난 벽에 가 쿵 등을 박았다. 동서는 입에 거품이 일게 말을 내 쏟고 있었다.  “처 언니가 법원가문의 따님인데다 선녀처럼이나 탐스러워 얼마나 많은 총각들의 추구를 받았던가는 누구도 몰라. 난 처 언니가 공안국장의 아들과 되는 줄 여겼지. 난 그런 낌새를 채 구 앞날을 그려보았어. 얼마나 미묘한 꿈인가. 내가 그런 사람과 동서관계가 되는 날이면 제대군인인 나의 전도가… 그런데 난 지금 이 꼴이야. 처 언니가 이해 할 수 없어. 지금의 동서, 자긴 대체 뭐가 잘 났어?… 중국어를 못 하는 데다 잘 사나 인물체격이 있나… 참 나 원! 연분이란 걸 통 이핼 할 수 없으니. 쯧쯧.”동서가 왜 날 동서취급을 해오지 않았던가를 끝내 알 수가 있었다. 배신감, 낙망, 분노로 속이 이글거렸다. 나는 아내의 팔을 잡아끌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눈보라는 적설위로 몸부림치고 붉은 초롱불들은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 먹빛의 바다를 헤 가르는 물고기들의 눈깔처럼 보인다. “말해봐! 그 공안국장의 아들과 어떤 사이였어?” 나는 질투와 분기로 허약한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한마디 말이 내 엉망이 된 이지를 회복시킬 줄이야. “하향 년대 내 또래 처녀애들은 벌써 18, 19세에 연애, 결혼바람이 불었거든요. 그런데 난 ‘소설독서인’이 박혀 연애란 까맣게 잊었지요. 장편소설‘두 번째 악수’는 울고 웃으면서 열 번도 더 읽었어요. 그리고 난 내 앞에 무릎 꿇고 사랑을 고백하는 총각들을 두고 재미나는 구경거리처럼 여겼지요. 이건 순 현실 속의 ‘소설 읽기’였거든요. 그러다가 여동생이 기다리다 못해 짝을 찾아 연애를 시작하던, 그러니까 내가 25살을 먹던 해 조선족소설가인 당신을 만나 연애에 빠지던 그때에야 난 그간 같은 민족의 이상적인 총각을 기다렸겠음을 깨달은 거지요…”“저 비열한 놈을 어찌 가만두나…”난 아직도 술에 취해 오징어를 뜯고 있으며 이지를 잃고 있을 동서가 이 갈렸다. 그러나 동서네 집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갔을 때 눈앞에 나타난 정경은 전혀 다른 판국이고 있었다.“그래요, 우리 사이는 이제 끝이지요! ”“여보, 끝나다니, 나…나 불…불쌍하잖아…”“어머머, 미치겠어. 왜 그 쪽이 불쌍한데…”“……” 처제는 한사코 남편을 뿌리치려하고 그 남편은 기를 쓰고 아내의 양해를 구하려한다. 그러다가 얼결에 처제의 손이 그의 얼굴을 쳤다.“그래. 여길 더 쳐. 내가 친 매를 복수하고 맘 풀라고. 어서. 여길 때려…”동서는 술에 완전히 취해서 이지를 잃었든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나를 밟아.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가. 눈 통이고 주둥이고…난 늘 네 주위를 떠돈 거야. 난 너의 유령이야. 난 네 귀…귀신인걸 몰라?…”더 구경할 수 없었다. 난 아내를 데리고 나와 버렸다. 동서, 허욕에 들뜨고 연약한 유부녀들을 거리낌없이 꼬시며 아내는 노비처럼 부리려드는 수치스럽고 영악한 인간인 것을 어찌 알았으랴! ※ 계서시에서 60여 리 밖은 처가 집이 사는 리수진이고 리수진에서 60여 리밖은 문화대혁명의 험악한 시대에 “고린내 나는 아홉째”로 몰린 아버지 따라 내려와 “뿌리박은” 산골오지였다…나는 십리나 먼 향 중심소학교로 출근하는 한편 함수대학공부도 마쳤다. 그새 소설도 여러 편 발표했고 직장도 초급중학교를 거쳐 고급 중등학교로 옮기게 되였다.  기회가 되려고 하니 그랬던지 나이 55살에 접어들던 그해, 내가 사업하고 있던 고급 중학교가 초급중학교와 합병하면서 교원이 남아돌게 되였는데 원하는 사람은 능히 내부퇴직을 할 수 있다는 문건이 내려왔다. 그 바람에 나는 퇴직수속을 하고 한국으로 나왔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도 대련에 남아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게 되였다. 하지만 한어에 능하여 전도가 양양하리라 던 큰동서는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동서의 말처럼 “시대가 별나게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날 처제가 찾아왔다. 오징어가 뿜는 먹물인양 시커먼 석탄연기와 남편의 폭력아래 절어 사는 여인 같지가 않게 명랑했다. 꽈리를 불며 제비가 수면을 차고 날고 있었고 풀빛 메뚜기들이 교미 붙는 그날에 호박 빛 미니스커트를 입은 처제가 짙푸른 여름의 한복판에서 나를 향해 “아저씨.” 하고 처음으로 되는 조선말 인사를 건넨 것이다. 수줍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송스럽기까지 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미덥고 감사하고 기대하는 눈빛이 집요했다. 뒤에 붙어선 7살 잽이 막내아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그런데 내 아내가 그 애의 두려움이 어린 눈빛을 들여다볼 때, 처제는 “흑”하고 울음소릴 냈다. “나 여기, 언니 곁에 와 살려고요. 막내아이를 조선족소학교에 입학시키려고.”그러며 나를 바라보는 처제의 눈에는 다시금 창밖 푸른 하늘이 비꼈다.“아저씨”란 첫마디지만 다시 부르는 그 음성 속에 아저씨를 우습게 대해온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와 죄송스러움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세월이 변했잖아요. 조선족들이 한국 돈을 무지무지 벌어들이는 지금에 늦더라도 장원한 타산을 해야지요. 미래에 우리 아이를 한국에 보내려면 한말과 한글을 배우도록 해 야죠. 그리고 대학시험을 쳐도 민족점수, 10점이나 더해준다던데.”“너 남편이 동의 한 거야?”나의 물음은 의문이 넘쳐나고 있었다. 처제는 고우나 그 남편은 미웠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뵈는 처제의 심상에 연민의 등이 켜지고 있었다.그렇게 처제와 이웃으로 살게 되었다.  처제의 둘째 아들이 조선족소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못 가 그 아비가 찾아왔다. 온 동기는 불 보듯 했다. 낮이면 처제를 육체적인 노예로 부리고 밤이면 성 노예로 즐기는 동물적인 그 야성을 누가 모르랴.“조선족들의 외국나들이는 오래 못가지. 자식들이 큰 노릇하려면 그래도 한글보다 대국어를 배워야지. 견식 짧은 여자들이란… ”처제는 끝내 남편에게 끌려갔다. 눈물을 뿌리며 떠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분명 조선족이면서도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 털끝만 한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는 동서가 그렇게 한심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 전화에서 아내는 동서에게 다짐을 받겠다고 했다. 그래, 구경 무슨 다짐을 따보겠다고 그러는지, 다짐을 한다고 동서의 나쁜 버릇들이 고쳐질 수 있을 가? 핸드폰을 내려놓은 후 나는 커피 잔을 집어들었다. 카밀렌 차는 아직도 향을 풍기고 있었다. 차 둬 모금 마실 동안에 다시 핸드폰이 울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나라 저쪽 나라에서 들려오는 동서의 목소리였다. 나는 뜨거운 차 잔을 놓칠 번했다. “형…형님 이슈? 한…한말을 잘 하니까 한국에 가서 부자가 …”핸드폰을 든 내 손이 떨렸고 차를 마신 속이 울렁울렁해난다. 동서는 전화에서 울었다. 지난 일은 다 자기 잘못이라고…병든 아내와 싸움질로 투옥된 큰아들을 봐서라도 한국 나가 돈 버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만약 형님께서 앞에 계신다면 골백번 절이라도 드리겠다고… 그리고 동서의 마지막 말은 나를 혼돈을 일으키게까지 만들 지경 이였다.  “형님, 나 이담 손자손녀는 꼭 조선족학교에 …조선족학교에서도 한족언어와 글자를 잘 배울 수가 있는데 구태여 자기 민족을 까맣게 등지고 한족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냐고요…”나는 뭔가 비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내 얼굴에 덮씌우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환각 속으로 전화기가 오징어처럼 방안을 떠다녔다. 암갈색의 열 개의 긴 발로 수렵물을 감아선 날카로운 가위 이발로 사정없이 잘라먹다가도 자기가 위험을 느낄 땐 상대방의 시선을 혼돈시키거나 마비시켜 자신의 진면모를 덮어 감추어버리려 뿜어내는 먹물, 그 먹물이 온 방안을 흘러들어 채우고 있음에 난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 회, 그놈의 회에 소주잔을 기울일까 해서였다. 가오리를 보면 가오리 회 또 벤 자리, 자금바리, 붉은 바리에 내장이 없다는 말미잘 회까지도 먹고 싶었다. 평소에 그렇게 맛을 들였던 살 오징어, 꼴뚜기, 갑 오징어…그 열 개의 발의 길이가 50cm-90cm에까지 이른다는 오징어네 족속들, 바닥을 기다가 놀랐을 땐 물을 분사하고 위험을 느끼면 먹물을 뿜어 포식자의 감각기관을 마비시킨다는 왕 발 오징어에 이르기까지 언제 회로 맛을 들였든 지가 감감 멀어져가든 것이다. 어느덧 나는 울어 예는 저녁 갈매기 떼와 바람에 출렁출렁 춤춰대는 고기 배들을 등진 채 어물시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길 가엔 찔레종인 분홍 들장미가 피어 있어 코티 분 냄새가 바람 속에 떠돌았다. 달리아와 무궁화, 방 초 꽃과 병 꽃과 백합화같이 흔한 꽃들과 현실 너머의 언어로 의사소통이라도 하듯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꽃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나를 흥미롭게 뜯어보고 지나는 눈길들도 느껴지고 있었다. 슬로 비니 아 난민 같은 남자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그들은 저희들 말로 뭐라고 주절대고 있었는데 “꽃에 넋을 앗긴 저 놈은 아마 아내한테 배반을 당하고 후회하고 있을 거야…”하고 나를 비웃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조국을 멀리 떠나서도 자기 민족 언어를 스스럼없이 구사하는 그들이 장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긴 세월 자기 민족을 등지고 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울며불며 뻔뻔스럽게 나오는 동서가 너무도 파렴치하게 생각 되였다. 길가의 꽃들이 설렌다. 이윽고 더 센바람에 숲의 나무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바다의 비린내를 떠나 새떼가 하늘을 가로질러 이동한다. 곧 비 방울이 떨어지면서 양철지붕을 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을 한다. 오징어 회는 없었다. 스테이크를 굽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짬짬이 조선말과 글을 배우다가 아들이 학교에 붙은 후 아예 아들을 선생님으로 삼아 더욱 탄탄하게 조선말과 조선어를 다지겠다며 신심에 차하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막내아들을 조선족 학교에 입학시키던 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던 처제의 모습도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카 멜 렌 차를 진하게 타서 마셨다. 그리고 다시 밖을 나섰다. 공원 숲길을 지날 때 나뭇잎사귀에 모인 물방울들이 제 무게를 못 이겨 내 머리 위에 툭툭 떨어졌다. 오솔길을 달려 나가니 들판에 하얀색의 자운영 무리가 가득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늑한 정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약해지려고 하는 내 마음을 발견했다. 나는 부드럽고 향이 넘치는 꽃들에 넌지시 시선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 동서가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날 밤, 나는 긴장으로 하여 거친 숨을 내뿜고 있는 동서에게 다짐을 땄다.“기어코 한국으로 나오려면 나의 요구에 응해야 하네…”“그럼요, 형님. 말씀만 하시오. 어느 명이라고 감히 거역하겠습니까?”“첫째, 한국에 오면 도박을 해서는 안 되네!”나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한테 다짐을 받듯 엄하게 말했다. “그럼요. 하고 싶어도 돈을 버느라 할 새나 있겠습니까? 아니, 놀 사이가 있어도 절대 도박을 놀지 않을 겁니다. 마음 활 놓으시오, 형님!”“그리고 술버릇도 고쳐야 하네.”“……”“화대를 마구 써대는 버릇도 떼야 하구. 여기서 돈 좀 벌어 그깟 노름에 빠져 망한 놈들이 많아.”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이였다. “그리고, 이건 더욱 중요해. 자기민족의 말과 글을 배우는 건 무능 인간으로부터 유능한 인간으로 동화되는 근거야…여기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말과 한글을 배워야 하네.”“그럼요, 여부가 있겠어요? 배워야 지요 …흑 흑 흑…”갑자기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흠칫 몸을 떨었다. 연탄연기 자욱한 밤에 술상을 마주하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마른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어내던 동서의 청승스러운 몰골을 보는것 같았다. “자네 우는가?”나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갔다. “형님, 뭐, 뭐라고 할 가요? 나 나, 나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동서가 울음을 심키고 있었다. 그 고통스럽고 비틀린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초봄의 따스한 해 볕에 얼음이 풀리고 수세미 같이 엉켜져있던 오징어 발들이 스르르 제자리로 풀려나가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면서도 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조선족이면서도 조선족이 아닌 척 살아온 동서와 어떻게 한집에서 살까 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나는 뭔가에 순응하고 있는 자신이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긴 세월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모르고 살아온 처제와 동서들을 책임져야 할 때가 온 것이란 점을 새삼스럽게 터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소낙비 뒤에 남산과 북산 봉우리를 이어놓은 칠 색의 무지개 아래로 아내가 기쁨의 눈물로 흠뻑 젖은 손수건을 저어오고 있는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당신-,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가슴이 뭉클해 났다. 동서의 거친 숨소리가 방안의 고요를 깨는 듯싶었다. 그 소리는 동서가 머리를 드는 “남성”을 누르느라 괴롭게 쏟아내는 야성 같았고 한국어학원에 가서 힘들게 한국어를 배우며 토해내는 한숨 같았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시장에서, 일터에서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살면서 가슴을 치는 통탄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파트 앞에 있는 어린이집이며 학교 건물들에서 오색의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닭 모양의 중국지도 맨 북쪽 끝 “닭부리”에 자리 잡은 흑룡강성 목능현 보흥촌 소학교며 중국지도의 맨 동북쪽 “닭턱”에 위치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제2소학교 운동장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족어린이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귀여운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속에는 동서의 손자, 손녀들도 끼어 있었다.나는 웬 지 그 순간 술을 마시고 싶었다.  어느새 “참이슬”병 두개나 나뒹굴었다. 갑자기 나는 콧등이 시큰해나면서 무작정 터져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런 거였어. 워낙 이런 거였어. 세상은 진작 이렇게 돼야 했어…”나는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혼탁한 이슬에 가려진 내 눈이 뻘겋게 충혈 되여 가고 있을 때 나는 커다란 오징어 한 마리가 열 개의 다리를 너울거리며 벙글벙글 웃고 있는 환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벽과 천장으로 이슬비 같은 빛살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는걸 보았다. 온 방안에 가득 차오르는 무지개 빛살이었다.   2016년 11월11일 초 고12월20일 수정 
▲ 량춘식 소설가
 량춘식 프로필 1957년 흑룡강성 목릉현 하서공사 보흥촌 출생
1975년 고중 졸업후 하서공사 조양촌에서 2년간 농업에 종사
1976년 허서공사 수리소에서 1년간 과학영농 기술운을 일함
1977년 하서공사 갱신촌소학교에서 3년간 민반교원으로 사업
1980년 "우파의 아들 정책락실"로 시험쳐 목릉현국영담배공장에 공인으로 5년간 일함
1985년 교원아버지의 영향으로 보흥촌소학교원으로 전근됨. 그 8여년간 흑룡강성 오상서범학원 조문전과 졸업,길림대학통신학부 교육학본과 졸업.
1992년부터 8년간 훈춘시제1실험소학교에서 작문지도교원으로 사업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력임
현재 연변작가협회 리사,훈춘시제2고중 조선어문 교원으로 사업2006년 흑룡강신문 "신춘문예공모"에 입선되어 장편소설 <지옥은 천당이다>를 연재
2008년 중편소설《하류의 물살》과 단편《푸른강은 흘러라》가 한국자영영화사에 의해 영화《푸른강은 흘러라》로 각색되어 부산영화제에 출품
중편소설《레몬빛 선택》,《고향》,《홰치는 소리》 등 12편과 단편소설《누나네 마을》등 80여편 발표진달래문학상,화림문학상,도라지문학상,연변일보제일제당상,화신문화대상,리영식아동문학상 등 10여차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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