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수 전 용정시조선민족민속발물관 관장, 수필, 인물전기 수십편 발표.
[서울=동북아신문]쉴줄도 멈출줄도 모르는 야속한 시간이 살같이 흘러  내가 정든 고향을 떠나 한국이라는 산설고 낯선 고국타향에서 사면팔방으로 전전긍긍하면서 말못할 고독과 초조감,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 처절한 시련과 실패를 이겨내고  가슴터질 것같은 성공과 희열을 맛보고 세상살이의 치렬함과 무상함을 감내하고 느끼기까지 장장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오직 생계를 위한 따분하고 고단한 일상에 지친 여가에도 항상 잊지않고 가슴에  담아두고 눈앞에 그려보던 모습은 그토록  다정다감하고 친절했던 외가집식구들의 초상과도 같은 얼굴들이었다. 

 귀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린 이튿날로 나는 외가집마을로 찾아 나섰다. 아흔아홉굽이 오랑캐령을 지나서 앞으로는 겨울두만강이 꽁꽁 얼어붙고 뒤로는 웅기중기 천불지산이 치마폭을 내린 마을에 들어서서 외가집터를 찾은 나는 그만 그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20년만에 찾은 외가집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살풍경이였다. 살구나무,오얏나무 춤을 추던 마당에는 키를 넘는 마른 쑥대가 우거졌고 바람에 삐걱이는 찌그러지고 마사진 창문과 대들보가 썩어 내려앉은 집은 마치도 폭격을 당한것처럼 구슬프고 처량하였다.

66년 말띠생으로 내가 태여났을때 이미 나의 친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가 않았다. 그런 연고였는지 어린 시절 눈만 뜨면 먼저 달려가고 픈 곳이 바로 외가집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수 있는 외가집이였다.

내가 세상을 알아서는 외가집에는 외할아버지 내외 둘, 외숙부네 식구 다섯, 두 이모까지 모두 아홉식구였는데 거기에 나까지 합세하면 10명이였다.

열사람의 하루 세끼를 장만하고 차리고 뒤치닥질까지는 전부 어김없이 외숙모의 몫이었다. 어리숙하고 마음씨 고운 외숙모는 한끼도 거루미없이 작은 개다리소반에 밥과 반찬을 정이 차려서는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웃방으로 올려갔다. 물론 밥도 국도 찬도 수된 것이었다. 식사때면 외할아버지가 나를 불러 나는 늘 할아버지와 둘이 단독으로 웃방에서 밥을 먹군 하였다. 그통에 나는 늘 외사촌들의 악의 없는 시샘과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의 어린 마음에도 생심새는 비록 수수해도 노인을 깎듯이 공경하는 외숙모가 돋보였고 더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나에게는 외삼촌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본 기억이 없다.  외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나의 외삼촌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인물이 부리부리하게 잘나고 성질이 시원시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깊은 겨울밤에 아래마을로 마실을 다녀오다가 야생승냥이를 만나 승냥이에게 물리웠다고 한다. 그때만해도 두메산골이라 약도 의원도 없고 이빨자국이 깊은 상처에선 피가흐르고 속수무책으로 안절부절 어쩔줄 모르는데 누군가 상처에 된장을 바른다고 하기에 그대로 하였는데 외삼촌은 그대로 세상을 떳다고 한다.

그때 외삼촌 나이 20살. 후에 밟혀진 일이지만 그것은 승냥이가 아니라 조선전쟁이 끝나면서 사처로 뛰여난 미친 세빠트였다고 한다. 외삼촌뿐만아니라 린근 동네의 여러 사람들이 그놈 미친개의 봉변을 당했는데 구정부에서 사냥군을 동원해서 그놈을 없애버려서야 소동이 멈췄다고 한다.

밀양박씨인 외할아버지는 너무나도 인자하시고 너그럽고 마음씨가 착하디착한 분으로서 무슨 일이나 말없이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 주군 했다. 나는 한번도 외할버지가 성내거나 화를 내시는것을 본적이 없다. 반면 외할머니는 성격이 칼같고 시비도리가 명백하고 세상리치에 밝으신분이셨다. 따라서 가정의 크고작은 일은 대체로 외할머니의 주관과 의도로 이루워졌다. 그만큼 외가집은 화목하기로 인근에 정평이 나 있었다.

유식했던 외할아버지는 천간과 지지로 이루어진 육십갑자거나 음양오행설이며 8괘에 대해서 얼음우에 표주박 밀듯 얘기하셨다. 그탓인지 동네 여러가지 택일이거나 갓난아이들 작명은 모두 할아버지의 몫이였다.외할아버지는 이야기도 곧잘 하셨다. 휘영청 둥근달빛아래 말리운 타래쑥으로 피운 모기불가에 오구작작 멍석을 깔고 모여앉아 구운 옥수수이삭을 뜯으며 외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렵기적인 수호지나 이성계장군의 이야기에 폭 빠져 밤새는 줄 모르군 했다.

나의 외가집도 생활형편이 여느집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넉넉한편이 아니였다.
잠을 자려고 누워쳐다보니 종이로 도배를 한 구멍이 펑 뚤린 천정이 마치도 괴물의 입처럼 무섭게 보였다. 발치에서는 고양이가 내 이불자락에 기여들어 가릉가릉 잠자고 있었다.

한밤중이나 되였을가 잠결에 무엇인가 내 몸우에 툭 하고 떨어지는 감각에 화닥닥 놀라 깨나 불을 켰다.순간 나는 깜짝 놀라 소리 쳤다.밤도적 쥐란놈이 천정구멍으로 추락한것이였다. 다른 식구들도 놀라서 어리벙벙해하는데 내 이불속에서 잠자고 있던 고양이가 어느새 날렵하게 뛰여일어나 쥐를 물어 태를 쳤다. 그리고는 으르릉 거리며 쥐를 물고 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잠자기전에 늘 발치에서 자고있던 고양이를 안아다가 머리맡에 놓고 머리를 쓰다듬다 잠들군 하였다.

어느 해 여름철 그날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웃방에서 잠을 잤다. 한밤중에 무엇인가가 자꾸 몸을 무는것 같아 불을 켜고보니 숱한 빈대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빈대란 놈은 환할때는 죽은듯이 벽틈새 아니면 나무짬속에 얌전히 잠자코 있다가 일단 불만 끄면 기지개를 켜고 공격을 개시하군 하였다.

당시를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때는 빈대와 이가 많았다.저녁이면 어른아이할것없이 옷을 벗고 한참씩 이잡이를 하군 하였는데 그 방법도 각양각색이였다.옷혼솔기를 따라가면서 두엄지 손톱으로 이를 비벼죽이기도 하고 이를 잡아 화로에 떠놓은 불속에 집어 넣기도 하였고 겨울철에는 아예 옷을 벗어 밖에 내다 걸어놓고 이를 얼궈서 죽이기도 하였다.

내가 빈대때문에 잠을 못자는것을 보시던 외할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생콩잎을 둬웅큼 뜯어들도 오셨다.그리고는 내가 이불을 펴고 누운 주위에 한벌로 쭉 펴주면서 이제는 무사히 잘것이라며 불을 껏다. 그렇게 한참을 있어봐도 아까처럼 빈대가 무는 기척이 없었다.웬 일일가? 나는 궁금하고 호기심이 동해 다시 불을 켜고 살펴보았다. 원래는 마치도 땅크처럼 포복전진하던 빈대란놈들이 꺼슬꺼슬한 콩잎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등대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신기하여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나의 외숙부는 순박하고 근면한 농사군으로서 황연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담배모종심기로 부터 시작하여 기음매기, 순따기, 달대매기, 건조불 보기,담배조례까지 어느 것 하나 외숙부의 부지런한 손끝이 닿지않은것이 없었다. 한가한 겨울철 남들은 매일 마작판이나 술판에서 흥청일때 외숙부는 허리에 도끼를 차고 둥글소를 앞세우고는 눈덮힌 산판으로 들어가 때나무를 하지않으면 목재부업을 하였다. 제자식 셋을 낳아 공부를 시키고 거기다가 우로는 부모님들께 효도하고 아래로는 두녀동생들을 거느리고 시집까지 보내준 외숙부와 외숙모의 고생과 노력과 분투가 얼마였고 말못할 고충인들 얼마였을가? 지금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로인을 공경하는것을 자신의 숙명과 천직으로 달게 알아왔던 마음씨 고운 외숙모 덕에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만년을 뜨뜻한 아래목에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보내시다 80수를 누리고 세상을 떴다. 외할머니는 림종을 앞두고 제아들을 제쳐놓고 외숙모의 손을 꼭 쥐시고 자네 덕분에 박씨가문이 행복했노라고 래세에도 부디 며느리로 되여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오늘날 로인들 양로문제가 나 자신과 매 가정 지어는 전사회적인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때 그들의 헌신 정신과 효도정신은 귀감이 아닐수 없다.

허리춤에서 꼬깃꼬깃 접은 50전짜리 돈을 남몰래 내손에 쥐여주시던 외할머니, 그토록 갖고팟던 파란 고무신을 신겨주던 외숙모,일밭에서 돌아올때마다 잘 여문 개암이나 빨갇케 익은 산딸기를 따다 입에 넣어주던 정 많은 이모들 모든것이 세월이 가면갈수록 잊혀지지 않고 더욱더 선명하게 기억의 바다에 메모되여가고 있다.

한족집에서 터치우는 요란한 폭죽소리가 나를 깨웠다.어느새 부실부실 함박눈이 초라하고 음산한 외가집터와 나의  온몸에  펑펑 내려쌓인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불러도 대답없고 부른다고 올이도 없는 엄연한 현실,때늦은 효도 한번조차도 할수없는 이 안타까움과 후회, 오직 돈에 대한 집착과 밑창없는 욕심에 젖어 항상 바쁘다는 핑게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던 지나온 나날들에 대한 회의감과 자책,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게된 모든것에 대한 소중함, 새농촌 건설에 대한  비젼과 희망이 서로 엇갈리고 뒤반죽되면서 있을때 잘해야한다는 십팔번을 외가집 터전에 삼가 바친다.

있을때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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