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고량주 雪原 문학상 응모작품

소주잔 앞 한 남자

여자 앞에서 그는
강하게 남자다
눈물이 사치보다 더 가증스럽다는 걸
그는, 본능으로 알았다
모가지 드리우고 피흘릴 때
껄껄 웃어야 한다는 것도
배워서 익혔다
위로가 필요하면 스스로를 징벌하는 가혹함
잃지 않았다
당신 원해, 떨리는 목소리의 여자 부르짖음에
멀거니 쳐다본다, 비정한 허공
멈출 줄 모르는 저 바람만이 무상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잘 되질 않는다, 전부 다
소주잔 앞 한 남자
 
2017.01.17
 
 
허물•나비
 
飛翔 위해 빠져 나온다, 나비
침묵으로 지은 집, 번데기
별빛 스미고 이슬 젖은 사연, 실타래에 매우 감겼다
 
햇빛 아래 어깨박죽 펴면, 하늘 펼쳐진다
경계 밖 열린 날, 응집으로 서러웠던 밀도 와락 터진다
이제, 온갖 날개 짓에 원없이 온몸 아픈 건
허락된 자유, 네 허물의 債務다
 
허물 밖을 날아라
 
2017.01.16
 
 
낯선 사람

 
허물없이 지나간 엊저녁이다
아침까지 눈뜨고 있는데
언젠가 낯선 사람, 들어와 있다, 이 작은 방에
기척도 없이 어떻게 와서 저토록 앉아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더는 가까울 수가 없는 극한 거리에서 나를
지켜본다
온통 얼굴로 번진 소금끼, 그리고 응시 상실의 저 바라봄은
탈수 메커니즘에서 추출된 생각 몇 토막
그 분비물이겠다, 아마도
 
많이 생소하다, 하지만
어디서 본적 있은 듯한 사람, 말이 없다
나는
전혀 물어보고 싶지 않다, 누구냐고
언젠가는 나에게
스스로가 누구라고 말할 그때까지 나는 끝내
묻지 않을 것이다
 
2017.01.12
 
 
건널목
 
달이 사라졌다
완전히 지워지던 그날 밤까지
사람들, 분주히 가야 할 곳으로 집결하다
뭉치고 부풀어 오른 인간 떼, 도로의 수런거림
돌아오는 라인 저쪽 편에 누룩처럼 괴다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나는 외웠다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곳으로 나는 간다
가까워 오는 목적지,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성벽 안쪽
도시의 그 어디나 텅텅 비었다, 길이 이토록 넓고 아득한 줄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지금에야 알았다
시골 정적을 닮은 밤하늘에는 하현달과 상현달이 아닌, 보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이 떠있다
그래서 볼 수가 없다
紅黃绿 신호체계가 무의미해진 건널목에서 한해 끄트머리를 개울처럼 건너다
 
2017.01.29
 
 
꽃•여자
 
꽃에 현혹되는 그녀가 한심스럽다고 여겨온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참지 못하고
그게 밥을 먹여주냐고 점잖게, 의젓하게, 그러면서도 자못 무겁고 침통하게
물었다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항의하듯 바라본다
아, 그녀 얼굴이 어쩐지 꽃답다
피어나다 바람에 스친 듯한 모습이다
 
내세에 여자가 되어보세요, 그럼 왜 꽃이 좋은지 혹시 알 수도 있을 테니깐요
그런데 어쩌지, 다음 생이 있다고 아무리 가정해도 그냥 또 사나이이고 싶은 걸
회심의 미소 억누르고 참을성 있게 협상조로 다시 얘기했다
좋아할 권리가 있소, 당신, 여자니까
 
여자가 대든다
당신, 여자를 좋아해요?
어떨결에, 그렇지만 확신이 드는 문제이기에 타이르듯 반문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는 건 아니겠소?
그럼 됐어요, 왜 내가 꽃을 좋아하는지 답안이 나왔구만요
 ... ...
 
철학적 격조로 깊이 있게 생각해보건대, 여자가 꽃이 좋은 건
이유 없다
 
2017.01.08
 
 
라싸

 
큰 바람이 산등성이 핥는 곳
역사를 묻어버린 눈사태 한 자락에서
라마승, 옷깃 나붓기다
퍼렇게 날선 하늘조각
산과 산 사이에 꽉 끼었다
그 無邊의 上方에서
둥근 해 輪回처럼 솟는다, 般若는
붉고도 크다
이윽고 萬年雪 불타는 소리, 울리다
그것은 나지막하게 깔린 저음, 사품치는 흐름
 
옴마니 반메훔 옴마니 반메훔
 
여자는 거기로 갔다
 
2017.02.02
 
 
옛 친구
 
삼십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 친구가
한참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변한 게 없군...하고 그는 안도했다. 나는
그런 친구를 보고 안도했다
 
망명을 택했네. 변할 수 없고, 또 변해서도 안 되는 그 과거 속으로
나를 추방했다네. 추방당하는 내가 추방하는 나를 보고 그럴 순 없다고 설득을 하면서도
그에게 의외로 놀랍게도 감사하고 있었음을 자네가 알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나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네
도피라고 하지 말게나. 망명이라고도 하지 말게나
다만, 나에 대한 배려였을 뿐이네. 생각해보게
그 옛날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데에서 대체 불가의 희열이 유발되지 않는가?
지금의 틈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목에 이르면, 자네 역시 그게 참 다행스럽다고 느껴주는 게 정상이란 말일세. 나처럼 말이야
 
뒷 창문 뛰어넘어 비디오방에 자네와 나를 유폐시킨 후
젊음, 자욱한 담배연기로 태워버리던 정경이 자못 정겹지 않은가? 그때
자네나 나나 모두 어떤 선언처럼 타버렸지
붉게 타던 그 순간에 말이야, 나는 오래된 지금을 미리 예상했지. 내 생각은 적중했어
비디오방 문 열고 나오면, 항상 검다 못해 노랗게 뒤덮인 허공이 외투로 씌워졌다네. 자네에게나 나에게나 딱 맞는 크기로 말이야. 무한히 열린 것 같지만 사실 꽉 조여 오는 그 압박감
지금 느끼는 이 안도감이랑 같은 성질일세. 부정하지 말게나. 자네 눈이, 지금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는걸
 
그와 나 사이에서 김치찌개가 끓고 있다
 
2017.02.13
 
 
우리 동네 사람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원체 말이 없다
말하는 법을 배웠는지에 대해
서로가 묻지 않는다. 말이 빠진 자리, 채운 건
사나운 표정이다. 거친 몸짓도 있다
 
그래도 한마디씩은 신기하게 한다
밥 먹었나?
 
최대한의 의미가 여기에 담겼다
물론, 해석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혹시 안다
차츰 그들은 근엄해져 갔다. 용맹하기도 했다
다 커서 나는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몇십년이 지난 어느날, 금방 헤어졌던 사람처럼 신기하게 우리들은
터무니없이 큰 도시 어느 골목에서 말이 무의미하도록
훌쩍 만났다
 
밥 먹었나?
 
2017.02.12

▲ 전유재 프로필 : 중국 소주 常熟理工学院 外国语学院 朝鲜语专业 교수, 한국 숭실대학교 고전문학 박사졸업,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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