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태일 프로필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수상 다수.

[서울=동북아신문]시간이 흐를수록 후회감만 더해 갔다. 서울에 사는 고향친구 회갑 잔치에서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들이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차를 운전하여 지방에 있는 집으로 달리고 있었다. 점차 졸음과 술기운이 자욱한 안개처럼 밀려왔다.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산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차를 되돌려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검은 물체가 언뜻 보이고 순간 강한 충격을 받았다. 차바퀴가 과속 방지턱을 지나는 것처럼 쿵덕거리며 검은 물체위로 지나갔다. 동시에 사이드미러로 뒤를 바라보니 사람 같은 검은 물체가 꼼짝하지 않고 길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고 온몸이 떨리어 식은땀이 전신을 적시였다.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순식간에 모든 사태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달빛에 비치는 사이드미러를 보면서 주위에 목격자가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뺑소니를 쳤다. 온몸이 떨리고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린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 일이 발생한 후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이름 모를 전화가 오거나 경찰차만 봐도 두 다리가 떨리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돋아났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잘 수 없고 수면제와 술에 빠져 우울증까지 앓게 되었다.

새해가 코앞으로 다가 온 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가슴이 섬뜩했다. 서울에 사는 조카의 전화였다.

“삼촌, 할아버지가 새벽에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져 K대학병원 응급실에 왔어요. 뇌졸중 같아요.”

순간 칼날 같은 아픔이 심장까지 파고들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혈압 약만 먹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 갈 준비를 하였다. 마누라는 해외에서 식당을 하는 아들을 도와주러 가고 집에 나 혼자 밖에 없었다. 문밖에 나와 보니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였다. 너무 추워서 차도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차에 오르자 또 머리가 아프고 시야가 흐려졌다. 겨우 운전대를 잡고 한참 달리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지면서 차가 멈춰버렸다.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다. 차 밖으로 나오니 맹렬한 칼바람이 얼굴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휴일이라 지나가는 차도 드물고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지 않았다. 차안의 온도가 떨어지면서 온몸이 점차 굳어지며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귀에는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칼바람에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고 눈앞에는 길옆의 추위 속에 떨고 있는 마른 풀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끝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지 않구나!’ 절망감을 느끼며 하늘이 제일 공평 하다고 생각 하였다.
이때 낡은 승용차 한대가 멈춰서고 젊은 남자가 다가와서 미소를 띠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정을 얘기 하자 두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공구를 꺼내어 수리를 하며 자기 차에 가서 몸을 녹이라고 하였다. 다행히 큰 고장은 아니었다. 온 몸은 추위로 굳어진 듯 보이는 그였지만 얼굴만큼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시동이 걸렸고, 너무 고마워 10만원을 꺼내어 사례를 하려 했지만 단연코 거절하며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도 다른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위에 힘든 분이 있으면 저라고 생각하고 도와주세요.”
그 일이 발생한 후, 몇 번이나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려 했지만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 설이 될 무렵, 해외에서 사업하는 며느리가 명절에 쓰라며 200만원을 주고 갔다.

마침 서울에 있는 딸네 집에 볼일도 있고 설 물건도 살 겸 차를 운전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외곽도로에 도착할 무렵 점심시간도 지나 허기가 나서 길옆에 있는 김밥 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인 듯한 젊은 여자가 목발을 짚고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그 옆에는 서너 살 되는  남자 아이가 공을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주문한 된장찌개는 너무 맛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작년 봄에 뺑소니차에 치여서 다리를 절게 되었고 그 차는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고 했다. 순간 등허리가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이마에 돋아났다. 밥도 절반 먹다가 일어서 얼른 계산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주방 옆 작은 방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달려 가보니 아이가 놀던 공이 높은 선반에 걸려 있고, 그 아이는 의자를 밟고 공을 꺼내려다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서둘러 아이를 안고 차에 태워 인근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이엄마는 다친 아이를 부둥켜안고 병원비는 어디 가서 구하고, 불행은 무엇 때문에 우리 집에만 찾아 오냐며 엉엉 울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에서 사진을 찍어 보니 팔목 윗부분에 금이 갔단다. 한참 후 침대에서 링거 주사를 맞는 아이가 잠이 들고, 그녀는 슈퍼에 물건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느새 창문밖에는 진눈깨비가 날리고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자꾸 당장 누가 달려와서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병상 옆 책상위에 그녀가 놓고 간 스마트 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는 미소 짓는 젊은 남자의 얼굴과 ‘남편’ 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것을 본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뜻이 아니고는 어찌 이렇게 공교로운 인연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착잡한 마음으로 며느리가 주고 간 200만원이 들어 있는 돈 봉투에 이렇게 썼다.

“지난 번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서 절망감을 느낄 때 저를 도와 준 분이 바로 남편이었네요! 저의 작은 성의이지만 아이의 치료에 도움이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돈 봉투를 서랍장에 넣고는 도망치듯 병원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서는 흰 눈이 펑펑 쏟아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귀전에서 애기 엄마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았고 그의 울음소리는 나의 가슴을 후벼 패는 듯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당장 경찰서에 찾아가서 자수 하고 어떤 형벌이던 죗값을 달갑게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주저하지 않고 경찰서 가서 자수를 하고 사고 발생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며칠 후, 군청에서 핸드폰에 이런 문자가 왔다.
"존경하는 000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우리 군민들에게 정말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날 밤, 용감하게 멧돼지를 깔아 죽여 주민들이 시름을 덜게 되었습니다. 그 포악한 멧돼지는 몇 번이나 곡면리 마을에 덮치어 농작물을 해치고 군민 세 명이나 중상을 입혀 놓았습니다. 선생님의 용감한 행위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포상금 50만원을 드리니 오셔서 영수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00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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