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기수 프로필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생. 전 훈춘시 정부 공무원, 전 훈춘시 방송국 편집기자. '고향집', '연정', '고향가는 길', '정겨운 그 소리' 등 수필 다수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현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거주

[서울=동북아신문]연일 최강의 한파가 온다고 한국방송이 분주하더니 아침에 일어나 가건물 비품창고에 들어서는 순간 하얗게 질린 유리 창문이 시야에 안겨온다.  

창문에 꽃이 피었다. 겨울 꽃이라고 불리는 성에 꽃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보기 드문 꽃이다. 눈여겨보니 갈대숲 같고 꽃잎 같고 올챙이 같기도 한 것 들이 간밤에 은밀하게 뒤척인 듯 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밤새껏 매서운 한파에 부대끼며 흐느낀 흔적을 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고향집 창문이 떠오르고 가슴속에서 야릇한 애상이 녹아내린다.  비록 고삭은 지붕아래 작고 못생긴 창문이지만 한때는 봄볕이 따사로운 하늘을 향해 화사하게 웃었던 창문, 설레는 숲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에 가슴을 열고 은혜로운 햇살을 아낌없이 쏟아주던 고마운 유리창이었다. 하지만 그 화창한 영광이 식어버린 겨울밤 차가운 시련을 견디다 못해 하얗게 피어나는 성에꽃은 어쩌면 비운에 우는 젖은 넋의 꽃이리라. 아무리 자식 사랑이 넘친다 해도 아버지의 빈자리는 그토록 허황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동산에 붉은 해가 솟아올라 천리변강을 비춘다지만 핵겨울을 맞은 우리 가족은 춥고 쓰라린 시련에 떨어야 했다. 일곱 식구의 운명은 어머니 손으로 넘어갔건만 억장이 무너진 어머니는 두통이 심하여 정통편이 없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이렇게 망가지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던 그때 어머니는 머리 수건을 이마에 동이고 기적같이 일어나셨다. 어떻게든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겠다는 모성애가 발동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향한 곳은 가을 추수가 끝난 지도 이슥한 허허 벌판이었다. 배고픈 자식들에게 밥 한술이라도 더 먹이겠다고 가을이 떠나간 싸늘한 논밭에서 허리 굽혀 이삭줍기를 시작한 어머니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면 그 처량한 울음소리에 아버지 생각이 나서 까마귀와 함께 울었단다. 그렇게라도 울고 나면 답답한 가슴이 열리고 속이 후련하다며 말리지 말란다. 어머니의 가슴은 늘 싸늘한 한숨과 사랑의 숨결이 뒤엉킨 하얀 넋의 성에꽃이었다.  겨울이 왔다. 어머니는 누나와 함께 밤낮없이 가마니를 짰다. 농사만으로는 조롱조롱 매달린 새끼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판단에 유일한 경제내원인 가마니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나 보다. 가마니를 짜기 위해 볏짚을 다듬고 새끼를 꼬고 가무를 돌보느라 한가한 날이 없었다. 여린 여자 강한 어머니였다. 겨우내 어머니가 짜낸 가마니를 합치면 아마도 우리 집 초가보다 더 컷을 것이다. 그때는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사나워서 눈보라가 쌩쌩 불어치는 날이면 남산에 까치가 얼어 죽었다느니 들에서 얼어 죽은 까투리 한 마리 주워왔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허나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부엌에 군불을 지피고 솥에 옥수수 죽이나 팥죽을 쑨다. 경우에 따라 메뉴가 바뀌는데 설이 오는 대목이면 엿을 달이거나 떡방아를 찧어다가 떡을 빚곤 했다. 그러면 집도 춥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명절을 쇨 수 있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기였다.  호기심이 많은 막내가 아침에 일어나 손가락으로 창문에 피어난 성에꽃을 만져본다. 허나 그 철부지는 방안의 온기가 안간힘을 다해 창밖의 냉기를 밀어 내면서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더욱이 그 속에는 어머니의 노고와 사랑과 한숨과 그리움의 눈물이 어리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푸름한 새벽이면 일어나 부엌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아침상을 차린다. 어머니이기에 당연히 해야 하고 자식은 따뜻한 이불 밑에서 늦잠을 자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막내가 눈을 뜨고 깨여날 때면 창문에는 늘 성에꽃이 피어있었다. 고향에 봄이 왔다. 마늘을 심으려고 땅을 파던 중 흙속에서 아버지 생전에 아끼시던 대패가 나왔다. 사람이 없으니 물건도 값이 없다며 땅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던 모습이 아련하다. 어쩌면 오십대의 문턱을 넘어서던 어머니가 갱년기여서 더 힘들어 하시지 않았나 싶다.  개혁개방의 훈풍은 조국변강의 농촌마을에도 불어왔다. 잘못된 정책이 시정되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무혈금도 내려왔다. 그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 사진을 만지며 흐느껴 울었다. 억울하게 돌아간 아버지의 원한을 하소연 할 곳이 없어 하늘도 무심하다며 늘 괴로워하시던 어머니였다.  다음날 어머니는 시내로 가서 공부하는 막내에게 테블상이며 라디오며 사발시계며 탁상 등 그리고 여러 가지 학용품들을 가득 싣고 오셨다. 막내만이라도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어머님의 굳은 결의였다.허나 정작 대학가는 날 어머니는 많이 슬퍼하셨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출세가도라지만 막내까지 떠나보내야 하는 상실의 아픔이었을까? 명절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잊지 못해 돌아앉으면 눈 굽을 찍던 불쌍한 어머니였다.  막내가 어머니를 시내로 모셔왔다. 이제 그만 농촌생활을 접고 도시문화생활을 즐기라는 효도이기도 했다. 허나 어머니는 두고 온 고향집을 늘 그리워했다. 그 보다도 더한 것은 평생을 지켜오던 당신만의 가마목을 빼앗긴 허탈감이었으리라.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에 걸린 그날 밤 어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보름맞이 양걸 구경에 나섰다. 허나 차가운 발이 주범이었다. 이튿날 어머니는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막내야! 내 새끼 하면서 하얀 미소를 피우던 어머님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임종을 앞두고 어머니 눈가에는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그렇게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눈물을 머금고 머나먼 하늘나라로 가셨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밤은 가고 아침 해가 뜬다. 찬연한 햇살이 창문을 아우르니 배꼽시린 겨울 꽃이 울먹인다. 얼른 카메라를 켰다. 추억이 머문 자리에서 어머니의 처연한 미소를 본다.  아~ 성에 꽃 어머니 꽃야속한운명 앞에하얗게부푸는 넋 매서운칼바람에더더욱야무진 꽃하지만따스한 정에울고 가는 꽃이여 2017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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