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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홍애자 수기] 괴상한 그림 그리는 "불행아, 저 좀 봐주세요."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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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16  10: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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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홍애자, 사랑으로 간병인 생활을 하며
[서울=동북아신문]홍애자의 습작품 같은 그림들은 대체로 아주 공포스럽고 괴상하고 아주 비틀어져 있다. 별의별 세상을 다 겪은 인생사와 간병인으로 있으면서 환자들의 모습들을 담은 까닭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무척 끌리는 힘이 있다. 따뜻하고 착한 사랑이 보여 진다. 그의 그림들은 대체로 병들고 지치고 마지막 숨이 남은 약자들에게 끈끈한 희망을 보여주고자 그린 것이다. 그림이 생기가 있는 까닭이다. 편집자

이 세상에 축복 받으며 귀한 존재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태어나야만 하는 소중한 생명, 나는 지지리 복도 없이 3대독자 넷째 딸로 태어났고, 이 세상에 태어난 그날 끔찍한 화상으로 목숨은 겨우 부지 하였으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농민 배고픔이 싫어 부모에게 작은 도움 주고 싶어 도시 공인에게 시집와 하나의 꿈이 있었어요. 딸 여섯, 큰언니 작은 동생들 챙기며 전 항상 못난 오리취급으로 살아온 그 느낌으로 살았어요. 옷도 학교 학비도 맨 나중이라 늘 부모에게 효도하여 나도 이쁨을 받고 싶었어요.
 
시집와 자식 낳고 아글타글 벌었어도 별로 먹고 쓰고 남는 것 없어 남들이 뒤를 이어 타향살이 길을 선택했지요.
 
이쁜 딸애와 시골에 부모님에게 집 장만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어요. 십년 전 서울변두리에 괴나리 보짐을 풀고 사돈의 팔춘도 없는 낮선 곳 15만 원 짜리 작은 성냥갑 같은 2층집에 정착했습니다.
 
10월 말 바람이 불면 문이 덜컬덜컹 요란도하여 밤잠 못자며 뜬눈으로 보냈지요. 가뜩이나 겁이 많은데 연쇄살인사건이 그 무렵 텔레비죤에서 자주 보도하니 매일 떨며 문밖에 나갈 엄두도 못 냈습니다. 옆에 아랫집 중국사람 홀로 사는 독신 남성들이 다 너무 무서웠어요. 40대 중반 넘을 나이인데 왜 그때엔 그렇게 무서웠던지, 그냥 눈물만 나고 외롭고 슬펐어요.
 
   
홍애자 그림(이하)
 친구 알선으로 간병일을 하였어요. 처음 길도 몰라 짐을 둘러메고, 여기저기 언 밥을 녹여 먹으며 설, 그것도 첫 설을 간병을 하며 보냈어요.
 
경험도 없고 고정한 나, 다른 간병들 주일마다 노임 받는데, 제가 간호하는 환자분 달 넘어도 월급 줄 생각 안하고 있으니 어느 날 큰마음 먹고 월급 달라고 하였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서울대학병원 8, 지금은 망가지고 없어요. 생활이 안 좋은 환자분 보험타면 준다며 기다려라하네요.
 
설날 다른 환자 분들 가족에선 음식도 갖고 오건만 우울증이 있는 사모님은 코빼기도 안보여 땅땅 언 밥 대충 녹여 김치에다 먹으려고 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보름날에는 기어이 집에 가 보내겠다고 말하고 셋방에 호주머니 돈으로 무얼 사 먹고 싶어 야밤에 집이라 찾아오니 하느님 맙소사, 도적이 집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아 호주머니 돈 반지 다 털어갔어요.
 
또 엉엉 혼자 울다가 병원으로 가니 환자분 미안하여 더 못쓰겠다하며 나중에 돈 보내 줄 테니 계좌번호 남겨 달라하였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니 친구들은 "너 인젠 월급 못 받을 거야 두고 봐, 그 환자분도 그 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갔어." 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이었요.
 
어떻게 해요, 월급을 달라고 하자니 8층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다는 환자분입니다. 전 밉던 곱던 착해 보이고 고정한분이라 믿고 기다렸어요. 뭐 안 줘도 별 수 없는 거죠. 혼자 벌어 애 둘 공부시키다 사고 났으니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후에 조금씩 다 보내 주더라구요.
 
그 후 당뇨할머니 보살피게 되었어요. 물론 몇 명 더 보았으나, 이 할머니로 하여 전 간병 때려 치웠어요. 간병 4명 바꾸고 제가 다섯 번 째라, 늘 약은 드시지 않고 단 빵으로 몰래 드시며 호사들에게 거짓말 자주하기에 제가 한마디 하였어요. 그랬더니 내가 공자 주지 간호사가주나, 내가 시키는 대로 만해! 하며 까탈스럽게 굴기에 그만두려고 하니 "어디에서 이 따위 거지같은 미친년 다 있니? 그래도 착해 보여 그냥 쓸려하였는데 감히 그만둬 내가 하지 말라 할 때 까지 해야지 네가 감히?……"하고 스트레스 받았다며 "손해배상 낼 거야, 아니면 계속할거야?"하고 행악질을 했어요.
 
   
 
 그때 전 죽을 것만 같았어요. 너무 두려워, 어쩜 환자라고 해도 그렇게 험하게 욕할 수 있어요? 저는 엉엉 울며 일한 공자 며칠 못 받고 줄행랑을 놓았어요.
 
안 돼, 도저히 간병은 적성에 맞지 않아. 연변에서 어린이집 20여년 하여온 경험으로 애들 보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외딴집 아이 둘 보러 가게 되었어요.
 
겁쟁이 아줌마에게 또다시 찾아온 비극, 대전 산속 전원주택에서 두 애를 돌 보는 일이었어요. 마음씨 착한 주인으로 생각하여 한시름 놓으며 죽으나 사나 여기에서 몇 년 하려고 작심하였어요. 그런데 하느님 맙소사, 그때 겁쟁이 아줌마에게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올 줄이야.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주방에서 나기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이상하지, 먼 소리가 자꾸나는 걸까? 야밤삼경 조용한 집……알고 보니 주인이 우울증에 약간 이상한 증세로 밤마다 주방에서 화장실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었어요.
 
졸려도 두려워도 도망칠 수 없고, 교통도 자가용차로 30분 타야만 전철역까지 갈수 있으니 아, 어떻게 하나?그래도 하다 보니 열심히 살다보니 그래도 마음씨 착한 주인들이 잘 대해주고 먹는 것도 팁도 잘해주니 세월 몇 년 꼴깍 보내고, 마지막 h-2 비자를 f-4로 변경시켜준 고마운 집이였지요. 두렵고 공포의 밤에는 책궤에 수많은 책들 보고 또 보며 힘든 시간 보내기도 하였어요.
 
그 후 두 세집 아이도우미로 살던 차, 어제 왔냐 싶었는데?10년이 거의 되었군요. 꿈도 실현하였지요. 한국 와서 번 돈으로 남편이 시골에저 부모님이 집지어드렸고, 딸애 앞으로도 작은집 하나 사주고보니 아, 다소 쉬며 하려고 했는데 마침 오십견이 와서 더는 애 들보기 힘들어 남편한테 이젠 집에 가려고 한다고 하니 치매 시어머니 돌보며 고생하던 남편도 너무 좋아 하였어요. 팔 아프다니 그동안 못 해준 거 하루 네끼 해준다며 통쾌히 웃던 그이, 그런데 그것조차 운명의 희롱이고 할까, 그것이 30년 부부 마지막 대화로 될 줄이야. 남편이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떴어요.
 
아흔다섯 고령의 시어머니와 결혼을 앞둔 딸, 2년 동안 시어머니 봉양비용에 딸애가 아프다고 보니 그동안 번 돈 10만 원도 금방 다 날아갔어요. 앞이 캄캄하고 숨 쉬고 살아갈 수 없었어요. 우울하게 층집에서 밥도 하지 않고 큰길로 봄이 되니 다리 절른 사람 늙은 사람 운동한다며 오가는 모습을 볼 때, 저런 병들고 늙은이들은 왜 안 데려가고 펄펄 뛰어다니던 내 식구 데려갔나, 하며 하느님한테 욕하며 매일 우울하게 지내다가 옆에 지인 소개로 마음 달래 려구 절에서 쓰는 금돈 종이배 접는 걸 시작하였어요.
 
한국에서 한 달에 230만원 받다가 하루 중국 돈으로 15위안 벌이를 하며 시간 보내면서 잡생각을 떨쳤어요. 그래도 마음은 공허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러다 다시 한국에 나와 옥탑방에서 두 달 누워 있으며 전에도 좀씩 그리던 그림을 그리려고 다시 연필 잡았어요.
 
그래, 그림이 참 나에게는 안정제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마약 같았어요. 그런데 우울한 기분에 그리는 괴상한 그림을 보였더니 딸애에게 야단맞고 모두 반대를 하였지요.
 
왜서 전부 이따위 그림만 그려요? 하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공포그림을 그리다 지금은 좀 밝게 그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림 그리는 제 마음은 이젠 행복합니다.
 
   
 
2년 세월 하나 둘 스쳐지나가는 친구 인연들보다 항상 내 곁을 지켜주고 다독여 주고 성취감 안겨주는 어설픈 내 그림일지라도, 왠지 간혹 듣게 되는 찬사 한마디에 온 세상 사랑 행복 독차지한 기분입니다. 우울하던 나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으로 탈바꿈 하였어요.
 
간혹 일하는 서너 곳 요양병원을 돌아다니며 아, 어디가나 간호사 간병 환자들에게 개그처럼 우울하던 침울하던 공기를 싹 다 바꾸어 주며 내가 있고 가는 곳 웃음으로 즐거움으로 다소나마 피곤하던 삶에 활력소로 살았구요, 우울한 환자분들 입에서 하느님이 준 선물이란 소리를 듣게 됐어요. 치매할머니는 "너 곱다 같이 살자, 내 딸하라"하고 자주 응석부리듯 말하구요, 일부 소리치고 손찌검하는 언니들에게 곱게 타일러주기도 하고 힘들어도 가는 곳마다 피곤한 언니들에게 어깨 잔등 맛사지 해 주며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있는 곳엔 웃음과 희망, 그리고 그림은 내가 힘들고 피곤을 푸는 유일한 충전기로 내 삶의 동반자로 간주하며 살려 합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유족하지 못해도 마음은 너무 즐겁습니다. 2년 동안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보이지 않았고 내가 설자리 앉을자리 찾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겁쟁이 아줌마에서 벗어나 콧줄도 썩샌도 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내 앞에는 포기란 없다, 하면 된다. 잘 할 수 있어, 하고 가끔 혼자 주문을 외우고 있어요. 어설픈 그림도 즐겁게 그리며 나머지 후반생 제2인생, 시어머니 딸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며 가족이 깨여졌다 슬퍼하지 말고요. 아니야 내가 가장이 되고 큰아이 작은아이 잘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지고……그림도 기회가 생기면 더 배우고 글도 배워 작은 책 그림 동반한 타향수기 책자 만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라는 거 없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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