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화순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조선족들이 꿈에도 밟기 힘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았던 땅 '고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후 부터이다.

그때 중국 위안과 한국 한화 환률은 10대1기에 누구나 한국으로 가려고 애를 썼다. “그곳에서 손자질을 하고 여기 와서 할배질을 하자’’란 마음속의 구호를 외쳤다. 중국 조선족의 1/3 이상이 한국 노무의 길을 떠났다. 노무 중에서 그들은 내국인의 불공평대우 혹은 임금체불, 인격모욕 등에 견디다 못해 회사와의 계약도 팽겨 치고 뛰쳐나와 불법체류의 딱지를 달고 헤매다가 강제추방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금 한국행을 선택했다. 돈이 아무리 들어도 이자를 내서라도, 조건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의 머리를 바꾸고, 심지어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밀입국을 하기도 하였다. 밀입국 배를 타면 공기가 희박한 고기 닮는 컨테이너에 사람을 숨겨 가다가 숨이 막혀 죽은 사람도 있었다. 불법체류로 검색을 당해 강제추방 당한 동포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행이 점점 어려워지니 내가 아는 친구 몇몇은 “가짜이혼, 가짜결혼”으로 또 한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한국에 가지 않으면 않았지, 그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2000년 8월, 나는 마침내 회사고찰이라는 명분으로 브로커한테 8만원을 주고 인천공항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다. 남편과 자식을 두고 떠나는 가슴은 아팠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과 애들 공부 마음껏 시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등을 민 것이다.  서울에 도착하니 일 년 전에 한국에 나온 시누이와 조카가 맞아주어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서울은 천국이었다. 고층 아파트이며 아름다음 꽃들이며 질서정연한 이름 모를 가로수와 가로등이 너무 예뻤고 아름다웠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량들과 질서 정연한 교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간은 이렇게 구경만 하다 보니 근심걱정 모르게 지냈는데 막상 일자리를 잡아야 할 때가 다가오니 걱정과 불안이 슬슬 고개를 쳐들었다. 떠나올 때 이미 각오하긴 했지만 법을 어기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겁부터 앞섰다. 아직은 합법체류인데도 경찰이 옆을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고향에서 먼저 간 친구의 소개로 숙식 제공하는 큰 갈빗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은 야간과 주간으로 나누었다. 거칠 것 없이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독신이기에 야간이나 주간이나 나에겐 별로 관계가 없었다. 야간을 끝내고는 낮에 가게 숙소에서 잠을 자야하는데 가게에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중국 동포들이 너무 많아서 불안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근무하는 갈빗집은 직원이 110명이나 되었는데 관리가 아주 엄격 하였다. 한주에 한 번씩 직원 미팅이 있었다. 직원들 각자의 임무는 아주 명확하였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영업부 조리부 찬부로 나누어 우수 직원을 선정하여 고무격려 하여 주었다. 그 외, 보너스와 퇴직금도 어김없이 봉투에 넣어 주었다. 우수 직원을 선거할 때도 한국인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고 좋았다. 하지만 우리 가게는 동북삼성에서 온 동포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쩍하면 법무부 유관 부처에서 불법체류자를 수색하려 나오곤 했다. 그것이 너무 불안하고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포 두 명이 주간에 일하다가 잡혀갔었다. 그 후부터는 수색대가 나타날 기미가 보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냉동실 집에 들어가서 몸을 감추어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매일 마음이 두건거렸는데 이 일이 있은 후에는 낮에 기숙사에서 잠을 자면서도 초간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언제한번 단잠을 자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끝내 마음편한 곳에서 일하려고 그 좋은 일터를 사직하고 동포가 많이 없는 인천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갈빗집 홀을 뛰었는데 직원은 또 100명이 넘었다. 다행히 우리 동포는 나를 포함해서 3명뿐이었다. 서울 큰 갈빗집에서 일했다는 것을 잘 아는 지라 사장님과 사모님은 반갑게 나를 받아주었다.나는 야채와 빠시를 관리하다가 참모언니의 요구에 따라 그와 함께 찬을 맡아하게 되었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이 기회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힘 드는 줄도 모르고 일했다. 열심히 일을 했더니 월급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었다. 가게는 날이 갈수록 흥성하였다. 이쯤에 옆의 가게들이 팍팍 죽어간다는 말이 들리는 것 싶더니 그 후부터 사흘이 멀다하게 위생검사대가 들이닥쳤다. 건강 보험증이 없는 사람은 일당을 뛰는 몇몇 한국인들과 우리 동포 셋뿐이었다. 그래서 일단 검사가 내려오면 우리는 3층 숙소에 올라가서 몸을 숨겼다. 그런 일이 얼마나 반복하였는지 모른다. 얼마 후 가게 참모가 바뀌었다. 원래 참모가 밀려나고 새 참모가 취임하였다. 며칠 후 예전과 마찬가지로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한 직원이 "위생검사대가 왔어요"라고 외쳤다. 우리는 또 습관대로 1층에서 3층으로 올리 뛰었다. 그런데 이날은 검사대가 다른 때와는 달리 반대로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내가 안간 힘을 다하여 숨을 헐떡거리며 층계를 오르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아줌마 성함을 어떻게 부르시죠?"하고 물었다. 감짝 놀란 나는 얼떨결에 "잠깐만요."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어떻게 층계를 내려 왔는지 몰랐다. 하여튼 2층 영업부로 해서 뒷문으로 용케 빠져 나왔다. 이렇게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니 나머지 두 명의 동포가 걱정스러웠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속만 태웠다. 후에 들어 안 일이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로 한 분은 자기 이름을 솔직히 밝히지 않고 엉뚱한 이름을 댔기에 검사대가 한국인 직원을 문초할 쯤을 타서 몸을 피했고 다른 한분은 급한 나머지 화장실에 숨어들어 모두가 무사 했다고 한다.  사실 이 일은 얼마 전에 밀려간 찬모가 사장한테 보복하기 위해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일 잘하고 있는 우리들을 출입국에 신고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때 만약 잡혀서 강제추방을 당했더라면 집의 많은 빚은 어떻게 갚고 가정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였을까? 생각만하여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또 다시 자리를 떠야 했다. 인정도 많고 동정심도 많은 사장과 사모님, 부장, 정든 동료들과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부터는 가급적이면 큰 가게를 피하고 작은 가게를 찾았다. 가게의 사장님은 아주 세심하고 열심히 일하는 분이였다. 이 가게에 있는 기간, 2003년 3월31일까지 3년 미만자는 외국인등록증을 발급하도록 한 법무부의 정책이 있어 그 가게가 증명을 서서 나는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 8시에서 밤 10시반 까지 일을 하다보면 때로는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쫒기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사람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장시간의 고된 노동은 나에게 약봉지를 선물하였다. 스스로도 몸이 쇠약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가져온 소염제와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참으면서 버텨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끝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돈을 벌려고 온 내가 보험도 없는 병원의 검사비, 주사비, 약값해서 비용이 엄청나게 나왔다. 더는 병원에 퍼질러 있을 수 없었다. 의사가 병원에 좀 더 있어야 한다고 말렸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퇴원 수속을 밟았다. 무작정 퇴원은 했지만 목구멍이 부어올라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주전자에 물만 끓여 마셨다. 이렇게 수일을 지나고나니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어서 도저히 가게 일을 할 엄두를 못 냈었다. 장기휴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2005년 한국 법무부에서는 3월 15일에서 8월 31일까 자진출국한 사람은 반년 혹은 1년 후에 재입국할 수 있다는 규정을 발표하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귀국을 선택하여 그해 6월 중국으로 돌아갔다. 반년 혹은 1년 후에 다시 한국에 나타날 때는 불법 타향살이가 아니라 당당한 노무일꾼으로 활개 치며 일할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을 안고 말이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