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4년전 우리는 금방 개발을 마친 도시 북쪽 구석의 주민가로 이사를 왔다. 7년 전만 해도 그 곳은 비닐하우스가 띄엄띄엄 보이던 옥수수 밭이었다. 대면적의 개발을 거쳐 옥수수 밭이 모습을 감추고 고층건물이 하나둘 들어섰으며 먼지가 펄펄 일던 흙길이 드넓은 아스팔트로 변해 남북으로 길게 뻗었다.
밭머리에 있던 밑둥 큰 백양나무 몇 그루가 이제는 주민가를 비추는 뜨거운 여름날 햇볕을 가려 주고 그 옆으로 그 옛날 위풍당당하던 돌다리가 다소 초라해진 행색으로 자리를 지켰다.
다행스럽게도 그 돌다리 위에서 시작되었던 시골장이 여전히 관례대로 같은 날에 펼쳐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장 구경을 실컷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교통이 조금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 가족들은 누구나  새 집의 안팎 환경에 만족했다.

여기 시골장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시골장이다. 장날이면 도시 주변의 농사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왔다. 햇볕에 얼굴이 거멓게 그은 농사꾼들은 소 수레이며 차에 농산물을 가득 싣고 와서 장을 벌렸다.

백화점 쇼핑에 비길 수 없는 흥미로운 구경이었다. 장터에는 발을 넘겨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꼭 들어섰고 바닥에는 야채들의 잎이며 과일들이 나뒹굴었으며 사람마다 소리를 높여서 가격을 흥정했다.

갖가지 농산물은 풍성하게 잘 차려진 잔칫상을 방불케 했고 사람들은 잔칫날에 초대받은 하객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법석이고 들끓었다.

풍성한 잔칫상은 계절마다 그 색채가 다소 달랐다. 봄에는 미나리, 쑥, 달래 같은 봄나물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고 여름에는 오이, 파, 고추, 애호박 등 싱싱한 여름채소가 여기저기 넘쳐났다. 가을에는 감자, 무우, 배추가 차 수레를 꽉 채우고 겨울에는 옥수수 튀게, 군고구마, 기름 꽈배기 등 군것들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사흘에 한번 열리는 장날이지만 어머니는 심하게 앓거나 외출을 해야 하는 날을 빼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장을 봤다. 그러면서도 그 이틀이 멀다하게 장날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장을 보고 돌아오면 항상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흥이 나서 그 날의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반찬 파는 할머니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데 칠순나이에 삼륜차를 몰고 장날마다 나온단다. 쌀장수 아저씨는 올해 아들이 대학에 붙었는데 그저께 쌀자루를 집에까지 날라다준 청년이 바로 아들이란다. 과일을 파는 한족 여자는 저래 봐도 도심에 집이 두 채나 된단다. 조선 해산물 장수는 오늘 신선한 굴을 가득 갖고 왔단다.

거기에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도 곁들었다. 3층 팔가자 집에서는 할머니가 꼼짝 안하고 할아버지가 항상 반찬거리를 사들여서 정말 부럽다. 옆집에서는 딸이 백화점 마트에 다녀서 그런지 장날이래도 별로 채소를 사들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개 이런 것들. 어머니가 장을 본 짐을 풀기도 전에 푼 이야기는 내게 재밌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그냥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였다.
하루는 짐에서 흰 가루 주머니를 꺼내더니 삽주뿌리 가루를 사왔다고 했다. 내가 속마음도 모르고 그냥 밀가루면 어쩌겠는가고 말하자 어머니는 머리가 하얗고 허리가 구십도로 구분 할머니한테서 산 것이라고 절대 가짜일리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불쌍하잖니, 그 나이에, 엄마가 생각나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라며 쓸쓸히 돌아 앉으셨다.

장은 당일 점심 12시면 끝났다. 하지만 장날의 분위기는 언제나 장터를 감돌았다. 하여 여름만 되면 장날이 아닌데도 장터에 앉아서 채소를 파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모두 동네사람들이였다. 늦은 오후 그늘이 지는 공공버스 역 옆에 할머니 몇이서 자리를 깔고 앉아서는 집에서 먹다 만 배추 한줌, 오이 둬 서너 개, 호박 몇 개, 줄당 콩 한주머니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외이다 보니 도처에 미처 개발을 못한 공지가 있었는데 부지런한 동네 사람들은 그 곳을 일궈 채소를 심었다. 그리고는 미처 먹지 못한 채소를 갖고 와서 시간을 보냈는데 친한 이웃을 만나면 그냥 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을에 들어서자 시골집 나무에서 달린 과일을 파는 사람들이 늘었다. 복숭아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갖고 나온 복숭아가 어찌도 작고 볼품없는지 며칠이고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퇴근길에 가을비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침 할머니가 집으로 가려고 주섬주섬 짐들을 챙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한 근에 얼마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반색하며 다시 짐을 헤쳤다. 복숭아는 애기주먹만하고 푸릇한 것이 마트에서 파는 먹음직한  복숭아와는 별개의 과일로 보였다.

집에 와서 어머니가 보더니 어릴 때 먹던 토종 복숭아라고 좋아했다. 반신반의하며 한입 베어 무니 안에는 겉과 다른 반전이 숨어있었다. 푸릇한 겉모습과 달리 물이 차오른 하얀 속살에, 씨 주변이 빨간 물감을 칠한 것처럼 곱게 물들어져 있었고 그 맛은 슴슴한 큰 복숭아가 비교할 수 없게 새콤달콤했다.

하지만 그 후로 그 할머니는 다신 나오지 않았다. 지지리도 못나서 사람들의 눈길 한번 못 받는 복숭아를 앞에 두고 못내 가슴이 아팠을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늦가을 시골장이야말로 최고의 장이라 할 수 있다. 넉넉하기로 소문난 가을은 시골 장을 여간만 풍성하게 차려주지 않았다. 

애초에 돌다리에서 시작되었고 어느 땐가 교통에 안 좋다고 다리 한 켠의 공지에 몰렸다가 개발이 되여 새 도매시장이 들어서면서 도매시장 주변으로 내몰았다가 지금은 큰 길에서 펼쳐지는 시골 장, 그것도 큰 길 양 켠에서 진행되던 것이 지금은 차량통행에 방해된다고 길 한쪽에 옮겨놓았다. 길 한쪽 켠에서 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장사꾼들은 자연스럽게 두 줄로 나눠 앉았고 그 두 줄 사이로 비좁은 길이 생겼으며 사람들은 그 길이 비좁은 줄 모르고 성수 나서  들락거렸다.

늦가을 장터에 나서니 날씨가 어지간히 춥다. 찬 기운이 느껴지는 맵짠 바람이 확 불면서 먼지가 허옇게 반공중까지 휘감아 올랐다가 사람들에 얼굴이며 옷이며 물건에 내려앉았다.

시골 장은 농사꾼들이 한 해 동안 투박한 두 손으로 가꿔온 농산물이 꽉 차서 푸근하고 훈훈하기만 하다.
늦가을 바람에 먼지가 날리는 비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팔을 스치고 침을 튕기며 가격을 흥정하고 인심을 베푼다. 그 옛날 인심이 그리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 닥칠 한 겨울을 추위를 맞이한다.

올해도 어머니는 먹음직스러운 산머루를 한 박스나 사서 설탕에 담구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 후에 매 사람 앞에 머루 즙 한 컵씩 따라주었다. 작년 이맘때에 담군 건데 새콤달콤한 머루 맛이 진하게 우러나와 있었다. 시골장의 그 깊은 맛이 오랫동안 입안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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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선자(张善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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