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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향숙 프로필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작가협회 회원. 길림신문 수필문학상 , 흑룡강신문 수필문학상 등 수상 다수. 소설,수필 등 다수 발표.

[서울=동북아신문]가던 길을 멈추고 나는 쉰고개 산등성이에 앉아 땀을 들이며 잠간 숨 을 돌리고 있습니다. 어디쯤 왔는지? 앞으로 나가야 할 미지도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 왔는지 이미 걸어온 길도 어슴푸레 합니다.

돌이켜보면 엄마, 아빠의 애지중지 보배딸로 살아온 나날들은 하얀 추억으로 내 가슴속 한곳에 액자처럼 걸려있습니다. 그후 엄마의 이름으로 살아온 나날들은 백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두주먹 부르쥐고 앞만 보며 달려 왔네요. 이제야 한숨 돌리며 살펴보니 나는 어느새 인생의 저녁노을이 빨 갛게 불타오르는 황혼의 쉰고개마루에 걸터 앉았네요.

얼마나 분주히 헤매돌아치며 살아왔는지 그동안 보이지 않던 길녘의 이름모를 꽃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누가 쳐다봐 주지 않아도 화사하게 웃으며 핀 길가의 들꽃을 들여다 보면 서 들꽃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여유를 가져 봅니다.

어쩐지 저에게는 세찬 들바람속에서도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 웃음 밑 바닥에 얼음처럼 서걱거리는 외로움과 슬픔이 안겨옵니다. 뒤돌아 앉아 울 먹이며 몰래 흰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있는 현숙한 여인의 뒤모습도 안겨 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한점 두점의 꽃잎들은 들꽃여인의 보드랍던 살결 같고 청춘같아 나는 마음이 아릿해 납니다. 길손들은 아무 생각없이 그 땅 에 떨어진 꽃잎들을 즈려밟고 지나갑니다. 내 귀에는 분명 들꽃여인의 신 음소리가 들리는데도 말입니다. 무정한 세월도 그 길손들처럼 수많은 들꽃 여인들이 세파에 모대기다 땅에 떨어뜨린 꽃잎들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 게 밟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함이 가슴 깊이 뿌리내린 가녀린 여인은 흰 옷고름으로 입 을 막고 아픈소리마저 죽이고 묵묵히 까맣게 씨앗을 염글고 있습니다. 그 들꽃여인의 가슴속 까만 씨앗속에서는 어떤 희망이 싹트고 자랄것인지 궁금해 집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내 가슴 깊숙히 간직해온 내사랑 씨앗을 살며시 꺼내 봅니다. 내 가슴을 똑똑 노크하여 쿵쿵 심장을 놀래우던 그 영준한 얼굴과 헤여진지 스물몇해던가? 남들이 끼고있는 금가락지를 발가락에까지 채워주 마 하고 떠나서 어느새 하얀 머리 할아버지로 스마트폰 화상속 할아버지로 만 내곁에 내 식구로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 얻은것은 무엇이고 잃은것 은 무엇이였던가? 씁쓸함이 입안을 감돌고 마음은 허전해 집니다.

돌이켜보면 떠날때는 험난한 인생길에 너 고생하는게 아까와서 얼른 돈벌어다 직승비행기 태워 호강시켜 준다며 호언장담하고 떠난 사람입니 다. 그가 떠난 시간을 꼭 짚어보면 스물네해! 그 험난한 인생길을 젖먹이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헤치며 걸어왔습니다.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도 혼자서 이를 악물고 기여 올라왔고 으르렁 대는 짐승소리에도 머리카락이 곤두섰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용맹을 찾았고 외 롭고 무서움에 떨며 몰래 눈물을 닦으며 지지리 긴 밤길도 엄마라는 이름 으로 버티며 정신없이 걸어왔습니다.

이제야 잠간 어느 한 고개마루에 앉아서 땀을 들이노라니 온 정력을 몰부어 키워왔고 긴긴 시간동안 서로가 기대고 의지했던 내 품안의 자식도 이젠 스물일곱, 어느새 날개가 굳혀진 새가 되여 포르릉 내 품을 날아나 버렸습니다. 날개가 억세여져 수리개가 된 내 아들은 어디선가 자기 자리 를 찾아 하늘을 날고있고 나는 모두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고 혹 돌아오 지 않을수도 있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텅빈 보금자리가 되여 있습니다. 집 까지 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될지 기약없이 기다리는 보금자리가 되여 야할지 나의 래일은 기약이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여태 힘들었던 로독을 풀며 오십고개 산등성이에 앉아 잠 간 가던길을 멈추고 쉬고 있는 길손이 되여 있습니다. 남들은 이맘때가 되면 퇴직하여 바늘가는데 실도 따라간다고 남처럼 서먹서먹해진 남편곁 으로 바다를 건너갑니다. 떠날때의 맹세는 같았는지 아니면 달랐는지 알수 없지만 또 가서도 함께 하는 부부도 있고 헤여지는 부부도 있고 다 다르게 살고들 있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류동 늙은이로 되여 때묻은 고향을 버리 고 낯설고 물이 선 딸집으로 아들집으로 애보러 떠돌아 다닙니다. 아파트 속에 갇혀 더없이 외롭고 답답하다 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인생의 전부여 서 꼬부라진 할배, 할매로 되여서도 그 진빠진 마른 나무같은 등짝에 부모 사명을 짐짝처럼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들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시각도 다 어떤 시작이고 또한 어떤 끝이 될수 있으니까요. 나는 다시 그들 꽃여인 품속에는 어떤 희망을 품은 씨앗이 들어 앉았을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다가 풀려진 운동화의 신끈도 동여맵니다. 희끗희끗해진 귀밑 머리의 땀방울을 바람에 식힙니다. 남들이 부지런히 걷고 있는 걸음소리 를 들으면서도 모르는척 못 들은척 눈을 감고 쉬고 있습니다. 코를 벌름 거리며 때묻지 않은 신선한 공기를 느껴보기도 하면서 두주먹 부르쥐고 달려오느라 까맣게 잊었던 오늘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삣쬬롱,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노래처럼 아름답게 들려옵니다. 포르 릉 날아가는 산새를 바라보며 외롭다고 생각했던 시각을 바꾸어 삶의 률동 을 느껴봅니다. 오늘은 바람도 신선하고 해빛도 찬연하고 풀잎도 정겹게 살그랑거립니다.

처음으로 나만의 시간과 나만의 여유를 가져봅니다. 처음으로 자기를 느껴보고 들여다 봅니다. 내일과 어제는 산아래에 내려놓고 오늘만을 내옆 에 놓고 매 한시각의 소중함을 눈 감고 느끼며 음미해 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쉼표가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쉼표가 없으면 소음이라 했습니다. 내 인생도 아름다 운 음악이 되려면 쉼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월의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고 시대의 흐름은 어느 일개인이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년의 웃음소리가 아침 이슬처럼 뒹구는 이땅의 한 고개마루에 펑퍼짐한 엥뎅이를 척 붙이고 퍼더버리고 앉아 쉬고 있습니다. 인적기 없 이 쓸쓸한 들판에 후드득 어디론가 날아가는 산새를 바라보면서 지금은 남의 집처럼 되여버린 고향땅에서 조선말이 아닌 한족말이 메아리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서 벼 그루턱이 촘촘한 논밭에 벼단을 깔고 한집식구 모 여앉아 사과배를 깎아먹던 옛행복을 주어들고 그 먼지낀 행복의 진주알을 반짝이게 닦아봅니다. 자꾸 무너져가는 우리민족 학교의 아픔을 안고 여기 저기 세방살이로 떠돌이 삶을 살면서도 학생들이 랑랑한 글소리가 좋아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함께했던 희노애락의 진주알도 꺼내 반짝 이게  닦아봅니다. 그 한알한알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꿰여 목걸이로 만들 어 내 목에 소중히 걸었습니다.

내가 할수있는 일이 고작 이것뿐인것이 서럽게 느껴집니다. 나도 언젠 가는 남들처럼 세월따라 바람따라 떠돌겠지요. 그러나 오늘은 잠간 오십 고개 산등성이에 앉아서 다리쉼을 하면서 새의 울음소리와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여유있게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를 읊조려 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말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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