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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숙: 중국 룡정시 북안소학교 교사. 수필 <기적은 꼭 일어날거야 > 등 발표. <효원에서 엮어가는 사랑이야기> 제3회 효사랑 글짓기 공모 우수상 수상
[서울=동북아신문]나한테는 비록 남들처럼 고위층간부거나 부자인 남편은 아니지만 항상 부모님께 효도하고 내 아내, 내 아들을 금쪽같이 사랑하는 가정형 남편이 있다.

나와 남편은 20년 전, 한 친척의 소개로 만나 1년간 교제 끝에 결혼했다. 그때 남편은 한 자동차부속품공사의 영업사원으로 활약했었다. 내가 임신 2개월 때 쯤에 출국 붐이 한창인 90년대 초이라, 남편은 사직하고 한국 노무의 길에 올랐었다. 남편이 한국에 체류해있는 기간,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그리움을 견디기 어려워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지금은 그래도 통신이 발달되어 영상통화라도 마음 편히 시간되는 대로 할 수 있지만 그땐 통신도 그렇게 너무 발달하지 않은 때라 그냥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오는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이 담긴 편지가 내 생활의 위안이었고 희망이었고 버팀목이었다.
 
1년 뒤, 우리한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메주덩이 같은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애가 태어나서 5살이 되던 해에 남편은 나와 아들애한테 한국에 유람을 다녀올 걸 요청하면서 비행기 티켓을 끊어왔다. 항상 이 가정을 지켜주며 든든한 아들을 낳아주고 키워주어 고맙다는 답례의 선물이라면서……남편 덕분에 나와 아들은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고 한국의 63빌딩, 코엑스, 어린이 대공원 등등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여행을 하였다.

남들은 선진국가의 이색적인 유혹에 빠져  차표 한 장 끊을 돈이 없어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지만 나의 남편은 이 가정을 위하여 항상 나한테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며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였다. 염색공장과 방직공장, 철물공장에서 남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을 하면서도 언제 한번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귀국 후, 눈에 띄게 수척해진 남편의 얼굴과 두 손에 얼기설기 난 상처자국들을 보노라니 나는 그사이 고생이란 무엇인지도 모르고 곱게만 자란 남편이 이국타향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나도 몰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가정을 위하여, 내 부모 내 가족을 위하여 너무너무 힘든 가시덤불 길을 걸어온 남편이  너무너무 고맙고도 마음 아팠다. 남편은 애타게 벌어온 돈으로 여느 사람들처럼 도심에 널직한  아파트를 사놓고 마작이나 만지면서 술로 허송세월을 한 것이 아니라 노령화 단계에 접어든 사회현실에 입각하여 유서 깊은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에 부지1000평방미터이고 건평이 600평방미터인 효원양로원을 꾸려 열심히 노인들을 모시고 있다.

효도란 말은 하기는 쉽지만 직접 실천에 옮기자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교원가정에서 장손이라고 떠받들리면서 금이야 옥이야 하고 곱게만 자란 남편한테는 양로원경영이 참으로 가시덤불 길을 헤쳐나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늘 자식들의 사랑과 관심도 못받는 데 우리마저 관심해주지 않는다면 양로원에 계시는 노인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여생을 보내겠는가고 말하면서 늘 최선을 다해가고 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참말로 딱 맞는 것 같다. 갖지 않은 가정환경과 갖지 않은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마음을 맞춰주기란 참으로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노인들은 매사마다 자기 위주이다. 애들은 그래도 먹을 것을 주면서 달래면 때론 효과를 보지만 노인들은 한번이라도 어떤 생각에 골인하면 꼭 그것을 고집하기가 일쑤이다. 우리 양로원에는 해방전쟁과 항일전쟁 때에 지원군으로 참가한 후 두 눈이 실명된 이직휴양간부 최모모 할머님이 계셨다. 어려서 양친 부모를 다 잃고 고아가 된 최 모모 할머니는 젊었을 때 찬바람을 맞으면서 남성군인들과 함께 총대를 부여잡고 전선을 넘나들었다. 몸을 차게 군 탓으로 냉병으로 애를 낳을 수 없게 되자 남의 집 애를 두 명이나 입양하여 키웠다. 중년에 접어들어 남편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아들마저 외국에서 의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저세상으로 보내는 아픔을 지니신 불쌍한 노인이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간 딸도 우울증치료를 하다 보니 곁에는 일점 혈육 한 점도 안계셨다. 비운이 그칠 새 없는 생활환경은 할머니를 과묵하게 만들었고 쩍하면 옆의 노인들과 다투기가 일쑤였다. 때론 자기 물건을 몽땅 땅바닥에 팽개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할머니의 처지는 이해하면서 이러는 행동을 하는 할머니를 보니 나는 처음에는 많이 짜증이 났다. 하지만 남편은 오히려 할머니의 푸념을 들어주면서 할머님의 마음을 안착시키기기에 노력하면서 나를 나무랐다. 때론 할머님의 넋두리를 들어주거나 혹여 할머님이 눈물을 흘리실 때면 같이 슬퍼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끔 너스레를 떨어주기도 하였다. 혈압도 매일 재어 드리면서 온정 되지 못하면 안궁환을 대접시키면서 할머니 마음을 안착시킨 후 ”할머님의 마음은 다 이해합니다. 할머님이 이 많은 경로원 중에서 우리경로원에 찾아오셨으니 제가 할머님의 친아들이 되겠습니다.”라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러면서 할머니께 요구되는 점들이 무엇인가고 차근차근 캐여물은 후 수첩에 적어놓고 한 가지 한 가지씩 힘이 닿는 대로  되도록이면 만족을 시켜주려고 하였다. 할머니가 이직휴양간부이지만 수속이 잘 되지 않아서 우대정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은 몇 번이고 시 로간부국과 민정국을 찾아가서 수속도 밟아주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한 주말마다 목욕탕이거나 활동실에 활동하러 가려 하시자 선뜻이 차로 모셔다 드리곤 하였다. 공공장소에서 할머니가 아시는 분들이 인사를 건네면 할머니는 나의 남편을 가리키면서 “내 아들이요”하며 자랑스레 말씀하시곤 하였다. 앞을 못보시는 데다가 거동이 불편하다보니 길에서 한 시간가랑씩 지체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은 오히려 할머님처지가 얼마나 불쌍한가 하면서 정성을 다해왔다.

지난 해 말 할머님은 급성 뇌출혈에 걸려 운신도 바로 못하게 되였다. 병원치료를 받고 어쩔수 없이 림종을 맞이하게 되자 남편은 할머니를 집에 모시고 와서 호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직접 할머님한테 한술 한술 미음을 떠주어 잡숫게 하였다. 자식된 도리로서 말이다. 하여 할머님은 “내가 인생의 마지막 길에 강원장과 같은 좋은 아들을 만나서 즐거웠소, 강 원장은 마음이 착하여 꼭 복을 받을 거요.”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으시면서 자신이 항미원조전쟁에서 따낸 공훈메달을 남편의 손에 쥐어주셨다. 할머님께서 저 세상에서 고통도 없이 앞을 보시면서 아들딸들을 많이 키우시면서 복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어르신들 대부분은 맨날 아프시단다. 하지만 자식들이 보러 와서 어디 아픈 곳이 없는가고 물으면 하나도 안 아프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웃음까지 지어 보이신다. 그러다가도 자식이 떠나간 후 얼마 안 되면 남편을 보고 머리가 아프니 혈압을 재여 달라든가, 다리가 아프니 반창고고약을 달라고 하기 일쑤이다. 하여 내가 보다 못해 “자식들 물어볼 때 제대로 말해야 병원이라도 모시고 가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이 늙은 게 오래 살아 자식들 돈을 쓰는 게 미안해 죽겠는데 아프다고 병원까지 데려다 달라면 그 애들이 힘들어 어떻게 살겠소? 저도 이제 우리 나이 먹어보오.”라고 하시면서 허구픈 웃음까지 지으신다. 참 부모의 마음이란 무엇인지? 노인들의 이런 심리에 대비하여 남편은 양로원에 기본적인 일상약을 갖추어서 가끔 면비로 드시게 하였더니 어르신들마다 너무너무 기뻐하셨다. 때론 이유 없이 큰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욕할 때도 있다. 그때면 남편은 넉살좋게 “나하고 성질부리지 않으면 누구와 성질부리겠습니까? 실컷 욕하쇼.”라고 하거나 “할아버진 정말 정정하십니다. 목소리 높은 걸 보니 문제없이 백세까지 사실 겁니다.”하고 웃음으로 넘기니 어르신들도 마음의 상처를 안 입고 분위기도 즐거워진다. 때론 어르신들이 “젊은 나이에 귀신같은 거 걷어주느라 얼마나 수고하오?”라고 하면 남편은“수고한다고 생각하시면 아바이 이따가 하늘나라로 가시면 제일 이쁜 복주머니 하나를 나한테 뿌려주시면 됩니다.”라고 우스개를 피우곤 한다.
 
요즈음 출국 붐 때문에 가족 특히는 자식들이 곁에 없는 노인들이 부지기수이다. 하여 노인들이 편찮으실 때면 남편은 원장이자 노인들의 자식노릇까지 해야 한다. 특히 병이 위급할 무렵이면 가족과의 연계가 미처 닿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노인들을 배동하여 병원에 모셔가서 입원시키거나 의사를 보이게 한다. 명절이거나 생일날이 돌아오면 노인들은 어린애마냥 즐거워 하시다가도 가족이 오지 않는 경우에는 그토록 서운해 하신다. 될수록 노인들이 즐겁게 만년을 보내게 하기 위하여 남편은 설날이거나 생일날 아침이면 노인들한테 속내의거나 컵, 혹은 양말과 같은 작은 선물을 곱게 포장하여 드린 다음 술 한 잔씩 대접하면서 축복의 말도 전한다.

어떤 노인들은 명절 때마다 받은 약간한 선물들을 곱게 포장하여 자신의 궤에 넣는다. 새 것을 아까워 말고 사용하라고 하면 원장이 준건데 어떻게 아까와 쓰겠냐하며 보자기에 싸고 또 싸고 하신다.

남편이 가끔 노인들과 “할머님 요즈음 혈색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할머님 요즈음 많이 이뻐보이십니다.”라고 하면 노인들은 “늙어 쭈글쭈글한 게 뭐 곱겠소?”라며 말씀은 이렇게 하지만 어린애마냥 온 하루 즐거워하신다. 또한 매달 위생과 단결방면에서 총화 짓고 우수노인과 우수호실을 표창 장려해준다 가족이 오면 “우리 원장이 준 선물이다”하면서 장려로 탄 물건들을 내놓고 시뚝해 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귀엽고 천진한 어린애들 같다. 운동은 노인들한테 약 외에 건강을 챙기는데 꼭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낸 남편은 돈 3만여 위안을 투자해 운동기재를 갖추어놓고 마을 어귀에 역전을 멋지게 꾸며놓아 노인들의 쉼터로 될 뿐만 아니라 시가지에 다녀오는 마을사람들의 훌륭한 휴식공간으로 되게끔 하였다. 참으로 일거양득인 셈이다.
남편은 나름대로 노인들한테 자식 같은 효도를 하려 하지만 노인들마다 성격이 갖지 않아 맞춰가기란 그리 쉬운 일만이 아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무조건 내 물건이 잃어졌다고 억지를 부릴 때, 밥을 잡숫고도 밥을 주지 않아 배고파 죽겠다고 고함을 칠 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온밤을 술주정을 부리면서 소리를 치거나 노래를 부를 때, 이유없이 울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할 때,  임종을 다투고 있는 노인들의 가족과 미처 연락이 닿지 못할 때…이러한 일들을 하나하나 차실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린애를 달래듯 달래면서 리드해가는 남편을 보노라니 내 마음 또한 아련해진다.

길지도 짧지도 않는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남들은 쉽게 살아가는데 이런 가시덤불 길을 헤쳐 가는 남편을 나는 때론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남편은 항상 “여보, 어른들께 잘해주어야 복을 받는다오.”라며 웃음으로 넘기기가 일쑤이다. 한창 나이에 친구들 모임이거나 기타 술자리가 많지만 남편은 언제 한번 시름 놓고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항상 “양로원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하는 생각부터 앞서게 된단다. 하지만 남편은 이 길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 내심에서 우러러 나온 효심에 의하여 소외된 노인들에 대한 자식사랑을 쏟아 붓기 위해서인가보다.
이러는 남편을 보고 주위의 사람들은 "지금 세월에 자기 부모도 모시기 싫어하는데 젊은 사람이 참으로 대단하오. 정말 한국에 갔다 온 사람 중,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별반 없는데……"라고 하면서 나보고 정말 시집을 잘 갔다고 혀를 끌끌 차신다. 이 말을 듣는 나도 어깨가 으쓱해나며 세상의 행복을 독차지한 듯싶어졌다.

남편은 양로원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님들한테도 효심이 지극하다. 명절이면 항상 부모님들한테 소비 돈을 두둑이 드리는가하면 보건 용품도 사다드리곤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전화로 문안을 드리거나 주일마다 찾아뵙곤 한다. 살아생전 효도해야만 먼 후날에 후회되는 일이 없다면서…
 
남편은 항상 우리 가족한테 고생만 시켰다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여 모아산, 비암산 등산을 하는가 하면 경치 좋은 자연 속으로 간식을 사가지고 가서 가장의 역할을 다 한다. 명절이나 생일이 되면 깜짝 이벤트까지 준비하여 가족의 따뜻함을 한껏 만끽하게 해준다. 이러는 남편을 보는 나는 세상의 행복을 모두 독차지한 기분이다. 이번 해 중순에 내가 큰 병에 걸려 어쩔 수없이 입원치료를 받게 되자 남편은 홀로 양로원을 돌보랴, 고중 공부를 하는 아들애의 뒷시중을 하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삐 돌아쳤다. 내가 퇴원 후에도 수술 후 후유증이 더 무섭다하면서 몸에 좋은 보신탕을 끓여주는가 하면 가무 일에 손을 대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남편덕분에 건강을 회복하고 새롭게 출근할 수가 있게 되었다. 남들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상인지는 모르지만 난 그래도 이렇듯 효심이 지극하고 사랑이 넘치는 남편이 있어서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독차지한 듯싶다.

여자로 태어나서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것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큰 바램이다. 난 비록 고위층간부거나 부자인 남편은 아니지만 항상 어르신들과 부모님들께 효도하고 나를 자신의 눈동자처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어 너무너무 행복하다.
여보, 사랑해, 당신은 내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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