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고량주 설원문학상 응모작품

▲ 이연주 : 본명 이옥화, 2010년 과기대 최고경영자과정 9기 졸업, 2005년 연변여성에 처녀작발표 방송과 잡지에 수차 수상
[서울=동북아신문]늦게 나마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며  성취감에 사로잡혀 온 세상을 독차지한 듯  한창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 뜻하지 않은 호출장이 내려졌다. 늘 외지를  도는 남편이 애 건사를 할 수 없으니 개학에 맞춰 인차 가게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라는 것이다. 십여 년 만에 오붓하게 세 식구 한집에서 살 걸 생각하니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정성을 쏟아 부은 가게를 걷어치우는 것도 아쉽거니와  여직 껏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온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 잘할지, 욱하는 성격 또한 고칠지 무척 고민이 됐다.

그동안 가무일과 가게 일에 숨 막히게 힘들었던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본연의 자아를 찾고 싶었는데 불과 반년도 못가 휴~ 이놈의 팔자!


주위 사람들과 친구들은 세 식구 한집에서 살게 됐다며 축하해주지만 나는 때 묻고 꿈이 있는 이 고장을 막상 떠난다고 하니 집주위의 백양나무 위에서 울어대던 까치마저 얄미워났다. 요즘 가게정리로 손이 꺼칠해지고 밤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하루는 친구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나를 불러냈다. 둘은 북대시장 부근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여러 가지 음식을 특색 있게 한다는 이 가게는 위치가 구석져도 맛으로 승부하는지 꽤나 벅적거렸다.  온바하곤 구석진 자리라도 비집고 앉았다. 추운데 온면을 먹고 가자니 친구는 이 음식점 특색은 냉면이라면서 기어이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개체업을 하면서 제때에 식사를 못하다 보니 위가 나빠진 관계로 찬 음식을 줄곧 거부해왔었다. 허나 친구의 권유를 너무 무시하기도 아닌 같아  냉면도 곁들어 먹어보기로 했다.


먼저 올라온 채소들을 집어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사이 잠깐사이에 냉면 두 그릇이 인차 따라 올랐다. 어지간한 사람의 머리통만큼 큰 유리그릇에 석냥짜리 근들이 술컵 만큼 큰 국자가 나왔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냉면그릇크기와 국자크기는 별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허나 생활이 좋아짐에 따라 음식조합인지 아님  미각, 시각적 감수를  고려해서인지 국수그릇 안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시골에서 보아왔던 덜 익은 포도 알 색깔 같은 암갈색 국수물에 껍질을 홀랑 벗긴 채 하얀 알몸을 드러낸 달걀 하나, 그 밑에 기름기 도는 가무스레한 면발이 옹크리고 있었고, 제철이 아님에도 열대지방의 열기를 담고 온 빨갛게 잘 익은 수박 한 쪼각이 머리댕기처럼 면발 한 쪽 옆에 붙어있었다. 폭삭 순이 잘 죽은 파르스름한 양배추와 고춧가루가 어우러져 또 다른 김치로 입맛을 당기고 있었고 거기에  동동 뜨는 환상적인 완즈(丸子) 세 개, 노랗게 잘 굽혀진 참깨가루가 뱃놀이를 하고 있었으며 빨간 모자를 뒤집어쓴 듯 덧얹은 고춧가루반죽양념이 시식을 재촉하듯 앙증맞게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아, 이게 몇 해만인가? 

젓가락으로 휘ㅡ휘ㅡ 저은 다음 국수물을 한입 가득 들이  삼켰다.
순간, 목구멍으로부터 명치끝까지 쭉 시려나며 온몸의 열기를 밖으로 확 몰아내는 듯싶었다.
위궤양, 위하수로 고생하다보니 더운 날에도 온면을 찾던 내가 오랜만에 냉면을 먹어보니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는 듯싶었다. 국수 한 그릇 먹으려면 50전, 그 돈도 아까워 친구하고 절반씩 갈라달라고 아가씨하고 사정해서 국수물 밑굽까지 다 들이켜던 초중시절, 그땐 국수가 세상 별맛이었다. 허나 지금은 풍요로운 현실에 만족을 모르고 대부분 끼니마다 무얼 먹으면 맛있겠는가, 고민인 것 같다. 오늘따라 잊고 살았던  냉면 맛을 혀끝으로 음미하노라니 어느 새  지나간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왠지 서글퍼진다.

내가 살던 고향은 석탄이 많이 나는 두메산골이었다. 여기저기 새벽닭이 해님을 깨울 때면 엄마는 눈이 뒤섞인 콩깍지를 안아다 밥 지으신다. 어둠을 쫓으며 아버지는 개털 모자를 푹 눌러쓰고 탄갱의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사면팔방을 봐도 꽉  막힌 산밖에 없는 이곳을 어떻게 하면 탈출할 것인가 하는 것이 대학시험에서 낙방된 후의 제일 큰 고민이었다. 25살까지 쭉 농촌에서 땅과 동무하며  살다보니 나는 완전 촌닭이었다. 연길이라는 시가지에 와서 파마기술을 더 익히고 눌러앉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머리방에서 주는 학도공 150원되는 공자로는 세집 값이랑 내고나면 근본 어림도 없었다. 도시에서 아침에 해님도 머리 내밀기전에 어둠을 타며 소리치는 두부장사의 소리마저  귀맛 당겼는데 정작 떠나자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두 달 시내공기 마셔보고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누구의 배웅도 없이  다시 시골로 내려갔었다.

그 후 인연이 되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시교에 있는 셋집을 신혼 방으로 잡았었다. 양가집 경제형편이 모두 어렵고 또 금방 시집오다보니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던 나는 마침 한동네 유치원에서 교양원 한명을 초빙한다하니 면접을 보게 되였다. 이튿날부터 인차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큰 벼슬이나 한 듯싶었다.  한 달가량 지나자 마침 6.1절을 맞이하게 되였다. 원장님은 나 보구 이튿날에 시에서 조직하는 강습반에  학습하러 가잔다. 처음 명분이 있게 학습하러 간다니 마음은 붕ㅡ떠있었다. 빨간 중절모에 시집올 때 비싸게 사입고 온 옷을 받쳐 입고 나서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말이 학습이지 나한테 공부보다는  사람 구경하는 것이 더 관심사였다.
두어 시간이 지나니 회의는 끝났다. 원장님은 더운 날에 왔다가 식당에 들려 시원한 국수나 먹고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못이기는 척하며 식당으로 따라 들어갔다. 둥그런 상을 열개 정도 놓았는데 꽤 널찍했다. 점심이 좀 일찍 해서인지  손님 몇 분이 모여앉아 낙화생을 앞에 놓고 발라먹으며 한담을 했었다. 처음 사람대접 받는 듯한 기분에 초점을 어디에 둘지 나오는 실웃음을 참으며 애써 진정했다.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는데 복무원이 냉면 한 그릇 덜러덩 중간에 갖다 놓는 것이었다. 세수대야만한 유리그릇에 상점에서 근들이 술을 팔 때 쓰던 크기의 국자가 놓여있었다. 처음 이렇게 큰 국수그릇을 받아 안은 나는 이걸 먹으라는 것인지 구경하라는 것인지 통 알 수 없었다. 젠장, 시내사람들이 인색하다더니 진짜 인색하구나! 아무리 그릇이 커도 두 그릇을 시켜야지. 그나저나 국자 하나로 어떻게 둘이 먹는단 말인가? 나는 금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 빨리 먹소. 다 퍼지겠네."
(진짜, 못살겠네. 밥도 아니고 국수를 어찌 둘이 나눠먹는단 말인가?)
원장선생님은 내 앞에 국수그릇을 쑥 밀어놓았다. 나는 다시 원장님 앞에 쑥 밀어놓았다.
"원장님이 먼저 드세요. 절반 자시고 저한테 넘겨주세요." 
"인츰 또 한 사발 나오겠는데 머, 아침도 안 먹었다던 게 빨리 먼저 먹소."
"두 사발 시켰슴까?"
"둘이 온 게 두 사발 시키지 않고 한사발만 시켰겠소? 나는 구경만 하라오?"
"아니…그게 아니라…"
"한 사발을 둘이 나눠 먹는가 해서 먹지 않고 양보하느라 그랬겠구만, 허허."
"국수사발이 넘 대자라……나는 그만…"
나의 말에 원장님은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국수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이렇게 창피해보긴 처음이었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고 육수물만 꿀꺽꿀꺽 들이켜고 말았다.

아, 지금 생각해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때는 참 어리석고 유치했던 나였던 거 같다. 세상과 부딪칠 기회마저 없었던 나였으니 소외된 생각을 하는 건 이상할 것 없었다. 항상 남을 내 눈높이로 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우선 소통이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래서 그 누가 인생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발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떠랴. 모르면서도 아는 체, 허영에 들떠 자신을  포장하기보다는 허물투성이라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부족한 면을 채워가고 다듬어 가는 것이 참된 인간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싶다.

오라지 않으면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되는 이 시각, 새로운 환경에서 또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낯선 이국땅에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나의 얼굴이리라. 

그 어디에 가나 고향의 풀 한포기라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 자세로 참답게 부끄럼이 없이 살기에 오늘도 나는 마음의  신들메를 단단히 고쳐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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