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K여성위원회 박옥선 전회장(현명예회장),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31번 , 재한동포문인협회 고문 
편집자 주 : CK여성위원회 박옥선 전회장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조선족 출신으로서 처음 한국 정당 비례대표 순번(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최종 35명에서 31번 배정 받았음) 안에 들어 1개월 동안 한국정치에 입문하여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박옥선 회장과 같은 정치경험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금후 한국정치에 출마하려는 조선족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어 길라잡이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돈 팔고도 살 수 없는 그 귀중한 경험을 재한조선족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박옥선 회장의 체험담을 연재하오니 독자들께서 적극 읽어보기 바란다.  

4. 나의 전과 이야기

모든 시험은 독이 있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시험 앞에서는 긴장하기 마련이다. 면접도 시험이다. 필기시험보다 더 긴장되는 것이 면접시험이다. 5천만에서 300명이 선발되는 국회의원, 그 중에서도 각 정당의 비례대표는 모두 합쳐도 47명이니 그 중의 한 명으로 뽑힌다는 것은 실로 로또 당첨과 같은 일이니 더욱 긴장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심사위원장님께서는 가뜩 긴장해하는 표정을 쉽게 읽어낸다. 이 얘기 저 얘기로 긴장을 풀어준다. 나는 추천에 의해 이 자리까지 왔으나 나의 과거 전과경력이 맘에 걸렸다. 그래서 심사위원장님께서 묻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조선족사회 코리안드림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 중반에 들어 가가호호 집안에 한국바람에 나서지 않는 가문이 없을 만큼 러시를 이뤘다. 그런데 당시는 정당한 합법수속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장기체류할 수 있는 비자는 일부 소수 산업연수생과 국제결혼밖에 없었다. 친척초청도 90일 체류기간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시 소수 산업연수생과 국제결혼 외에 10만이나 넘는 조선족은 한국에서 불법으로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와서 불법으로 체류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경제난을 타개하려고 너도나도 한국에 입국하지 못해 안달을 떨 만큼 한국바람이 거세게 불어치고 있었다.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 다수가 불법으로 체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자가 대다수 가짜였기 때문이다. 가짜 공무출장, 가짜 상무고찰, 가짜 여행, 가짜 친척초청, 가짜 부모, 가짜 결혼까지 온갖 가짜로 한국에 와서는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으면서 돈을 벌었다.

그 때 가짜비자가 얼마나 살판 쳤는지 2006년경 조선족사회 언론매체에 다음과 같은 유머 아닌 유머가 떠돌았다. “가짜가 되지 진짜가 되냐!” 왜 진짜는 비자 발급이 어려웠고 가짜가 비자 발급이 쉬웠는지에 대한 이해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2006년경 나는 구로구 구로동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리봉이나 대림 같은 동포밀집지역 여느 여행사와 마찬가지로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친척초청 건이었다.

어느 하루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굳은 날씨였다. 확 퍼붓고 금세 그치고 개이면 좋겠건만 전열선염으로 고생하는 노인네의 오줌처럼 찔끔찔끔 내리는 비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고 우울하게 군다.

사무실에 손님 여러 분이 있었는데 찾아온 일은 끝났으나 비가 그치지 않아 느긋하게 서로 한담들을 하고 있었다. 그 때 한국에 온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거액의 빚을 지고 왔기 때문에 사과나 배 같은 과일 먹고 싶어도 중국과의 환율을 따져가며 내밀었던 손을 주춤거리며 망설이기 일쑤였다. 그런 각박한 소비 환경에서 요즘처럼 비가 오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우산을 척척 살 수가 없어 비가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담이 길게 오가면 우연히 성사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한 조선족 아줌마가 자신은 친척이 초청하여 한국에 왔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힘들게 키우는 친구가 오고 싶은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느냐고 푸념삼아 얘기를 꺼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한 손님이 “마침 잘 되었네요. 제가 초청이 가능한데 도와드릴까요.”라고 선뜻 나서는 것이었다.

과부가 필요한 홀아비 홀아비를 그리는 과부, 평소 나를 믿고 자주 찾아오던 손님들이라 내가 나서 소개하는 식으로 한 마디 추천하니 긴 말이 오고갈 필요 없이 합의가 이뤄졌다.

친척초청 수속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두 분이 사증신청 접수 하러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갔다. 그날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이 접수 하면서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두 분은 중국 시골농촌에서 농사만 짓던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였다. 두 분이 나의 사업장에서 알게 된 사연을 있는 그대로 숨김이 없이 털어놓았다.

두 분의 진실한 얘기가 나에게는 큰 화근이 되었다. 친척이 아닌 친척초청, 법적용어로는 불법초청이었다. 이 불법초청 사실이 이뤄지게끔 내가 서로 알게 도와주었기에 출입국관련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결과 일백만원의 벌금을 맞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범죄행위였고 이 때문에 한 때 나의 몸에 오점이 생긴 것으로 하여 굉장한 고민이 나를 괴롭혔다.

나의 여행사 사무실은 24평정도 되었다. 땅이 작고 인구가 많은 서울에서 꽤나 큰 편이었다. 그래서 가운데 칸막이를 하여 복도 출입문을 이용하게 하고 임대료를 월35만원 받고 결혼정보업체가 입주하게 되었다. 결혼정보업체는 주로 중국, 베트남 국가 국제결혼을 알선한다고 들었고 그분들이 취급하는 호적등본(2008년부터 혼인관계증명서로 바뀜) 번역하고 공·인증 절차까지 나의 사무실에서 맡았고 건당 15만원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결혼정보업체가 중국 복건성 여자들을 대상으로 위장결혼을 알선한 사실이 적발 되었다. 위장결혼 건수가 많아 내가 그 업체와 공모하여 벌인 일 아니냐고 여겼던 경찰이 나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였다. 그러나 공모죄는 전혀 없었고 건당 번역공인증수수료만 받은 걸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법정에서 판사가 하는 얘기

“그렇게 많은 서류를 가져오는데 위장결혼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까?”

내가 한 답변

“저는 수사권한이 없는 일반 시민으로서 생계에 신경 썼을 뿐 그쪽으로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결혼정보업체이니깐 당연히 일이 많은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판은 방조죄로 가게 되었다.

당시 경찰관은 변호사 선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죄가 없기에 변호사 없이 참고인으로 재판석에 참석했다.

후회막급이었다. 경찰의 말을 곧이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더욱이 억울하면 항소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법정에 서 본 것이 처음이라 한국의 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항소도 못해 보고 그냥 끝나버렸다.

코리안드림에 나선 여느 조선족가문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고 보편적으로 있었던 일이 나의 가족에게도 발생하였다.

남동생이 타인명의로 한국에 오래전 입국했다가 강제출국 당하고 다시 본인의 명의로 재입국하여 부모님 따라 영주권을 취득했다. 그러나 2012년 6월경 오원춘 살인사건 때 법무부 출입국이 지문인식 시스템을 설치하면서 240명의 위명여권자들을 찾아냈고 이를 언론에서 대서특필 하였다. 당시 그중 한명으로 나의 남동생도 이름이 올랐다. 남동생은 결혼한 아내가 있고 임신하려고 제일병원에 인공수정하고 있는 때였다. 그 어려운 인공수정을 3회까지 하여 임신을 성공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강제출국 대상으로 되었지만 가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12년 말경 불법체류 자진신고 기간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남동생을 데리고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사범과로 찾아갔다. 확인해보니 수배가 되어 있어 자진신고는 어렵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찾아가고 법원재판까지 받아야 된다고 했다. 그날 아무 준비 없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찾아갔다. 바로 수감되어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그렇게 재판만 받으면 중국으로 보내줄 줄 알았는데 재판 과정에서 현재 이름도 본인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동생으로 살아 있는 사람인데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동생이 본인 이름이 맞다고 증인을 서게 된다. 중국에서 국적공증, 토지세 공증 다 준비해서 제출했다. 결론이 항소까지 갔지만 모두 허수였다. 바로 오원춘 살인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적발된 위명이름 동포들은 이유 없이 출국되고 본인 이름 아니라고 판결났었던 때였다. 억울해도 말할 곳이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 동포 살인사건으로 연이어 나오던 그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동생은 지금도 중국에서 신발공장을 운영하고 동생와이프는 한국에 거주하면서 눈물 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코리안드림에 의한 이산가족이다.

나의 남동생의 눈물 나는 이야기는 우리 중국동포들이면 여느 집안에 한명씩은 꼭 있을법한 사연들이 아닌가, 부모 형제 자녀 아내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고통 겪지 않고는 누가 알겠는가.

우린 살기위해 이 나라를 찾아왔고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고향이 그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향이라고 중국에 가면 우린 또한 한국을 그린다. 조선족은 특수한 민족이다. 태어나서부터 조상님들의 이주생활을 들어오면서 조선의 전통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살았고 후대인 자신이 또한 그 과정을 겪고 있다.

한국은 우리조선족사회에 출입국법상 많은 혜택을 주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면접에서 강조하여 말했다.

위에서 서술하다시피 나는 뜻하지 않게 한국법을 여러 차례 어겼다. 그래서 전과자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이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지내오느라 무척 힘들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랑으로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전과 기록은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온역’으로서 언제까지나 불명예스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나는 기회가 있으면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었다.

마침 후보자 면접이 내가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였다. 모든 것을 다 실토하고 나니 잠시나마 후련한 느낌이었다.

“생계형 범죄는 괜찮습니다.”

심사위원장님의 말씀이다.

나의 전과기록이 후보자 경선에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35명 선발 범위에 들어 31번을 배정 받았다. 그렇다고 나의 전과경력이 당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한편 코리안드림에 의해 생겨난 범죄이고 이주민으로서 정착과정에 발생한 생계형 범죄이므로 사회적으로 움츠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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