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련: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

업무경력 : 2006년 9월 ~ 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중국변호사

[서울=동북아신문]1073일만에 세월호가 수면위로 다시 떠올랐다.
우리 아이마저 지켜주지 못하는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 건지, 수백명의 아이가 물에 빠져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 마저도 국가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법을 지키라고 우리를 강요하고 공권력으로 폭행과 감금 및 사형까지 선언해주는 이 나라의 법은 왜 존재하는 건지, 나는 오래 동안 분노를 해왔다.
대통령이 탄핵되고서야 비로소 세월호가 인양되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내심 진짜 그런 나라는 아니었으면 한다.

2014년 4월의 그 아침, TV 속의 사고 선박을 보면서 다 구조되겠지, 괜찮을 꺼야 하는 마음으로 가벼운 아침을 맞이했다. 점심을 먹고 들어왔는데 구조 소식은 없고 배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선배들은 아이를 가지면 산부인과부터가 전쟁이었다고 한다. 아이 출산 이후 소아과가 문제이고. 아이가 열이 한번 나면 20만원이라는 진료비를 한번 내고 병원에 들어가거나 3시간을 줄서거나의 선택이라고 한다. 북경은 어른들도 호흡하기 어려운 공기를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육아와 관련된 여러가지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다며 부러워했다.

이렇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미성년 성폭행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친 아버지가 친 딸을, 어린 친 딸을 성폭행 하고도 아이에 대한 가족의 비난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거나 딸이 남은 인생 마저도 망쳐가고, 이런 수많은 기사들을 보면서 성폭행에 관대한 이 나라에 대하여 비난하고 불평하였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나마 좋은 인프라를 가지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음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수백명의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낼 시도조차 하지 않은 모습을 세월호 이후의 24시간 동안 여실히 보여주었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사실을 은폐하고자 천일 넘는 시간 동안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폭도”라고 몰아붙이면서 까지 자기들의 체제를 지켜가고 있었다.
2014년의 그 봄에 나는 휴가를 내고 5살난 사윤이의 손을 잡고 안산에 다녀왔다. 사윤이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이고 이 나라가 누구를 지키고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오지 않은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이었다.
내 아이에게 해야 하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한 어른의 반성. “엄마”라는 이름은 사랑의 대명사처럼 보여진다. 언제나 따뜻하고 아련하고 가슴 한 켠이 저리게 하는. 우리 엄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는 차가운 사람이었고 따뜻한 말 한마디 또는 따뜻한 스킨십 한번을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 하지만 나에게 엄마는 나에게 아무 이유 없이 안정감을 주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사윤이를 낳고 난 이후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니가 한번 해봐, 아이의 인생에 삿대질 하는 것보다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를.”
우리 엄마는 늘 숨어서 지켜보기만 하셨다. 선택은 항상 나의 몫이었고 엄마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셨다. 어른들의 책을 뒤적이는 나를 보고 어린이 잡지를 시켜 주셨고 새벽에 학교에 불려가는 나를 1분이라도 더 자라고 정확하게 시계를 들고 시간 맞춰 깨워 주신 분이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것은 또 사뭇 다른 일이었다.
엄마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럴 것 같아…” 였던 것이 “그런 건가, 그래도 되나…”가 되 버리는 생생한 경험이 되는 것이다.

친구가 그런다.
늦은 나이까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살아보니, “가족”이라는 주변 사람들이 많이 느끼는 감성을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고 그것이 가슴 한켠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뭔가 서글프다고.

사윤이가 생기고 나서 나는 심한 입덧에 시달렸다. 먹을 수 있는 건 하루에 자두 두어 개랑 생 오이 한 개 정도였다. 토할게 뭐가 있다고 또 그렇게 토해댔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면 등뒤로 사람이 살짝 스치고 지나만 가고 너무 울렁거렸고, 잠깐 토하고 나면 개운해지는 것이 아니라 3개월 내내 배멀미를 하고 있는 것 마냥 혀 끝에 침이 고이고 입이 쓴 그 상태 그대로 지냈던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속이 편해지면, 우리 아이에게 이상이 있는 건가 마구 긴장하다가 다시 울렁거리면, “참 다행이다…”하면서 티도 안나는 배를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실핏줄이 터지고, 주근깨가 생기고 역류성식도염이 생겼다.
그래도 나날이 나오는 내 배가 사랑스럽기만 했다. 무럭무럭 자라나 내 배를 쿵쿵 차주는 힘찬 발길질이 행복하기만 했다. 나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 고마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누구 하나 이렇게 아이를 낳지 않은 엄마가 있을까.
산후조리원에서 여러 아이와 여러 엄마들을 보지만, 하나같이 한껏 지쳐있고 약해진 몸으로 내 아이 한번 더 안아보고 한번 더 젖을 물려보려고 세시간 네시간 씩 노력하는 모습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를 낳았고 이 약하디 약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슈퍼맨이 된 듯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오롯이 가장이 되었고 오롯이 내 가족이 생긴 희열도 불안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커버렸지…라고 할만큼 우리 아이는 순간 자라는 것 같기도 하고, 하루하루 오른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하루가 오롯이 24시간으로 느껴지면서 더디게 더디게 크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뒤집고, 첫 걸음마를 떼고, 친구가 생기고 수다를 떨고, 학교에 가고… 나의 어린시절은 까마득해서 기억도 안나는 순간순간을 너무 생생하게 내 눈앞에서 변해가고 살아간다.
아이가 채 자라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걱정한다.
이 아이에게 사춘기가 오면 나는 어떡하지?
내가 마음이 많이 넓어야 할 것이야,
내가 인내심이 더 많아야 할꺼야,
내가 더 노력하고 내가 더 참고 내가 더 좋은 엄마가 될꺼야…

이렇게 사춘기가 지나가면 아이의 진로와의 전쟁을 엄마는 또 때이르게 스스로 시작한다.
얘는 왜 꿈이 없는거지,
얘는 왜 욕심이 없는거지…

엄마의 머리 속에서 이 어린아이는 벌써 사춘기를 지나 대학을 가고 연애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한참 또 한참 앞서간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꿈도 이야기 해보지 못했는데, 욕심이 없다고 나무라기만 했는데 엄마의 앞서간 마음에 어설픈 성화에 마음껏 놀아보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없어진다면…

후배들이 워킹맘이 너무너무 힘들다고 상담을 많이 해온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일을 하지 않고 24시간 오롯이 아이만 바라보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 모든 것을 다 줘도, 엄마란 아이에게 항상 미안한거라고. 내가 일을 해서 미안한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을 덜 해서 미안한 것도 아니라고. 엄마는, 그냥 엄마니까 늘 미안한거라고.

이렇게 엄마는 아이를 낳으면서 빚쟁이가 된다.
있는 것을 다 퍼주고 없는 것도 끌어다 주고 그래도 미안하고 그래도 못 준 것 같은.

지난 주말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시간차를 두고 놀러 나갔는데, 그 사이에 사윤이가 어디에 나갔는지 전화를 도통 받지 않는다. 무슨 일 있겠어…라고 하면서도 수없이 불안하고 걱정하고 오버하고 있었다. 상상도 비교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래서 안되는 것은 그래서 안되는 것이니까.

나도 남편도 전혀 “유난스럽지 않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명품을 입힐 생각도 유기농을 먹일 생각도 천재교육을 시킬 생각도 앞서나갈 생각도 전혀 없다. 지금 이 아이의 가치관과 이 아이의 판단력과 이 아이의 마음이 너무 잘 만들어져 있기에 그런 것들을 존중하고 믿어주고 함께 하고 싶다. 그 아이들에게 좋은 앞날을 만들어주기 보다(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당당한 행복한 삶을, 달달한 사랑과 생생한 슬픔과 진지한 고민,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세상 부모는 세상 엄마들은 이렇게 그들만의 철학과 그들만의 “육아관”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기 전의 우리 아이들에게 그 어떤 사명감을 가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우리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꿈을 가지고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 배에서 뛰쳐나가는 캥거루 마냥.
“유난스럽지 않은” 우리 부부 마저도 그런 것들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서야 비로소 갖게 되는 인생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님만 보더라도 마흔이 넘은 내 아들이 아직도 품을 뛰쳐나가지 못한 아이 마냥 노심초사 걱정하신다.

정도의 차이를 불문하고 “엄마”라는 사람은 이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고 처절한 자기와의 전쟁을 치룬다.

다달이 한푼 한푼의 세금 내역을 바라보면서 이런 엄마의 사랑과 전쟁이 그냥 엄마들 스스로의 전쟁 이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타이타닉처럼, 먼저 우리의 아이들에게 구명정을 내주는 나라였으면 좋겠고, 세월호처럼 우리 아이들이 아프고 위험할 때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온 나라의 힘을 합쳐서 그들을 구하려고 하는 그런 나였음 좋겠다.
엄마들은 그 수많은 영정사진들이 졸업사진이었어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라온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금 더 스스로 노력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앞날을 생각하며.
이런 처절한 엄마들의 사랑과 전쟁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란, “국가”라는 구속과 보호를 위한 이 인간의 발명체는 모든 인류역사의 근간이 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가장 우선 순위가 되고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존엄”이 가장 기본이 되는 그런 존재였으면 한다.

어제는 꿈자리가 너무 뒤숭숭했다.
우리 아이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을 밤새 쫓아다녔던 것 같다.
세월호가 인양된 탓이었을 것이다.
장담컨데, “엄마”는 나의 아이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온 힘과 온 목숨을 다해 쫓아다닐 것이다. 그것이 가슴에 박힌 이 대못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그것이 그 대못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남게 하는 유일한 이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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