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철 프로필

길림성 서란시 자경툰 출생. 현재 경기도 기흥시 신갈동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1990~1992년 북경무장경찰2002~2007년 대련 외국어강사. 단편소설 '1987년 귀향길(처녀작)', '눈은 올해도 내린다'. '사랑꽃 한 묶음', '신병련 에피소드' 등 발표

 

[서울=동북아신문]꽃샘추위를 예고하는 듯 새벽에 눈이 내렸다. 일상에 쫓기어 잃어버렸던 감동들을 하나둘 주어담으며 난 향천이 마중에 나섰다

 2002년 내가 대련외국어 학원에서 한국어강사를 하고 있을 무렵 이였다. 수업 중에 걸려온 전화라 몇 번이나 거절을 눌렀지만 끄면 또 걸려왔다. 이명철 선생님이죠? 바쁘시더라도 조금만 시간 내어주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혹시 초중 다닐 때 같은 반 김향연이란 사람 기억하고 계셔요?  김향연이라는 이름을 되 뇌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초중추억을 뒤적여 보았다.김향연, 네언니 말로는 초중 일학년 때 같은 3반을 다녔다고 하던데요, 집은 유가툰이고요, 기억나세요?네. 알고 있어요.차츰 전화에서 대방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변해갔다. 자초지중을 듣고서야 나는 지금 나한테 전화하는 사람이 김향연의 여동생인 김향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와 같이 1학년 3반을 다니었던 김향연이가 폐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였다. 언니가 선생님을 많이 보고 싶어 해요. 무리한 요구인줄 알지만 한번 와주실거죠? 부탁드립니다.전화를 끝내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창밖에는 또다시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공항에 티켓 현황을 알아보니 다행히 저녁 8시 40분 북경행으로 좌석이 하나 남아있었다 일단 학원 쪽에 이틀간 청가를 하고 옷가지 몇 개만 트렁크에 챙긴 채 비행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넉넉히 남아 있음에도 도저히 다른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983년 9월부터 나와 향연이는 한반에 다녔다. 13살 나이였으니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 때였다.머리를 길게 길러 양쪽으로 꽈리를 따고 국방초록색 솜옷에 빨간 목도리, 검정색 바지에 두툼한 솜신, 이런 옷차림을 한 13세 소녀로만 향연이가 내 기억의 액자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해 겨울방학을 끝나고 향연이는 다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어느 하루 조선어문시간이었다.오늘은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작문 한편 써 볼게요. 아버지 하면 젤 먼저 떠오르는 게 뭐예요?어문선생님의 미소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신이 난 학생들이 중구난방 대답하기 시작했다.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어떻게 우리를 아끼고 사랑해주고 있다는 것을 상세히 적을수록 좋아요.선생님의 상냥한 말소리가 오늘따라 어쩐지 송곳처럼 어린 내 가슴을 후볐다.어쩌지? 난 아버지가 없는데 모두가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는데 나만 없다는 서러움, 그 서러움이 점점 창피함으로 변해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없어도 있는 척 쓰면 안 되는걸까? 화끈거리는 얼굴을 싸쥐고 깨알같이 박아 써내려 가는 반 친구들을 부러운 눈길로 훔쳐보던 와중에도 난 왼쪽 줄 뒷 책상에 앉은 향연이가 책상에 엎드려 쿨쩍거리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난 향연이가 나처럼 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였다. 어쩌면 이런 동병상련의 아픔이 어린 두마음을 가까워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후 나와 향연이는 종종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을 함께 다니고 집이야기도 서로 하게 되였다. 가끔 향연은 한동네 친구들 몰래 신문지에 싼 고구마를 내 가방에 넣어주곤 했다. 책가방을 열고 책을 꺼낼 때면 풍겨 나오는 삶은 고구마의 구수한 향기가 지금도 코밑을 감도는 듯 했다. 겨울 방학 전 날,향연이는 나에게 만년필 하나 선물했다.두 달 용돈 모아 산거야, 넌 꼭 잘 될 거야, 힘내.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향연인 그때 벌써 학교를 그만 둘 생각을 한 듯싶었다.스케이트타기와 눈사람.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겨울방학이 다 지나가고, 개학날이 왔지만 향연이는 학교로 나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기다리다가 차츰 기다림도 시들고 혼자 무언가 잃은 듯 허전한 마음으로 초중1학년3반 후 학기 생활을 마쳤다. 그렇게 연락이 두절됐으니 손꼽아 헤어보면 18년이 지나 향연의 소식을 듣는 셈이다. 그런데 향연이가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니?!  택시를 타고 외4환에 있는 인민병원으로 향하면서 향천인 나에게 어렵사리 부탁을 했다.언니는 저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정신질환을 앓아 언니가 저를 돌볼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제가 6살 이었으니…지금 언니의 병세가 너무나 좋지 않아요. 쇠약해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말씀을 많이 해줬으면 해요. 그리고 안아주세요. 언니가 기뻐할 거예요.향천이가 가방에서 빨간색 작은 벨벳 함을 꺼냈다. 반지였다.평생소원이었어요.  택시 안에서 얼핏얼핏 스쳐지나가는 북경의 밤거리는 아름다웠다. 오색찬란한 네온등들이 주위를 환락의 세계로 장식하고 있었고 총총히 박힌 별들이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듯 끝없이 뻗어간 길 양옆으로 빤짝거렸다. 추위 속에 자신들의 일상에 쫓겨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어릴 때 추억은 그처럼 아름다웠고 나는 18년이란 세월을 낯선 곳에서 엉뚱한 말을 하며 저 사람들 중의 어느 하나가 되어 그렇게 살아왔다.  향천이의 뒤를 따라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향연이 침대를 살펴 보고나서 향천이는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나직한 말했다. 자고 있어요.  암이라는 말은 많이 듣긴 했어도 암환자를 눈앞에 두고 보는 건 처음이었다.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숱이 많이 빠지긴 했으나 모습은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향천이의 말을 듣고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한 탓인지 의외로 향연이의 얼굴은 건강해보였다. 핏 끼는 좀 빠졌으나 아직까지 윤기 돌고 있는 피부, 힘찬 숨소리와 저 탄력 있는 두 입술을 보고 있으니 망정이지 모르는 사람은 누가 그녀를 폐암환자라 믿겠는가. 마음이 슬퍼졌다. 향연이 자신도 알고 있는 상황이라 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 질수밖에, 사형선고를 받고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는 향연이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문뜩 나 자신이 초능력자가 되어 향연이를 구해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도 했다.향연이가 눈을 떴다. 나를 보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오느라고 힘들었지? 미안해… …방금 꿈을 꿨는데 잔디밭에서 한사람이 뭘 열심히 하고 있었어. 가까이 가보니 손으로 잔디밭을 막 파고 있는 거야, 내가 뭐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우물을 판대, 아무 도구 없이 우물 판다는 게 말이나 돼? 이렇게 파다가 언제 다 파겠느냐고 물었더니 내일도 파고 모레도 파고 계속 파다 나면 물이 나온다나.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이 너 아니겠니, 이명철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하고 물었더니 이제부터 여기서 집 짓고 우물 파고 산다나, 내가 피가 나는 너 손가락이 너무 안쓰러워 집에 가 삽을 가지고 오니 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막 울다가 눈 뜨고 보니 네가 내앞에 앉아있네 흐흐 갑자기 목이 메여와 대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개꿈이네 하하한참 후에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다시 쓰리고 아팠다. 우물도 파고 비행기 타고 오느라 힘들었겠다. 밥은 먹었어?어, 향천이랑 밖에서 먹고 왔어, 너도 식사해야지.아니 아니, 난 괜찮아. 그냥 너무 좋다.향연이가 하얀 손을 내밀었다. 향연의 웃음이 찰랑대는 눈을 들여다보며 살도 없이 마른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손이 참 따뜻해. 그녀가 꿈속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이 참 이상해, 짧았지만 같이했던 시간들이 잊혀 지지가 않아, 너무나도 멋진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아서 지워지지가 않나봐. 학교를 중퇴하고 나서도 너 소식에만 귀를 귀 울렸지, 고1때 너 신문에 소설 한편 발표했어, 글은 너가 써 발표했는데 괜히 내가 행복 해지는 거 있지, 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일이 너에게 만년필 선물 한 것이야, 혹시 내가 사준 만년필로 네가 그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보면서 행복했고 기뻤어, 너 참 기억나 내가 만년필 사 준거?그럼, 왜 생각 안 나겠어. 고구마도 많이 얻어먹고…맞어, 며칠 전 고구마가 먹고 싶어 향천이를 시켜 사왔는데 옛날 맛이 안나.문뜩 향천이의 부탁이 떠올라 내가 말했다.이젠 내가 이야기할 테니 향연인 듣고만 있어.왜? 내 체력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나 안 죽어, 내 몸 내가 알거든.아니야. 나도 얘기할 시간 좀 주라. 너 말처럼 넌 강해. 죽기는 누가 죽어. 웃기는 소리.나는 손안에서 옴지락거리는 향연의 손을 또 한 번 꼭 잡았다.세상엔 기적이라는 게 많아, 50년 넘은 봉사할매가 지렁이 잡아먹고 눈떴다는 얘기 못 들어봤어?나도 그랬으면 좋겠다.향연이가 호호 했다 일단 내가 하던 이야기마저 하고 네가 하기로 하자, 고중 2학년 때 네가 길림 조중으로 전학해가면서부터 너 소식이 끊겼어, 몇몇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모른대, 그때가 88년도이지, 89년도에 나도 고향을 떠나 심양서탑 주위 식당에서 3년간 일했어, 91년도에 뜻밖에 너의 소식을 또 듣게 되었어, 누군가가 신문에서 네가 쓴 글을 봤다는 거지, 같은 이름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 이였지만 난 너가 쓴 것이라 확신했어, 향천이가 내가 부탁한 너의 글을 찾느라 고생 좀 했지 내 가슴을 다시 한 번 뭉클 울린 것은 향연이가 내 앞에 펼쳐놓은, 나로서도 챙겨놓지 못했던 내 두편 의 단편소설 자료를 보고나서였다. 발표 된지 10년이 넘은 신문에 난 내 단편소설을 향연이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챙기듯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여기 정향이라는 여자애는 실제 있는 사람이가? 소설에 쓴 대로 그런 일이 너한테 발생했었나?아니, 소설은 허구를 허용한다고 했잖아.아. 그럼 다 상상으로 지어낸 얘기가?다 그런 건 아니고 조금은 진실도 있어이게 요점인거 같아, 그저 차원이 틀리다 라는 말 밖에, 타고 난거가?얼마나 유명한 작가들이 많은데, 내가 건방지게 이런 거다 저런 거다 단마디로 결론 내릴 수는 없어, 나 같은 경우는 글 쓰는 게 바둑 두는 거랑 비슷해, 이 한 점을 여기에 두었을 때 벌어지는 상황, 저기에 두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이 모두가 다르 거던, 혼자 막 상상해보는 거야, 어떤 때에는 혼자 상상한 이야기에 감동 먹어갔고 울기도 하고. 향연이가 기침을 깇었다. 향천이가 다가가 언니를 부축해 반쯤 일으켰다.마음이 아팠다. 기침이 멎자 향연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재밋다. 그렇구나. 너 금방 뼈만 있으면 살붙이기가 쉽다고 그랬지. 난 뼈는 한 가득인데 와 살 붙이기가 이케 힘들지? 할 이야기가 많은 거 같아서 필을 들어보면 고작해야 일기장에 두 장. 그리고 이야기도 땡, 끝. 어느새 마른 일기로 변해버리려. 그러니 이 세상은 거짓이 필요하다 그래, 필연이겠지 드라마나 소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럼에도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적 않지. 그것은 숙명감 있는 작가가 인생공부를 끝내고 지어낸 아름다운 거짓말이라고 이해하면 돼.네 말 듣고 있으니 정말 너무 좋다. 가방끈이 짧아서 그런지 난 책 쓰는 사람 제일 존경해.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그랬잖아. 아직까지도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며 하늘 허공을 지켜주고 있었다 3월의 초봄날씨였지만 그날따라 푸근했다.  견우직녀의 전설을 보면 칠석날 저녁에 비가 오면 기쁨의 눈물이요, 동틀무렵 비가 오면 슬픔의 눈물이라 적혀 있는데 내가 죽으면 빛으로 변하여 그들 둘 다리 놓아줄 거야, 일 년에 한번밖에 못 만나는 거 너무 불쌍하잖아, 그런데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빛으로 변하나? 향연이의 물음에 난 대답대신 향천이가 나에게 준 반지를 꺼내들었다.모르겠다, 너한테 맞는지?홍조를 띤 향연이가 새각시 마냥 고개를 살풋이 숙였다.딱 맞네요! 몇 번이고 향연이가 내 앞에서 손바닥을 엎었다 뒤집었다. 맘에 들어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향연의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댔다.야들야들한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향연인 입을 맞추다말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없이 울었다.향연이 나랑 약속해 아무리 힘들고 지겨워도 혼자 훌쩍 떠나기는 없는기다 둘이 서로 힘이 되주면 살만도 해, 모두가 저 하늘나라로 가야 하는 때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꼭 버텨야 되. 알겠지? 엎드려 울던 향연이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ㅎㅎㅎ 어렸을 적 아빠가 토끼와 거부기 이야기 해주시던 생각이 나네. 책에는 토끼가 교만해서 자다가 거부기에게 진걸로 되어 있는데 그때 아빠는 자꾸만 거부기가 잤다고 예기하시잖아.  별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꽤나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왔다.아빠가 자꾸 날 부르시나 봐요. 토까와 거부기 이야기 제대로 고쳐서 나한테 들려주시려나봐.향연이 나의 손을 꼭 잡고 눈물어린 두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세상이 좀 불공평해도 난 저 세상에 가면 김향연 인간세상의 소풍은 즐거웠다고적을거야. 너를 만나서…  향연인 내가 떠나온 지 일주일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당시 나는 그 소식을 알지 못했다. 두 달쯤 지나 소식을 듣고 그날 일기를 찾아보니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2002년 3월 23일 화요일 날씨:전국 흐리고 비. 동북 개별지역은 번개와 천둥이 동반하는 곳도 있음. 2008년 내가 처음 한국 와서 동참모임 때 향연이에 대해 말이 오간 적이 있었다.야야 우리 반에 있던 향연이 죽었데.향연이가 누군데?보가툰인가 유가툰인가 김향연이라는 애 하나 있었어.아~그 아버지 없는 애 말이지?어, 어,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죽고 엄마는 정신이 좀 이상하잖아?근데 왜 죽었대? 자살이가?자살은 무슨 자살, 무슨 암에 걸려서 죽었다는데 딱히는 모르겠고…근데 시집은 갔었나? 애는 있었고?몰라, 거기까진 나도 모르지.이러한 말들이 오갈 즈음 나는 말없이 술잔을 놓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비오는 날이면 술 한 잔 마시며 향연이랑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빈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여기 비오는 데 거기도 비와? 날씨가 쌀쌀해 졌어.옷 좀 많이 입고 다녀.감기 조심하고…그리고전번에 너한테 끼워줬던 반지는 딴 애가 산거야 미안!담에 너 만나러 갈 때는꼭 내 손으로 사갈게…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