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련: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

업무경력 : 2006년 9월 ~ 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중국 담당 변호사

[서울=동북아신문]막장드라마의 유행은 악역과 함께 한 것 같다. 캔디같은 피해자코스프레를 하면서 나홀로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던 주인공들이 악역에 맞서 싸우면서 마구마구 독해지고 그러면서 시청률은 올라간다. “아내의 유혹”의 장서희가 점을 하나 찍고 돌아오면서 드라마에 공식적으로 “막장”이라는 장르가 생겼다고도 한다. “왜, 나는 너를 만나서, 너는 나를 아프게 하니…”라는 드라마 삽입곡이 누구나 익숙할 법 하듯이 이렇게 악역에 맞서야 하고 악역이 있어야만 하는 극의 구성이 자극적이어서 사랑받는 다기 보다 아주 직설적으로 요즘의 공감대를 많이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장인들의 저녁 술자리는 대부분 상사가 안주다. 잘근잘근 씹으면서 대동단결하고 친해지고 공통된 비밀을 간직한다.

나는 늘 내가 인복이 많다고 얘기한다. 사실이다. 평생 직장생활을 해도 만날까말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인생 순간순간에 나를 도와주고 믿어주고 이끌어줬다. 그와 동시에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사람이 아직 있어,”라고 누구나 공감할만 하는 “악역”도 여럿 만났다. 누가 나를 더 성장시켰을까를 물어본다면 나는 전자인지 후자인지 한쪽만 찍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짧고 굵은 두가지 경험만 잠깐 이야기해본다면, 막내 시절의 모 임원의 이야기가 첫번째다.
“정규직인 내가 오래 가나 임시직인(임원) 당신이 오래가나 두고 보자”가 동료 모두의 입버릇이었다. 일에도 도움이 안되고 정서 기복도 심하고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계약직의 전형적인 전전긍긍과 위에 뭔가를 만들어서 보여주기까지 종합선물세트같은 담당 임원이었다. 회의하다가 마시던 캔을 던지고 쓰던 만년필을 그대로 와이셔츠에 던지기도 하며 일로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다가 실무자가 반대의견을 입증하면 삐쳐서 두고두고 괴롭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그때 우리는 그분과 아무 관계 없이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해가면서 회사의 시장 지위를 승승장구 시키면서 일에서 오는 만족감을 충분히 즐기면서 우리만의 즐거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선의”의 회사업무를 그분을 잘 꼬셔서, 설득해서, 참아가면서 해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분의 인신모독적인 발언이나 말도 안되는 행동들을 안주삼아 야근 전의 반주 한잔 야근 후의 맥주한잔으로되려 우리의 우정과 믿음을 돈독하게 다져갔다. 우리 팀 뿐만 아니라 다른 관할 팀과도 소속과 관계 없이 서로 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돈독한 관계를 가져가고 있었고 모든 것이 원활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공공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적의 적”이 “친구”인 심정으로 서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응원해주고 일로 필요할 때 도우면서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회사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같이 즐겁게 일하던 선배가 퇴사하고, 또 선배의 선배가 퇴사하고 나마저 퇴사하게 되었다. 결국 정규직인 우리가 먼저 나온 셈이다.우리는 각자 다른 직장에서도 OB모임을 가지면서 돈독한 우정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분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세상에 이런 날도 오긴 오는구나 하면서 또 모였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후였다.

그분이 퇴사하고 나서 “대동단결”의 회사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는 점이다. 여러 팀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내세우면서 옥신각신하기 시작하였고 “큰 진상”이라며 서로 위로가 되던 동료들 사이에 “작은 진상”들이 쌓여 금이 가고 서로 말도 안하고 일로 부딪칠때마다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둥글둥글한 사람이 먼저 나서서 조율도 하고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공공의 적을 대항하는 하나의 팀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졌다.

물론 이런 “큰” 악역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아이들에게 악역과 선한 역을 두기 마련이고 한가지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악역으로 누르고 다른 역할로 토닥거리는 전략을 늘 가져간다. “악역”에 대한 해석이 많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상대가 느끼기에 그 순간 내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점은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더 깊이 들어가보면 모든 내가 접한 말과 행동은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의 구분만 있을 뿐,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는 딱히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리고 대체적이고 주기적인 감정적 상처를 불사하는 “폭언, 폭행”을 마구 하지 않는 한, “악역”은 아주 일부 상황에서의 아주 단편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즉, 어제 우리집의 다섯살, 여덟살 두 아이가 부모에게 말 한마디 없이 부모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놀러 갔다 들어온 상황에서, 우리집의 규칙은 사전에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것임을 설득하기 위한 “악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아빠는 너희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걱정하는 것이고 가족으로서 서로 그런 감정적인 공감을 가져가고 싶은 것이라는 점을 피부에 와닿게 안아주는 선한 역이 있게 되기 마련이다.

공통 소속체에서의 많은 사람이 악역이라고 공감하는 그런 사람을 또 겪은 적이 있다.
전형적인 위에 잘하고 밑에 막하는 사람, 막말과 폭언으로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 없는, 변화무쌍한 감정변화를 스스럼 없이 드러내는 그런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울게, 화가 나게 괴로워하게 마음껏 괴롭히고 나서, 감정을 추스른 후 후배에게도 사과할 줄 아는 위인이라는 자세로 쿨하게 사과도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경청하고 애정을 가져야 할 의무는 아무에게도 없으나 이를 기반으로 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이 조금 다르긴 한다. 

 본인이 뭔가를 실수를 했던 날, 너무 다행인건 이분은 똑똑한 편이라 실수를 자주 하지는 않는다. 그날, 수십명이 되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다 들으라는 듯이 복성으로 “니가 그랬잖아…”라는 식의 멘트를 쏘아붙였다. 나는 자주 겪던 감정의 변화 인지라 그러려니 하고 점심 먹으러 나가버렸다. 먹고 들어왔더니, 내 자리에 이름표 없는 과일쥬스가 세 잔이나 쌓여있었다. 네이트온에 수많은 응원 글과 함께. 

이 분과 함께 했던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감정과 사람을 걸러내고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사회란 우리들에게 늘 부당한 것을 강요하고 주장할 수 있고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서로 의지하고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지를, 우리는 시간을 겪으며 눈물을 겪으며 소주 한잔 기울이며 배우고 이겨냈다.

누가 시켜서 차분하게 앉아서 내가 함께 일했던 나의 선배들 몇명의 이름을 적고 장점 다섯가지와 단점 다섯가지를 써봤다.
장점 다섯가지는 누구나 쉽게 채워졌다. 단점 다섯가지를 도무지 못채울 사람도 있고 쉽게 채워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선한 역은 전자이고 악역은 후자였던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악역”은 특정 일에서의 입장의 차이에서 내가 느끼는 바이고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그 사람의 특징이 그러한거라고 오해하지만 그렇게 부딪칠만한 일에서 멀어지면 또 없어질수도 있는 그런 순간의 이미지일 뿐이다.
즉, “악역”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는 안되는 것이고 더더욱 내가 그 어떤 최선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객관적인 존재보다는 주관적인 나의 느낌으로 더 많이 존대한 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때 외갓집에 가려고 기차를 타고 눈밭을 가리며 달리는데 하얀 눈밭의 끝, 저 멀리 산기슭에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는 집들이 몇채 보였다. 그리고 그 앞을 어떤 사람이 걷고 있었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평생 인생을 다 살아도 나랑 한번쯤 만나지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겠구나. 그리고 내가 죽든 살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나와 아무 상관없이 저렇게 잘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참 아무렇지 않겠구나.

내가 겪고 있는 많은 일들이 그냥 이런거 아닌가 싶다.
세상엔 다양한 캐릭터들이 있기에 심심하지 않고 세상엔 다양한 입장들이 있기에 폭발하지 않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겪었던 많은 무관심들이 있기에 나에 대한 사소한 관심에 대한 감사를 느끼며 행복을 느낀다. 나의 순간순간의 표현과 언행을 “악역”이라고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들도 그것을 조그마한 인생의조미료로 느끼기 바랄 뿐이다.

중국어에 損人利己라는 말이 있다. 나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다. 나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聖人(성인)이라고 하겠다. 나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 아닐까 싶다. 가장 무섭고 예측불가인 사람은 나에게 득이 전혀 안됨에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여기에 아주 큰 함정이 있다.
득이 되고 해가 되는 것은 각각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본인은 나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아닌것 같다면, 그냥 조금 상황판단력이 떨어진 사람 정도가 아닐까.

못된 마음을 가진 악역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다 불온전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이러한 사람들이 섞여있는 이런 저런 군집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아가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우연찮게 빠져버렸던 책들이 사회의 발전, 인지의 발전, 정치철학 등 장르였다 보니, 더 복잡한 생각들이 많이 들어버렸다. 내가 생각한 진리가 진리가 아닐 수 있고; 대중적으로 인지하는 보편적인 도덕이 다수인의 폭정(다수인들의 선택에 의하여 소수인들은 자기들의 선택을 오롯이 포기하고 복종해야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방식)일 수 있고; 대부분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꼬박꼬박 여러가지로 상처받아 있고; 내가 주장하는 효율과 질서는 많은 신선한 가능성을 말살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폭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지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던 1년이 2016년이였던 것 같다. 2017년은 연초부터 질풍 속을 달리는 듯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연초의 똑같이 막연한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나에게 그 어떤 주관을 심어줬던 사람일지라도 장점을 더 찾아보는 맑은 마음을 가져보고, 내가 어떻게 보여지나 보다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보편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방법이 뭘까로 마음을 가져보는 그런 사람, 흔쾌히 도움이 된다면 악역도 도맡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보자는 생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정의감”이란 대부분 “교만함”에서 나오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며 나의 무모한 “정의감”으로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직관적으로 “악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일 것이다. 불행히도 사람의 마음은 즐거움은 잊고 상처는 꼬박꼬박 잘 쌓아놓는 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싸울 때 “오빠가 언제 어디서 몇시몇분 뭐하다가 이렇게 이렇게 말했잖아...”라고 늘 얘기한다. 그건 나 진짜 그때 상처받았다는 말이다. 상처에 대하여만 사람은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많이 많이 행복해지면 그런 상처를 잊고 살면서 신경질적이었던 그런 반응들을 안하게 되는데 그건 그야말로 잊고 사는 것이지 치유되거나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네이버 책에서 “상처”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29,000개정도의 책이 뜬다. 상처받지 않는 방법,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 상처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 등등으로 다양한 에세이가 나온다. 그만큼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일이 일상적인 것 같다. 그냥, 어쩔 수 없이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직장동료나 가족같은 친구처럼 나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그럼에도 서로에게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주관과 정의감때문에 반복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행동을 삼가해주는 것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쉽게 한다.

“악역”이란 한가지 한가지 일에서만 단발적으로 나오는 해결을 위한 역할이라면 문제해결의전략일 수도 있고 반복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역할이라면 나에게 경계를 주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향과 단단함을 주는 것이 되겠다. 성향이 다소 다르고 입장이 다를지라도 대동단결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악역을 주축으로 하는 막장드라마가 한류에 커다랗게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이 점점 자극적인 것에만 공감하기 때문인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도덕”이라는 틀에 맞춰 살기 위하여 많이 가식적으로 살고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상처를 주겠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많지 않고, 내가 악역이라고 생각하는 악역은 거의 없지 않나 싶다. “이런 폭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라고 본인에게 이야기를 해도 저 말이 내가 한 말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냥, 단단해지는 것도 나름 고통스러운 과정이니 아무나의 아무 생각 없는 행동 또는 말 때문에 너무 쉽게 상처받지 말자는 취지에서 해보는 이야기다. 막장드라마처럼 보면서 잠깐 분노하고, 드라마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오는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박근혜와 최순실을 겪으면서 우리가 비로소 알게된 "민주"와 "정의"의 그 어떤 구석의 일말의 해석이 있다면, 그런 것이 "승리"로 끝나지 않고, 드라마에서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찾게되는 평정과 우리의 미래로, "악역"에서 끝나는 드라마가 아닌, 우리가 단단해지는 그런 드라마이기를 소소히, 소소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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