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룡 : 중국동포타운신문 주간,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서울=동북아신문]인류역사에서 모계사회가 부계사회에 비해 훨씬 긴 시간을 지속해왔다. 하루 시간에 비유하자면 모계사회는 자정0시에 출발하여 다음 자정이 다가올 23:59까지였고 부계사회는 근근이 나머지 1분에 해당될 뿐이다. 왜 모계사회가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주요 이유는 생식숭배였다.

생식숭배는 곧 여성숭배였다. 바꿔 말하자면 모계사회를 관통하는 핵심문화는 생식숭배였다.
생식숭배가 모계사회 핵심문화였다면 부계사회에 진입됨에 따라 생식숭배가 사라졌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부계사회에 진입한 지도 수천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성이 아버지를 따르고 있으나 여자가 낳는다는 뜻인 ‘姓’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역시 모계사회 생식숭배문화의 잔재적인 표현이다. 또 유교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다자다복의 대가족문화는 역시 생식숭배의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계사회에 진입한 이래 불과 반세기 전까지 생식숭배문화는 사회 전반 곳곳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역사를 돌아보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에로의 진입한 그 시점이 똑 부러지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복희(伏羲)의 시대(대략 5천년  전)를 부계사회의 개시였다고 보지만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주나라 초부터 부계사회 확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일본열도는 썩 후인 AD5세기, 한반도는 일본보다 조금 앞선 기원 전후인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립시기를 부계사회로의 확립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경우 삼국시기 혹은 썩 그 이후에도 생식숭배문화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앞 장에서 언급한『삼국유사』문호왕법민 편에 등장한 거녀 이야기는 생식숭배문화의 전형(典型)적인 잔재사례이다. “왕이 처음 즉위한 때는 龍朔辛酉年(661년)이었다. 사비 남쪽 해중에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신장이 73척, 足長이 6척, 음장이 3척이었다.” 저자 김일연은 이 이야기를 “백제가 망하는 징조를 알리는 것”이었다고 지적하였으나 필자는 이 거녀 이야기의 본질은 모계사회의 완전몰락을 의미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즉 삼국의 건립이 부계사회의 학립을 의미하지만 모계사회가 완전몰락한 시점이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가 사라지고 하나의 통일신라의 출현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 말하자면 신라의 화랑 전신인 원화(源花)는 국선으로서 아릿다운 소녀였다. 여자가 국선으로 받들린 것은 모계문화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진흥왕 때 원화를 폐지하고 소년을 그 자리에 앉히고 화랑으로 탈바꿈했는데 이는 모계문화 탈피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라 미실이란 여성은 실존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녀는 실제로 삼대 왕을 색으로 섬긴 왕실 ‘性의 女神’이었다. 이것도 모계문화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드라마에 나타나는 미실에 대한 인물각색은 절대다수가 거짓말이다. 미실 이후 신라는 모계문화에서 부계문화에로의 확립이 뚜렷해졌던 것이다.
한반도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지만 중국에 비해 거녀 이야기가 굉장히 발달했는데 양적으로 숫자가 굉장히 많고 질적으로도 짜임새가 잘 짜여 있다. 거녀 이야기는 결국 또 하나의 생식숭배문화의 표현이다.
한반도에서 거녀 이야기 중에 으뜸가는 주인공은 제주도 선문대할망이다. 선문대할망은 키가 얼마나 크던지 하늘에 치솟아서 아득히 머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노파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베고 누우면 두 발은 성산포 앞바다까지 닿아서 발로 물장난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키가 큰 노파는 육지와 왕래할 적에는 신발을 벗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목포 쪽을 향해 건넜다고 하는데 바다의 가장 깊은 곳도 무릎 아래밖에 닿지 않았다고 하니 크기가 짐작이 된다. 노파가 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제주팔경의 하나인 용연에 들어갔으나 물이 겨우 발등을 묻힐 정도였으며 한라산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갔던바 얼마나 깊던지 그처럼 키 큰 선문대할망도 빠져죽고 말았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왜 한반도 거녀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한 거녀가 하필 제주도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선문대할망은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 전설과 관련이 깊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에 여자가 많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적으로의 표현이 아니라 육지보다 썩 오랫동안 모계사회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산해경』에 이르기를, “바다 쪽에 여인국이 있는데 그 곳엔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다. 그 곳 여인들은 맹월(孟月)에 홀딱 벗고 남쪽 바람을 맞아 잉태한다.” 전문가들은 이 여인국이 바로 제주도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능화의『조선무속고』에 보면 한반도 무속인 중에 거녀가 있었는데 그녀를 장신대력지녀라 불렀다.
세간의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 우암천사에 법우스님이 있었는데 도행이 깊었다. 어느 하루 방에 한가히 기거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간에 비가 내리지 않고 홍수가 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천왕봉 꼭대기에 올랐는데 한 장신대력지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저희는 성모천왕인데 하늘에서 벌을 받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고 당신과 인연을 맺고 싶어 수술(水術)을 부렸습지요. 이렇게 그들은 수술을 중매로 부부가 되었고 가옥을 짓고 살면서 팔녀를 낳아 자손이 많이 번식했고 그들에게 무술(巫術)을 가르쳤다.
이능화의『조선무속고』에 장신대력지녀 외에 많은 거녀이야기가 있다.

<해남의 마귀함씨>
마귀함씨에 관한 전설이 선문대할망의 이야기처럼 상세하고 구체적인 것이 많이 없는 것이 유감이나, 그녀는 한발자국에 백리 오백 리는 문제없이 거닐 수 있었다고 하며 목포에서 완도까지 세 발자국이면 된다고 하니 거녀임에는 틀림없다.

<강화도의 마귀할머니>
강화도의 마귀할머니는 고인돌 전설로 유명하다.
강화도 서단에 있는 외포리란 곳에서 지금의 고인돌을 마귀할머니가 운반했다고 한다. 고인돌 윗돌은 머리에 이고 기둥돌은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약 배 미터 지점에 있는 큰 돌은 다리사이에 끼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외포리 앞을 지나올 때 속옷이 조금 젖었다고 하며 이곳이 제일 깊은 곳이라 한다. 고인돌의 크기는 50명이 되는 사람이 올라가도 끄떡없다고 한다.

<축성녀>
한 과부가 두 남매를 데리고 사는데 아들은 말을 타고 서울에 다녀오게 하고 딸에게는 뒷산에 석성을 쌓으라고 명하였다. 딸은 앞치마를 두르고 산 아래에 있는 강변에 가서 큰 돌을 담아다가 성을 쌓았다. 성을 거의 다 쌓고 마지막 석문만 하면 완성할 무렵 어머니의 계책에 따라 딸이 지고 아들이 이 경쟁에서 이기게 되었다고 한다.

<방뇨몽녀>
하나님은 실수였는지 의도적이었는지 하여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생리구조를, 남자는 하나의 ‘쟁기’로 오줌배설과 생식을 하게 만들었고 여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오줌도 누고 성교도 하고 애도 낳게 만들었다.
이러한 생리구조 특징에 의해 사람들은 흔히 오줌과 생식을 연관시켜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를테면 남자나 여자나 오줌발이 세야 성교도 잘하고 생식력도 강하다는 것이다. 변강쇠는 오줌발이 세기로 아름드리나무가 꺾어지고 옥녀는 오줌을 누면 땅이 파여 큰 움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실생활에서 이루지 못하는 일들을 꿈에서 이루는 현상이 많고, 따라서 우리민족은 분뇨와 연관되는 꿈을 길서의 꿈(吉瑞之夢)이라 해몽한다. 꿈에 분뇨가 옷에 묻어도 대길, 분뇨통을 지고 집에 들어와도 대길, 분뇨를 싸도 대길이라고 한다. 민속학자 인동권 씨는 “분뇨에 관한 것은 복록, 부귀, 재부에 관계된다고 믿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분뇨몽의 실제적 의미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멋대로 풀이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분뇨몽은 실제로는 생식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본질은 역시 생식숭배였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편에 보희와 문희 자매의 방뇨몽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동생과 꿈 이야기를 하매, 문희가 듣고 가로되 내가 이 꿈을 사겠다 하였다. 언니가 “무엇으로 사려하느냐?” 가로되 “비단치마를 팔면 되겠오?”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하니 언니가 “어제 밤 꿈을 너에게 준다.” 하였다. 동생은 비단치마로 갚았다. ······ 문희는 춘추공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고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영미 5년 갑인년에 춘추공이 즉위하였다. ······태자 법인과 인문, 문왕, 노단, 지경, 개원,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서 나타났다.
김춘추는 체격이 엄청 큰 거인이었다. 이러한 거인과 맞을 상대는 생식력이 강한 여인이어야 한다. 문희는 비록 거녀로 등장하지 않지만 언니 보희의 방뇨몽을 사서 ‘음력(陰力)’이 강해졌다.
이와 같은 유형의 방뇨담이『고려사』에도 실려 있다.
보육의 둘째 딸 진의는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아름답기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언니가 꿈에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천하에 가득 찼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언니는 동생 진의를 보고 꿈 이야기를 했다. 진의는 그 꿈이 길몽이라는 것을 알고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팔기를 청했더니 언니는 승낙하였다. 꿈을 산 진의는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었다.

당시 당숙종(唐肅宗)은 아직 잠저에 있을 때에 천하 산천을 유람코자 송도에 이르러 보육의 집에서 기숙하게 되었다. 숙종은 보육의 두 딸의 미모에 반하여 옷 떨어진 곳을 꿰매 달라고 청하였다. ······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진의는 숙종과 인연을 맺고 임신하게 되었다. ······진의를 후에 정화왕후라 불렀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경종과 사별하고 사제에서 과거하는 헌정왕후는 어느 날 조령에 올라가 방뇨 하여 국중이 물바다가 되어 은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이때에 헌정왕후는 안종과 몰래 정을 통해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는 8대인 현종이었다.

위 방뇨몽담은 여자들의 생식운이 왕후가 되었거나, 아이를 많이 낳거나, 낳은 아이가 왕이 되는 등 대운(大運)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중국이나 일본에는 우리민족의 방뇨몽담처럼 짜임새나 내용면에서 멋들어진 방뇨몽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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