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K여성위원회 박옥선 전회장(현명예회장),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31번 , 재한동포문인협회 고문
【서울=동북아신문】5. 긴박했던 순번 확정 과정

3월 19일 면접을 보고 이튿날인 20일 오후 13:00 여의도 국회회의실에서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정견발표가 있었다.

나는 밤새워 발표문을 준비했다. 비록 2분이란 짧고 짧은 발표를 위해 다듬고 또 다듬어 준비시간은 2시간이 아니라 몇 곱절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마치 모범학생이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참답게 완수하듯 나는 발표문을 정성껏 준비해 갖고 여의도를 향했다.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자는 모두 45명이었다. 그런데 이 45명을 마치 인도카이스트처럼 A`B`C 세 개 등급을 매겨 나눴다.

A그룹에 속한 비례대표 후보자들은 절대다수가 정당 오너들의 직접적인 추천을 받은 분들이거나 혹은 누가 봐도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이의가 없는 기본상 당선 안정권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A그룹 후보자들은 국회의원 당선이 이북 속담을 빌려 말하자면 메 놓은 점심이었다.

B그룹에 속한 후보자들 가운데 운이 좋으면 당선자가 나올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다수가 탈락할 것이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B그룹의 후보자들 이러할진대 C그룹에 속한 후보자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당선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였다.

B그룹 후보자들에게는 그나마 정견 발표 자격을 부여하여 자신을 어필할 기회가 있었다. 가장 비참한 것은 C그룹후보자들로서 아예 정견발표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것이다. 그 2분의 발표 때문에 얼마나 머리가 쥐가 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던가! 그런데 발표도 못해보고 그냥 스스로 물러나라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참으로 억울했다. 물론 나뿐만 억울했던 것이 아니라 전체 C그룹 동료들 모두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잘 하는 말, ‘짜고 치는 고스톱’이 뻔했다.

총선 시 각 정당 비례대표는 사회 여러 분야를 대변하는, 즉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로서 국회에 진출하여 자신의 분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입법 활동에 힘쓰는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서책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는 사회 취약계층 각 분야를 대변하는 후보자들 다수가 C그룹에 속해 있었다. 나는 중국동포출신신분으로 추천 받았으니 당연히 C그룹에 속했다.

과연 이 인도카이스트를 방불케 하는 A`B`C그룹 나누기가 말썽 없이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었다.

그날 중앙위원회 비례대표 선발 투표 회의는 여기저기 고성이 오가고 싸움이 벌어져 한바탕 아수라장이었다.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투쟁의 장을 떠올리게 하는 국회모습이었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A`B`C 세 개 그룹으로 나눈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 C그룹 후보자들에게 정견발표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회의는 본론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여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오후 16:00 파행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자께서 내일 회의를 다시 개최하오니 회의시간을 별도로 통보할 것이라고 알렸다.

45명의 비례대표 후보자들은 한 마디 정식 발언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싸움구경만 하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나와 같이 서울에 사는 사람은 아무 때나 여의도에 가기 쉽지만 지방에서 상경한 후보자들과 중앙위원들은 불만의 원성이 말이 아니었다.

21일 오전 11:00 회의가 개최된다는 전화를 받고 여의도에 몸을 향했다. 아무리 호사다마라는 성구가 있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지만 이해 못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나를 실은 자동차가 한강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 회의시간이 또 오후 13:00로 미뤄졌다는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냥 가야 하나, 집에 돌아갔다가 시간 맞춰 재출발해야 하나? 그러나 달리는 차는 한강 위라 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그냥 생각 없이 페달을 밟는 쪽을 선택하였다.

여의도에 도착하니 오후 열린다는 회의인데 벌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후보자들끼리 서로 인사 나누느라 분주했다. 회의 시작 전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 후보자들이 개별적으로 중앙위원들과 담소를 나누는 분들도 있었다.

13:00 열린다던 회의는 또 미뤄져 15:00에 열릴 것이란다. 조율이 심통치 않은 것 같았다. 즉 A`B`C그룹을 타파하고 전체 45명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과정이 무척 잡음이 많은 것 같았다. 15:00 열릴 것이란 회의는 또 17:00로 미뤄졌다. 아무래도 접점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던지 17:00 회의가 시작되었다. 본래 비례대표 후보자가 45명으로 압축되었었는데 그 가운데서 C그룹에 분류된 후보자들 일부가 자진사퇴하고 또 다른 이유에 의해 사퇴 자가 발생하여 투표에 붙인 후보가 모두 35명으로 줄었던 것이다. 나도 C그룹에 속해 있어 당선 가망이 제로라고 여기고 그만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었다. 물러서자니 추천해준 분에게 미안한 일이라 생각되어 갈 데까지 가보자고 맘먹고 기다리기로 작심하였다.

오후 17:00 시작된 회의는 도중에 중단을 반복하여 새벽 05:00에 끝났다. 장장 12시간 동안의 회의였다.

35명 후보자가 2분씩 발표하고 투표 진행하고 개표하여 결과를 발표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장장 12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마라톤 회의가 진행된 이유는 개표시간만 3시간 걸렸다고 하니 나머지 조율시간들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전날 11:00 전에 여의도에 도착하여 이튿날 새벽 05:00까지 장장 18시간 당사에서 머물렀다. 아무리 다부지고 탄탄한 신체라도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중앙위원들도 후보자들도 모두 지치고 또 지쳐 있었다. 눈가엔 졸음이 가득 찼고 얼굴은 밀랍을 바른 듯 노랗게 변해가고 있고 걸음걸이들이 영 힘이 없이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것 같이 굼떴다.

난 건강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정신상 너무 긴장되어 있었던 탓이었는지 18시간 뻗히느라 다리가 떨리고 머리가 무거워났고 목소리가 기여들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손에 든 핸드백조차 귀찮았다.

그렇지만 보람은 있었다. 나는 비례대표 순번 23번을 배정받았던 것이다. 투표 걸친 결과라 어찌 보면 기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의장 300명 되는 중앙위원들과 후보자들 가운데서 내가 안면이 있는 분은 박영선 의원과 이성 구로구청장 뿐이었다. 이 두 분은 투표결과가 발표되자 나를 포옹해주었다. 아버지 엄마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대한민국 20여 년 생활 처음으로 타인한테서 정확히 한국 사람들로부터 살가운 온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났다. 23번 순위가 당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꼴찌만 면해도 다행이라 생각했었는데 12명 제쳤다는 것은 나로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듯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세상엔 공짜가 없는 법이다. 모든 결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19일 면접 보고 나는 나 자신을 홍보할 자료를 준비했었다. 전단지식으로 간단하게 유인물을 준비했다. 21일 오전 11:00 시작된다는 회의가 오후 17:00 정식으로 시작될 때까지 6시간이란 여유가 있었다. 이 시간이 결국 나에겐 귀중하고 유용한 시간이었다.

나는 250여 명의 중앙위원들 중에서 딱 두 분 빼고 나머지는 전부 생면부지였다. 이 분들에게 무작정 전단지를 나눠드렸고 말을 걸었다. 처음엔 선거가 의례 그러려니 공식적으로 대하던 분들이 차츰 나에게 관심 갖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전라도를 비롯한 여러 지방 중앙위원들이 나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다. 다수 분들의 질문은 서로 비슷했다.

“왜 국회의원이 되려 하나?”

“동포 몇 세냐?”

“부모는 살아 계시냐?”

“동포들이 돈을 벌면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던데 굳이 입법에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나?”

등등의 질문들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한반도에서 태어나 9세에 만주에 이주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돼지를 키워 가족들이 한 근의 고기도 드셔보지 못하고 팔아서 그 돈으로 쌀과 야채를 구매하여 독립군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총을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운 조선인만 독립군 혹은 그 후손들을 독립유공자로 취급하는데 후방에서 독립운동을 도운 전체 조선인이 모두 독립군이며 그 후손들은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이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이 현재 고국 한국에서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이 기회에 한국정치인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기로 맘먹고 밝힐 것을 밝혔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체험했고 남북한을 모두 경험한 조선족은 앞으로 남북통일에 있어서 가장 큰 가교역할을 할 것이란 점도 힘주어 토로하였다.

또 조선족이 돈을 벌면 고향에 돌아간다는 잘못된 인식에 대해 자세하고도 진지하게 설명하였다.

조선족은 코리안드림에 나설 때 누구나 수년간 감옥에 간 셈 치고 꾸준히 돈을 벌면 고향에 돌아가 살겠다는 맘가짐으로 한국에 온다. 그러나 한국은 감옥이 아니고 한국에 온 조선족은 ‘절욕스님’이 아니다. 살다보면 인간의 희로애락을 맞보고 살다보면 한국에 정이 들게 되고 해가 거듭할수록 정착하려는 움직임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재한조선족은 과거 돈을 벌어 중국에 송금하고 중국에다 아파트 구매하고 미래설계를 중국에 비중을 많이 두었으나 지금은 가족 다수가 한국에 왔고 송금할 일도 굉장히 줄었고 중국에 아파트 구매도 현저하게 줄고 있으며 되도록 한국에서 계속 살고자 노력한다. 과거 한국에서 성냥갑 같이 비좁은 쪽방에서 살던 것이 지금은 쾌적한 전세로 이사 가는 비례가 굉장히 많이 늘어나고 있고 한국에서 빌라나 아파트 구매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조선족이 점차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 올 조선족이 대량 증가하지는 않겠지만 현재 있는 조선족 다수는 한국에서 계속 정착할 움직임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해 나아가기 위해 관련법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정부의 재외동포법 미숙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방문취업비자(H-2)는 사라져야 하고 대신 재외동포비자(F-4)를 전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현행 방문취업비자는 사무직에 종사할 수 없고 재외동포비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어 폐단이 심각하다. 생계를 위한 노동이 불법이 되어 벌금을 납부하게 만든 법이 과연 합리적인가?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족은 할아버지 살던 고국에 와서 등록증을 발급받으면 한글 이름이 아닌 영어로 기재하는 것은 정말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어 재한조선족문제해결과 조선족이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책해 가려면 좋은 정책을 많이 만드는데 힘쓰기에 나서야 한다.

나는 상기 이와 같은 내용으로 중앙위원들을 설득하였다. 약자를 동정하고 재한조선족 나아가서 전체 조선족사회에 관심이 있는 중앙위원들이 나를 밀어준 것 같다. 그래서 23번 순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23번 순위에 만족했다. 그런데 자고 순번이 23번에서 31번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 선거에 대해 상식이 있는 사람은 답을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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