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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단편소설/이동렬]저 꽃이 불편하다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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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08  09: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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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렬 :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 동북아신문 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장편소설집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2부와 중단편소설집 '눈꽃서정', '토양대' 2부 출판. 연변자치주문학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한민족글마당 소설 대상 등 10차 수상

[서울=동북아신문]  빈(彬)이 죽었다. 눈을 감은 듯 뜬 듯, 피를 흘리다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도 펴지 못한 채, 자정을 못 넘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날 저녁으로 병원과 가까운 장례식장으로 이송이 됐다. 장의자동차에 운구와 마주 앉아 헤라는 참 모질게도 빠르구나! 생각했다. 인생이란 너무 짧은데, 빈의 생은 더욱 짧았고,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됐다. 

  영(英)이라는, 장례지도사가 곁에서 봉투를 건넸다. 일곱 통을 뗀 시체검안서란다. 이만큼은 있어야 해요, 일처리 하자면. 고인은 갔으니 산자의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英)은 고인과 아는 사이 같았다. 헤라는 봉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왜? 자기가 이런 것을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흐느낌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줄줄 흘러나왔다. 구름을 밟듯 허무했다. 

  가슴이 떨렸다. 빈이 죽다니? 삼년이 조금 못 미치는, 일천하룻밤을 살을 섞고 살았었는데, 이런 식으로 갈라질 줄은 몰랐다. 헤라는 엎어지듯 빈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촉감이 너무 싸늘했다. 싸늘하다 못해 차고 시린 느낌마저 났다. 망자는, 반드시 춥고 시린 몸으로 저승을 떠나야 하나보다. 살아가는 자의 세상의 온기를 싫어하나 보다. 헤라는 빈을 더 안아줄 수 없었다. 
 
  영은 조용했다. 질서 있게 행동했다. 장례식장에서, 수시(收屍) 절차 밟느라 바삐 돌았다. 병원 냉장실에서 초혼을 할 때도, 산자와 망자의 가운데서 거래하는 제3의 거간꾼 같았다. 고인의 얼굴을 안마하듯 매만지며 부드럽게 펴주고, 옷과 몸을 바로 했다. 염라대왕이 보내는 저승사자가 온다며, 사자 밥을 준비했다. 반듯한 제상위에 메(밥) 3그릇, 나물 3가지, 그리고 엽전 3개, 짚신 3개가 간소하게 놓았다.   

  빈아, 빈아…서울 마포동 00번지 김빈(金彬) 복(復)! 하고 세 번 가볍게, 중얼거리듯 외쳤다. 빈이 내세에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영의 눈매는 가늘다. 눈빛도 싸늘하고 매정했다. 그러는 것 같았다. 영이 느닷없이 빈이 좋아하는 시를 아느냐? 고 묻는다. 헤라는 은근히 놀랐다. 빈이 말입니다, 이런 부탁을 했어요. 얼마 전에, 내가 죽게 되면, 김소월이의 ‘초혼’(招魂)보다 더 초혼다운 것으로 초혼을 해 달라고…짐작이 가나요?

  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은, 죽어도 낭만으로 가는 나그네다. “저 꽃이 불편하다,” 헤라는 낮게 중얼거렸다. 장례식장이지만 둘 뿐이고, 낯도 모를 사내가 곁에서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헤라는 속으로 읊조렸다. 초혼이라기보다, 응어리가 맺힌 하소연 같은 시구(詩句)이다. 그렇게 흘러나왔다.      
  -모를 일이다, 내 눈 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 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이미 고인이 된 박영근의 시이다. 술을 먹으면 빈이 가끔 낭만시인처럼 읊어주던 시다. 영도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삶이란, 죽음이란, 이런 거다! 죽음도 삶의 연장선이고, 또 그 일부라고 하지만… 우리는 현재, 이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빈은, 저 세상을 가서도 날 가만두지 못하네! 헤라는 푸념을 했다.      

  빈소는 간소하게 꾸몄다. 제일 값나가는 게 영정을 장식한 국화꽃이다. 헤라는 국화꽃이 별로였다. 평소 국화꽃이라면 입에 침이 마를 줄 모르는 빈에게는, 좋아한다고 했으나 가슴 속 한쪽 구석 어디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삼년 전, 친구 어머니 장례식장 영정 앞에 국화꽃을 바치고 나서부터, 국화꽃은 죽음과 연계된 꽃이란 이미지 때문인 것 같았다.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예로부터 4군자의 하나로, 덕망을 지닌 정절(貞節)의 꽃으로 찬양을 받아왔지만, 춘국(春菊), 하국(夏菊)은 그렇다고 쳐도, 추국(秋菊) 동국(冬菊)은 찬 서리를 맞고도 오연한 화사함에 더욱 차가운 살기가 느껴지곤 했다. 역시, 헤라는 죽음과 연관된 것은 참지 못했다. 그런 연고로 또 빈이 그런 국화꽃 속에 영정으로 남아 천연스레 웃고 있으니 속이 너무 불편했다. 가물거리는 향내와, 국화꽃의 살기와, 빈소의 어두운 빛이 음습했지만, 헤라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상복을 입었다. 흰 옷깃에 검정 저고리와 치마, 빈의 여자로, 빈과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작별을 해야 한다. 조문객은 많지 않았고 빈소는 썰렁했다. 빈의 가족은 상하이에서 저녁 열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할 것이다. 부인과 열일곱 살 난 따님이 급히 비자를 받았단다. 십여 년 소식을 모르다가, 가는 사람 간다니까 보러온단다. 미국에 계시는 빈의 어머니가 얼마 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아버지도 풍을 맞아 장례에 참가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영이 알려준 소식이다.  

  빈의 소속 건설현장 박 소장이란 오십대의 나그네가 영정 앞에 번대머리를 조아리고는 그녀한테 깍듯이 조문을 한다. 슬픔이 많겠습니다.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 몰랐는데, 휴… 저희 회사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S 보험회사에서도 다녀갔으니, 잘 될 겁니다.
  잘 된다? 뭐가? 헤라는 그 말의 껍질을 벗기고 싶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빈에게, 보험처리가 뭐가 중요한가!… 빈소에는 아무도 없다. 헤라는 치마로 무릎을 덮고 쪼그리고 앉았다. 영정 속의 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파트 공사장 15층에서, 붉은 해가 막 솟아오를 무렵, 빈은 발을 헛디디며 추락을 했다고 한다. 깔아놓은 판넬이 부러진 것을 보면 현장감독의 안전 불감증으로 생긴 추락사란다. 아마도, 기막히게 둥근 밝은 해가 새벽의 찬 빛을 걷어내며 막 솟아오를 순간에 헤라는 빈과 통화를 했던 것 같았다. 빈은 숨을 가다듬고 아침 해가, 저 불덩어리가 가슴 뭉클하게 떠오르는 게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내가 보다 죽어도 후회 없을 만큼! 그러고 보면 빈은 전화를 끊고, 그때 어쩌다 잘못된 것 같다.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을 만큼, 붉은 기운이 가득한 아침 햇빛이, 추락하는 빈의 몸뚱이와 일그러진 얼굴을 쫓아가고 있다. 상상만 해도 헤라는 몸에 가벼운 전율이 왔다. 영은, 제일 싼 수의를 주문했다. 화장터도 비용이 제일 싼 부근의 S 화장터에 예약을 하고, 사흩날 아침 발상하기로 스케줄을 잡아놓았다. 임종 시 빈이 부탁했다고 한다. 가는 사람은 옷 한 벌이면 그만이라고, 빈은 자기한테 철저하게 인색했다.

  그날 저녁, 빈과 헤라는 빌라 창가에 앉았다. 봄기운 완연, 오랜만에 쥐포를 씹으며 소주를 했다. 둘만이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 빈은 몸이 안 좋아 보였다. 헤라는 오른팔로 빈을 껴안으며 움푹 들어간 볼을 만졌다. 세 살 아래인 사내가 안쓰럽다. 남동생 같고, 정말 아까운 남동생 같았다. 이름 못할 연민에 가슴 아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볼을 매만져주면, 빈은 날카롭고 실오리 같이 가는 눈을 슬며시 감는다. 별로 못생겼다. 코도 크고, 얼굴도 길쭉하고, 젊은 나그네가 이마에 주름 몇 가닥 깊어져 있다. 

  그래도 마, 사랑한다! 욕정으로 뜨거워지는 입술이 입술을 찾는다. 그런데 차가웠다. 속이 차면 입술도 차진다. 헤라는 무엇이 빈의 가슴을 차게 만드는지 알 것 같다. 그를 그렇게 만든, 가슴에 덧입혀진 세상의 얼룩진 가운을 녹여내면, 빈은 마침내 칡뿌리처럼 꿋꿋해진다. 들판에서 발정한 황소가 된다. 모든 것이 벗겨지고 낭자해지고 질펀해지는 시간! 더 이상 리얼리즘 한 게 없다. 헤라는 빈이 파고든 자궁 깊은 곳에 생의 무엇이 끈끈해지며 잉태되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무엇일까, 그게?…

  첫 만남부터 둘은 아이러니하고 굉장했다. 그날 저녁에 헤라는 오랜만에 친구 몇과 소주를 했다. 중국 연대 뻬갈 향이 너무 좋다. 영등포 대림동에만 오면 꼭 중국술 생각이 난다. 저녁 무렵 대림역 12번 출구 중앙시장 골목길은, 발 내디딜 틈이 없이 오가는 행인들과 장사꾼들의 떠들썩한 소음과, 요리 볶는 향내에 섞인 꽤 독한 술의 은근한 향기와, 대륙의 여러 지방 방언으로 얼룩진 억양들로 좀 특이한 조선말과 중국말들과, 또 거기에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각설이의 타령으로 시끌벅적하다. 

  혼탁하고 글로벌적인 요란함 속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가 깊숙이 숨을 들이쉬면 자기가 살아온, 맛과 체취가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득 엉켜 까닭모를 기분을 둥둥 띄워준다. 누군가가 다투고 주먹다짐 질을 해도 정겹기만 했다. 갑자기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났다. ‘취선향’(醉仙香)술집에서 내려다보니 벌써 몇몇이 주먹질하며 엉켜 붙어 싸우다가 경찰들에게 바로 제지를 당하며 목덜미가 잡혀 단속 차에 오르고 있었다.
  불쌍한 것들, 또 벌금 100만 까졌네. 노가다해서 그 돈 벌자 해봐, 밑구멍 안 빠지나. 벌금 이백이면 비자 연장이 안 돼요. 술 먹으면 고이 먹지, 쯧쯧. 멋―있잖아, 사람 사는 재미, 저런 것도 있어야지! 저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 사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으면 저럴까. 찬성이다. 코피가 터지던, 잡히던, 잘한다, 잘해요! 자, 건배! 진-달-래(진실하고 달콤한 내일)를 위하여…

  다들 혀가 꼬부라져서 무얼 지껄이는지 몰랐고, 와하하 방자하게들 웃었고, 그때 왼쪽 상에서 웬 예순쯤 돼 보이는 남자가 상을 차고 일어났다. 주글주글한 얼굴에 흰점 뻘건 점무늬가 얼룩덜룩하다. 저런, 중국 놈들 모조리 잡아 추방시켜야 해! 모조리… 저놈들이 동포라고? 다 되놈들이야! 한민족, 한 뿌리? 씨발, 좋아하네!…어라, 저년이 헤라 아니냐? 이 육실 할 년! 너 이년 이리오지 못할까?…

  술이 잔뜩 취한 늙은이가 불시에 그녀 앞에 나타났다. 팔을 잡아끌더니 무작정 귀뺨을 갈겼다. 헤라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사시나무 떨듯 했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 그때, 또 곁에서 낯모를 서른 예닐곱 살 돼 보이는 청년이 씨발,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영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순간 늙은이가 꼬꾸라졌다. 빨리 튀어! 젊은 나그네가 헤라의 손을 확 잡아끌며 밖을 향해 뛰었다. 신발도 찾아 신지 못했다. 입구에 들어 닥친 경찰을 넘어뜨리고, 둘은 길바닥에 차고 넘치는 인파를 뚫고 달렸다.
 
  택시에 앉자 헤라는 맥이 쪽 풀려 깜박 정신을 놓았다. 곁에서 안아주는 느낌이 포근했다. 이 남자 누구지?…헤라는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
  헤라는 한남동 가택 인근 병원에서 주사 한대 맞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남자가 그 남자였다.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고즈넉했다. 한남동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마음에 고요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대림동에서 한남동으로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일 게다. 주변에 대사관저와 고급주택들이 즐비해 있고 외국인 국제학교들이 많이 모여 있다. 길에서 3미터 정도 높게 성토를 해서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는 고급주택 대문 안은, 아늑한 정원으로 꾸려져 있다. 고급 수종들 사이에 낙수 물 소리가 나고 고운 새들이 우짖는다. 주택내부는 거의 유럽풍 스타일로 설계가 돼 있을 거고,    

  삼성, LG가(家)가 포진해 있는 동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한 삼성ㆍLG 가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등 모두가 한남동의 주민이란다. 대한민국 상위 1%에 드는, 헤라는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린다. 한남동 뒷산인 남산은 흙으로 덮힌 육(肉)산이어 살기가 없고, 조망권에는 한강의 흐름이 들어와 재물이 끊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재벌 2~3세와 정치인들과 군부 수장들과 외교관들이 막강하게 웅집(雄集)해 있는 고장! 한남동에 관한 얘기는 후에 이 남자, 김빈(金彬)이한테 들은 것이다.

  헤라는 빈의 집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몸이 불편하니 자고 가라고 해서 그냥 순종을 했다. 그게 인연이 됐고, 그녀의 생에서 그날 밤만큼 싱숭생숭하게 보낸 적이 없다. 빈은 위층, 그녀는 아래층에서 잤고, 자다가 일어나 몸을 씻고 눈을 감는데, 위층에서 자박자박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고, 또 빈이 몸을 씻는 샤워소리가 났고, 또 빈이 층계를 밟는 소리가 났고… 한밤 중 두 사람은 물 먹으러 나오다가 마주쳤다.   

  사실은, 제가 있는 빌라도 여기서 멀지 않아요. 주방에서 둘이 앉아 와인을 마시다가 헤라는 넌짓 말을 건넸다. 알아요, 그래서 자고가시라 했어요. 빈의 대답에 헤라는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몇 달 전부터 헤라는 빈과 자주 마주쳤다. 슈퍼에 갔다 오다가, 간혹 밖에 쓰레기봉투를 내어놓거나, 아침 조깅을 하거나, 그럴 때면 귀신이 곡하듯 빈의 얼굴을 보게 된다. 빈이 싫었지만, 또 어느 때부터 싫지 않았다. 빈이 훔쳐보든 말든, 은연중 헤라가 돌아보든 말든, 둘은 말없이 세월이 한참 가도록 서로가 바람에 스치는 옷깃의 여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대림동에서 잠적한 후 헤라는, 서울대 OO교수의 가정부로 종적을 감추고 있던 참이다. 대림동은 왜 갔어요, 하필이면 …? 헤라는 신기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는 헤라씨는? 빈이 잔을 냈다. 세상에는 어느 날 흩어진 인연들을 한데 모아놓는, 묘한 자기마당이 존재하나 보다. 중국 음식 먹으러 대림동에 잠깐 들렸다가 헤라를 본 것, 또 그 영감도 있다.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에요. 추위에 웅크러진 듯 가슴 부둥켜안는 헤라를 빈이 품어주었다. 말 말아요. 낯에 닿는 남자의 입김이 따갑다. 낯선 남자한테 헤라는,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그 사람은 저의… 영감이었어요. 흐, 영감, 이 말 좀 별나네.…둘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작심하듯 입을 다물고 와인 잔만 비웠다. 빈의 마르고 까칠한 손이 어깨를 잡고 헤라를 품에 끌어당겨 품었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남자와, 더 낯설어서 그 껍질을 깨고 싶은 어떤 것들이 상충했다. 빈에게도, 단단한 게 있다. 깨고 나올 수 없는, 소라의 껍데기와 같은 것, 그러한 이질감을 헤라는 느꼈다. 
  괜찮아요? 빈이 물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헤라는 빈의 뺨에 도발적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행위, 적어도 헤라한테는, 그런데 도발을 하고 있다. 창부처럼. 그럼 이 남자는 뭐냐. 기생오라비? 낯선 사내의, 낯선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조용히 덮어주었다.  
  할 말이 있어요. 전, 이런 여자, 아닌데… 그 영감과 일은…   
  사내는 그녀를 거뜬히 안아 침대 위로 가져갔다. 헤라는 눈물이 났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변명이라도 좋다. 그런데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나, 왜 이러지? 절 나쁜 여자로 보진 말아요. 사람 사는 게 그렇고 그런 게 아닌감? 살다 보면, 그렇고 그런 일들이 생기더군요. 혼자 잘 난 척, 순진하구 도고하구, 솜처럼 부드럽고 깨끗한 척 했다고요, 옛날에는 저도. 아파요, 좀 살랑살랑… 아아… 발이 푹푹 빠지는, 러시아와 이웃하고 있는 우수리강변 검은 땅에서 태어나, 수 십호가 사는 동네 조선애들과 어울려, 우리말 우리글을 배우며 자랐어요.
  누른 볏짚으로 이은 초가집에 회칠한 벽이며, 반듯하게 닦아놓은 동네길이며, 조선사람이 사는 동네같이 아담하게 꾸려놓고, 좋은 일 궂은 일 있을 때면 서로 돕고 위로하며 나누어 먹으며, 그렇게 살았다구요. 전, 어느 때부터인가 그 마을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게 됐고, 결혼을 하고, 남자애 하나 낳았었고, 그게 평생 직업이 될 줄 알았는데… 또 어느 때부터 마을에 조선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러시아로, 서울로, 연해지구 청도로, 위해로 떠나가더군요. 제가 농사짓는 부모님 두고 연태로 나올 때, 수십 호가 세집 밖에 남지 않았어요. 애는 부모님한테 맡겨두고… 지금은, 하얼빈 모 전문대에서 공부하고 있구요. 가만, 10년?… 휴, 나 미친다. 걔 못 본지 벌써 그래 됐나? 대림동에서 만난, 그 영감 얘긴 어떻게 해야 하나? 넘, 치사합니다. 연태 여객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 관광가이드 해드리고, 도와주겠다구 해서… 눈 딱 감고 결혼비자로 입국을 했지요. 

  경기 독산동에다가 사우디에 가서 번 돈으로 사둔 빌라 두 채, 세 준 게 있다며, 한국 오면 같이 안 살아도 반드시 도와주겠다고 엿물 촐촐 발라 얼리더군요… 휴, 그 영감이 바라는 건 머겠어요? 그것도 껌 같은 집착, 메스꺼워요. 입국해서 보니 빌라 두 채는 아드님의 소유가 돼 있구, 영감은 정부 보조금을 받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 나 이런 말 안 할래, 돌아버릴 것 같아! 인생 한번 더럽네요. 맘 한 번 딱 잘못 먹은 것 땜에, 이 꼴 이 꼬락서니가 된 내가 한심하지요.…
         
  헤라는, 이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 빈이 알아먹든 말든, 기억 같은 건 안 한다.  아침에 깨어나니 빈은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나오다가 제스처를 했다. 덤덤히 웃는다.
  일요일, 헤라가 쉬는 날이다. 맑고 따뜻한 햇볕이 비쳐드는 침대 위에서 헤어스타일 하는 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다. 적나라했고 리얼리즘 했다. 희다 못해 흰 빵 같은 살결은, 섬뜩할 만치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헤라는 왼쪽 무릎 위에 손바닥만 한 상처를 손으로 가렸다. 식당 파출부로 뛸 때 설렁탕 국그릇을 엎는 바람에 덴 자국이다. 그 영감도, 그 것 못내 신경 썼다.
  이 아까운 피부를, 우짠데요, 이 아까운 것을!…, 또 그 피부로 인해 발정한 무엇같이 집착을 했다, 날이 하얗게 새도록, 구역질 날 것 같은, 메스꺼움을 그녀는 용케 참는다. 시들어가는, 꿈질거리는 몸뚱이가 너무 싫다. 애처롭게, 가냘프게 떨고 있는, 찢어진 흰 창호지 같은 자기 피부의 환영을 보는 것 같다. 내, 잘해 줄께. 국적 바꿔주고, 그 뒤론 내가 잡지 않을 게, 결심한다. 영감은 그런 말을 5년 세월을 했고 6년 하고 보름을 더 지나서야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바꿔주었다.  

  그 일을 끝내면 영감은 어김없이 담배를 빼문다. 이제 마, 볼 장 다 봤으니 떠날 거지? 제발, 그러면 못 쓴다 잉? 절대 안 돼, 용서 안한다! 날 떠나면 그날부터 국적 같은 것 소용없다 잉, 니가 어느 놈하고 눈이 맞아 돌아가던 상관 안 할 게니까, 연락하면 얼른 와야 한다. 섭섭하게 안 대할 거니까. 알았나?… 이에 헤라는 농반 참반 히죽거렸다. 이 영감태기, 환장을 했나? 몰랐다, 몰랐어! 그래도 영감이 불쌍하긴 하다. 측은하다. 영감의 볼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댔다. 마지막 위안이라고,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럼요, 사장님!     
 
  헤라는 이튿날 짐을 싸서 가출을 했다. 폰 번호부터 바꿨다. 대림동 중앙시장 골목길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잠적을 했다. 영희라는 가명을 쓰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런데 영감은, 그녀를 수면 위로 낚시해 올리는 묘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왔다. 가끔 신사다운 조문객들이 와서는, 또 조용히 떠나갔다. 몇몇 지인들만 알렸다고 한다.
  헤라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상하이에서 온 가족들은 조문을 끝내고 모텔로 돌아갔단다. 영은 그러는 게 아주 당연하다는 어조이다. 모든 것을 위임했습니다. 빈도, 그랬으면 했구요, 가족은 그냥 편하게 놔두라고… 영은 언제나 깎듯 했고 사무적이다. 돌아버리겠네, 상주의 의무도 위임을 할 수 있나!? 아예, 날 상주로 생각하나 봐! 세상 살다가 보면 참 별 희괴한 일이 다 있다고 해도, 세상 밑구멍에 이런 일은 없지 않는가! 헤라는 두 손을 벌려 보였다. 허구푸게 웃었다. 부인의 입장에서도 빈의 애인에게 자리를 내준 것인지 모른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새벽, 발인 시각이 가까워 왔다. 헤라는 잠깐 눈을 부쳤다가 깨어났다. 흰 보에 싸인 관 앞에 섰다. 영결식을 지내야 한다. 염습은 엊저녁 영이 했다. 고인을 정결하게 씻고 소독해서 수의를 입혔다. 영혼이 떠나간 빈의 시구(屍柩)는, 잿빛을 발하며 질식시킬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반함이라고 해서 고인의 입 안에 불린 쌀을 우측, 좌측, 중앙 순으로 가득 물렸다. 입관을 끝내자 관에 빨간 천에 흰 글을 쓴 명정을 덮는다. 다, 됐어요! 영이 낮게 말했다. 빈은 이제, 학생김해김공빈지구(學生金海金公彬之柩)로 이름을 바꿔 가졌다. 정말, 이 세상에서 빈은 제 할 일 다 한 것이다.  
  영은, 사색이 돼 있는 헤라를 위로했다. 빈이, 정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꼭 전해주라고 했습니다. 그냥, 이 시간만 같이 보냅시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헤라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뺨을 타고 흘러, 입가에 짠 맛을 냈다. 그래, 잘 가. 다 잊고, 저 세상 가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편하게 살아요!… 가슴이, 미여지게 아팠다. 

  막, 피어나는 붉은 목련꽃이 비바람에 사정없이 찢겨 떨어진 것을 보는 듯, 울음이 가슴 꽉 차오며 미어졌다. 누가 영영 자기 곁을 떠났다고 해서, 이렇게 아파 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아내란 말이 뭔데?… 나, 이 사람의 아내보다는 더 진짜 아내가 아닌가. 사랑하니까 이렇게 아프겠지! 헤라는 고인이 남기고 간 마지막 뜻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빈은, 한남동 OO번지에 거주했다. 
  대문은 소나무 재목을 써서 검정 색상을 입혔다.   
  빌라는 아래 위층으로 된 60여 평 쯤 된다. 이십여 년의 세월의 비바람을 견뎌낸, 당시는 꽤 고급스러운 빌라였을 거다. 뜰에는 한송(韓松) 세 그루가 있다. 짙은 군청색의 굵은 자갈로 깔끔하게 깔려진 뜰 안은 빈이 거두고 있다. 빈은, 아래 위층의 빈 방을 혼자 다 썼다. 한 달이 지나도 전화 한 통 오지 않았고, 빈도 누구하고 연락 한 번 안하는 것 같다.
  부친은 미국 LA 모 대학 교수로 재직 중에 있고, 모친은 남편 뒷바라지 해주는 가정부란다. 한 1년 세를 냈어요. 싸게, 일하기 싫어하니까 세돈 받겠다나. 벌어 갚아야지요. 빈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래 층에서 위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정확히 마흔 여덟 개, 위층의 침실과 아래층의 침실은 수직으로 상하 배치가 돼 있고, 난간과 계단은 자연산 소나무 재목에 검은 칠을 입혔다. 실내 인터리어 색상도 검정빛에 가까운 고동색 같은, 무거운 색상을 많이 썼다. 

  가끔 거실에서 빈이 흔들의자에 앉아 홀로 책을 읽었다. 약간 침침한 가택분위기가 빈의 굳어진 얼굴과 고풍스레 조화되어 묘한 스릴을 냈다. 빈,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학자? 시인? 음악가? 건축가? 사업가? 금융 샐러리맨?… 아무 호칭을 부쳐도 맞지 않은 듯 싶고, 또 아닌 듯 싶은 남자! 샤워를 하고 겨드랑이에 살짝 향수를 뿌린 헤라는 아직은 탱탱한 몸매를 타올로 감쌌다. 향긋한 바디워시 장미꽃 냄새를 빈은 좋아한다. 언니, 살 냄새가 정말 좋아. 빈은 언제부터인가 헤라를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니까 동생이 좀 어떻게 해도 눈 감아주세요, 하는 말처럼 들린다.  
  나? 난, 그냥 빈이요. 김-빈이! 귀신도 때려잡는다는 대한민국 해병대 OO8기. 대북침투 특수훈련 받은 해병대 대원! 언니, 나 무섭지 않아요?
  솔직히, 당신 무섭다. 아니, 무섭지 않다.   
  헤라는 연하의 남자한테 이런 애교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빈에게는, 낯선 것과 익숙한 무엇이 공존해 있다. 낯선 것은 무섭고 익숙한 것은 헷갈리기도 해서, 또 무섭다. 무서운 만큼 유혹도 더 강해진다. 살을 섞고 밥을 같이 먹고 팬티마저 벗은 채 나체로 위 층 아래 층을 뛰어다니고, 밖에 나가선 아닌 보살하고, 그러는 자유도 가끔 무섭다. 빈이 때로 하루 종일 침묵만 지킬 때면 정말 불안하다.   
 
  가정부 일은 철저한 게 있다. 주인의 스케줄과 가족생활 리듬에 맞추어 줘야하는 것. 식구 성정 파악하기. 요리 잘하기. 애들 내편 만들기. 부지런 하기. 너무 무식하지 않기…. 천성이 깨끗하고 부지런한 헤라는 가정부가 딱이다. 식당 서비스에 비하면 고급이다. 하루 열두 시간을 쉴 새 없이 손발을 움직이고 죽으나 사나,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잘 다녀가세요. 또 오세요, 를 앵무새하며 얼굴에 웃음 발라야 하는 것에 비하면 신사 일이다. 머리 좀 더 굴리면 된다. 근무시간에는 빈과 전화주고 받지 않는다. 가끔 문자만 주고받을 뿐, 빈이 귀찮게 폰 벨 여러 번 울린 적이 딱 한번 있다. 나, 집인데…왔다갈 수 있어요?            

  헤라는 싫었지만, 슬쩍 주인집을 빠져나왔다. 빈은 거실 흔들의자에 기댄 채 누워있다. 책을 펴서 얼굴을 덮고 있다. ‘저 꽃이 불편하다,’ 시집 표제가 눈에 띄었다. 정말 모를 일이다. 왜, 저런 시, 그 시만을 좋아할까? 펼쳐진 책을 보니 어김없이 그 시다. -모를 일이다, 내 눈 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또, 저 꽃이 불편하다? 저 꽃이 대체 누구신감?… 이렇게 자꾸 부르면 어떻게 해? 나, S 교수님 댁에서 나오고 싶지 않단 말이야. 돈 받으며 이렇게 땡땡이치는 거, 나 못해요! 헤라는 응석부리듯 말했지만, 진심은 살아있었다.
  알았어. 나 좀, 먼저 살려주시오! 빈이 일어나며 헤라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과, 얼굴과, 몸 전체가 불덩이 같았다. 빈이 이내 비틀거리며 갑자기 쇼크를 했다. 체면이 많은 남자, 내심 깊이 상처 같은 무언가 감추고 사는 남자. 성정이 차고, 냉정하고,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느닷없이 뜨거움을 폭발시키는 남자.… 헤라는 빈을 너무 잘 안다. 너무 모른다. 
  헤라와 빈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대림동을 다닌다. 저녁에 양꼬치며, 탕수육 등 중국 요리를 시켜 먹는다. 어떤 분위기를 타본다. 빈이 대림동의 융합문화를 은근히 즐기자 헤라도 기뻐했다. 고급스럽고 평온한 한남동 생활이, 때론 적막하고 갑갑할 때도 있다. 자기한테 맞지 않은 옷을 껴입은 듯, 그래도 절대 벗어 던질 수 있는 옷이 아니다.       

  헤라는 가끔 폭음을 했다. 그날도, 눈을 가슴츠레 떴다. 창밖에는 비가 쏟아 붓고 있다. 길가, 빗발 속에 네온 등간판들이 중국식으로 깜박거린다. 그녀는 빈의 승용차 뒤 좌석에, 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것. 빈은, 그 빗소리를 들으며, 두억시니처럼 그린 듯 앉아서 창 밖을 지켜보고 있다.
  깨어났어? 정신 좀 들어? 난, 내일부터 삼성 건설현장에 나갈거에요. 영이란 해병대 친구의 형이 현장소장이에요. 나보고 관리를 부탁해서… 빈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머리를 뗐다. 
  그래요? 잘 됐네 뭐. 그런데, 당신, 당신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요?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 백수건달이 아닌감? 헤헤… 헤라는 농을 하고는 지나친 것 같아 설레발을 쳤다.   

  그래, 난 백수건달이지. 그래도 대한민국 남자들은 백수고 건달이라도, 한다하면 하는 겁니다. 못해 낼 일이 없지요! 흐흐, 난 그런 일들을 해봤어요. 베이징 왕징 지역에서 아파트 건축 현장관리를 해본 경력이 있지요.… 나, 서울대 건축전공 졸업한 거 알던가? 흐음, 그냥 머리는 나쁘지 않아 공부를 좀 하긴 했는데….
  에-이, 정말 서울대 졸업생 맞아?… 헤라는 이 남자 무슨 소리하냐, 하고 묻는 눈길로 입을 비쭉거렸다. 건축전공, 그것도 서울대에서? 뻥치기는… 하긴 좀 뻥치면 어떤가. 너무 귀엽다. 헤라는 빈의 머리를 애기처럼 쓰다듬어 주었다. 빈은 숨을 죽이고 가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난, 때론 저 빗소리가 무서워!
  빗-소리?…그랬다. 무섭다. 헤라도 동감했다. 이날 저녁따라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진다. 창대같이 내리 꽂힌다. 몽롱한 불빛을 마구 조아대는, 무수한 새의 부리같이 길 바닥에 이는 뽀얀 물보라가 가슴 얼얼하게 맞혀온다. 서로가 걸어온 길이 달라도 추억 속에 소금알맹이로 짠하게 맺혀있는 상처만은 비슷하지 않을까. 아, 빈의 아픔을 공유하고 싶다! 함께 하는 여자이고 싶다! 빈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차차, 빗물 위에 추억의 찬 거품을 피워 올렸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나는 늘 베이징을 생각하지. 개발이 채 되지 않은 왕징 지역 어느 길모퉁이에, 폭우에 참담하게 부서지는 가로등 불빛이 가슴을 찢고 또 찢었지. 지금도 빗소리가 내 가슴에 창날처럼 꽂히고 있고, 그 아픈 환영은 항상 차고 시렸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만큼, 날카로운 칼이 가슴살을 저몄었지. 거듭 해묵어간 추억은 그 장소, 그 시간, 그 여자와 함께 늘 빗속에 냉동돼 있었지…
  빈은, 오밀조밀하게 생긴 여자를 좋아했다. 키가 작아도 괜찮다. 의학박사인 모친 박씨도 키가 작으니까. 이마가 튀어나오고, 코며, 눈이며, 입이며 제가끔 오밀조밀 생겼단다. 뜯어볼 맛이 있으면 더욱 좋고, 그게 묘하게 어우러져 어떤 불같은 욕망이나 질긴 야욕이나, 또 어떤 묘한 스릴을 보여주면 더더욱 좋겠다. 서구적인 얼굴에 지적이고 늘씬한 몸매의 여인은 속내를 가늠할 수 없다.
  군에 가서 2년간 3.8선에 늘어놓은 철조망을 붙잡고 오르내리며 이북에 총칼을 겨누고 재대해 돌아와서 보니, 서구적인 그의 약혼녀는 이미 남의 여자가 되어버렸단다. 또 하나, 서울 모 대학교 재직 중이던 그의 아빠 곁에도 늘 서구적인 여자가 붙어다녀 어머니 박씨의 심경을 상하게 했단다. 빈은, 자주 저녁을 굶었다. 아빠가 오면 밥을 같이 먹자며 박씨가 고집스레 달랬고, 그러면 빈은 자기 방에 들어가 더 고집스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다. 잠결에 아빠가 서구적인 여자와 키스는 것을 보기도 하고, 사춘기일 적에는 아빠의 그 여자 머리채를 끄잡아 당겨 마구 섹스하는 꿈도 자주 꾸었단다.      

  어느 날 저녁, 아빠의 그 서구적인 여자는 정말 가위에 머리채가 뭉턱 잘리는 불행을 당했다. 그의 아파트 안에서, 여자는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었다. 왼손에는 가위, 오른손에는 잘린 머리카락 한 묶음을 쥔 박씨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울이 큰 눈에는 야릇한 불꽃이 튕겨 나올 듯했고, 두툼하고 실룩거리는 입술이며, 뭉툭한 코이며, 움씰움씰거리는 얼굴 근육들이 제가끔 전투태세로 오밀조밀 묘한 스릴을 보여주고 있었다. 빈은, 그러는 모친이 참말 변태에 가깝게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보였다. 
 
  얼마 후, 부모님들은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빈은 한결 느슨해진 박씨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뜯어보다가 고개를 외로 꺾었다. 한국에 남았다. 이내 발령을 받아 베이징으로 떠났다. 허나, 오밀조밀한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분노가 마냥 가슴을 허비었다. 미친 놈! 빈은 까닭 없이 욕설을 했다. 가끔, 느닷없이, 그런 욕설을 내뱉는다. 남들은 씨발! 하지만 그는 미친놈! 한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그렇게 욕설을 하다보면 세상이 모두 미쳐가고, 자기도 미쳐 가는 것만 같다. 하, 어떤 놈이 미친 놈인가? 상식에 어긋나는 일만 해서는 미친 놈이 안 된다. 오밀조밀한 분노가 있어야 한다. 서구적인 분노는, 분노가 아니다. 동양적인 분노라야 한다. 그런 분노가 무엇이냐. 솔직히, 빈은 비가 오나, 해가 내리 쬐거나 2년간 군사분계선(MDL)을 지키며, 비무장지대(DMZ)의 숲과 북쪽 땅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지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시시각각의 낙엽들이 가슴에 쌓이고 썩어 곰팡이가 나고, 또 곰팡이 속에 미친 풀잎이 짠한 햇빛 속에서 어질어질 자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저 지랄, 염병할! 미친놈들 땜에!… 그러다가도, 내가 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내 이 청춘, 아까운!… 풋풋한 시간들이 자갈바닥같이 속절없이 말라버리고, 낙동강처럼 흘러가버리고… 빈은, 머리를 부둥켜안고 죽도록 미친 놈을 떠올려 보았다. 서구적인 여자, 교수 아빠, MDL, 군사대항, 또 살인, 방화, 속고 속이는 끝없는 미친 경쟁… 미친 놈의 명쾌한 모습은 없다. 한국 사람이기에 그냥, 이대로가 싫은 것. 빈은 그렇게 생각했고, 묵묵히 순교도적인 베이징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날도 초여름 저녁, 한적한 거리에 비가 쏟아졌다. 외롭고, 쓸쓸하게, 가끔 비바람이 가로세로 거리를 쫙쫙 핥으며 모질게 불어쳤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빗속에서 엎어질 듯 갈지자를 걷는 여인이 위태롭게 눈에 띄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빈은 곁을 지나다가 차를 세우고 그녀를 병원으로 호송을 했다. 비에 젖은 앞가슴이 흰 적삼을 치밀고 유난히 불끈 솟은 젖무덤 한 쌍을 보자 가슴이 얼얼해졌다. 얼굴 전체가 오밀조밀한 가운데,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이 크고, 입술이 두툼하고, 그래서 박씨 같은 생김새였지만, 박씨와는 또 달라 보이기도 했다.  
  그녀네 셋집, 아침 햇빛이 해롱거리는 침대 위에서 송이란 여자가 열심히 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이건 눅거리 크림임다. 냄새는 꽤 좋지만…
  향이 넘 좋은데요 뭐, 인물이 좋아서 그러나? 허허허.
  에구머니나, 내가 무슨…신세 너무 졌음다. 보답할게 없어 어쩌지?…
  빈은 왠지 그 말에 목구멍이 바싹 말랐다. 햇빛이 아롱거리는 오밀조밀한 그녀의 얼굴에 어떤 야성이 뽀얗게 오글거린다. 여자가 갑자기 통통한 손을 내밀었다. 빈은 신들린 듯 그 손을 잡았고, 둘은 순식간에 강한 자석에 당긴 듯 엉켜 붙었다. 봄 뜰에, 바싹 마른 풀잎들에 불길이 확 당기듯 한 느낌에 당혹감을 뿌려 칠 수 없었지만,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마력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둘은 애욕의 광야로 질주했다.
  후에도 둘은 꼬박 한 달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거침없이 섹스에 몰입했다. 온 몸에 기운이 싹 빠질 때까지, 마약을 한듯 어질어질할 때까지, 화장실에서 느닷없이 코피를 왕창 쏟을 때까지, 한생의 섹스 욕구를 소진해버린 듯, 그 동안에 비축되었던 자연 에너지를 몽땅 불살라버렸다. 이진희! 그녀는 조선족이라고 했다. 고향은 연변 도문, 조선 사람들이 살던 동네에서 자라서 한어를 잘할 줄 모른단다. 함경도 사투리에 연변 향토의 억양과, 세속에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적인 것, 또 그 어설픔과, 갑갑함까지, 그리고 괜한 심술과 오기까지, 빈은 그녀가 사랑스럽기만 했다. 

  빈은 세집을 마련하고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빈은, 그가 어떻게 돌보듯 상관하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파트 계단 청소부로 열심히 뛰는 인품이 돋보였다. 이제 집에 있어요, 그런 일 하지 말구. 그 돈 내가 줄게. 하고 빈이 말리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두 벌어야 함다. 당신만 믿고 못 삼다. 나한테 줄 돈은 당연히 줍시구, 그래도 난 내 일을 하겠슴다. 그랬다. 자기도 일만은 꼭 하겠단다.
  그 일이 천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아침 일찍 청소도구를 가방에 챙겨 넣고 가만히 문을 떼고 나갔다가 저녁 늦게 히죽이 웃으며 들어오는 여자. 매번 삯돈을 꼬깃꼬깃 챙겨서 서랍에 넣어 잠그고, 그 돈 그렇게 모아 무얼 하느냐 물으면, 나도 꿈이 있씀다, 고 말한다. 무슨 꿈? 하고 물으면, 그냥, 사람 사는 게 또 무슨 꿈이겠슴다? 하고 눈을 흘긴다.
  빈은 차츰 스스로가 의문이 갔다. 머릿속에서 ‘악령’의 그림자가 사라진 듯, 입에서 그 ‘미친 놈’의 욕설이 나가지 않았다. 베이징의 공기와 인파의 한 분자(分子)로, 햇빛 한 오리로, 자기한테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한 것이다.… 
 
  그해 초가을 모친 박씨가 미국서 베이징에 날아왔고, 진희와 셋은 2박3일로 두만강변의 소도시 도문으로 관광을 떠났다. 육로 교두보인 중국 도문시와 북한 남양구 교두보, 강 건너 편이 북한 온성군 남양구. 빈은 진희한테 슬쩍 물어보았다. 언제 장모님 좀 구경시켜 주겠냐고. 도문에 왔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오밀조밀한 얼굴은 말귀를 못 알아들은 듯 표정이 담담했다. 글쎄… 이사갔슴다, 오래 됐슴다. 머요? 오래 됐어요?…빈은, 순간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 했다. 왜 이제 그 말을 하지?… 그러든 말든 그녀는 박씨와 팔장을 꼭 끼고 다녔다. 건너편 남양주 북한사람들의 동정을 호기심 갖고 바라보았다.     
  박씨가 빈을 불렀다. 북한 청진이란 도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태평양을 마주한, 70만 인구의 연해도시. 빈은, 군에 있을 때 북한 주요도시들에 대한 공부를 좀 했다. 청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나진‧ 선봉직할시· 부령군·회령시가 청진공업지구로 이뤄졌다…  흐, 그러냐. 70년대, 그러니 40여 년이 됐네. 그때만 해도 청진시는, 그랬었는데…

  조선에 가봤음다? 진희가 깜작 놀란 듯 물었다. 연변사람들은 북한을 조선이라고 한다. 아, 아니다… 들은 얘기가 있어서… 박씨가 말을 얼버무렸다. 빈은, 박씨가 너무 이상했다. 무언가가 가슴에 섬뜩 마쳐 왔다. 당황했다. 자식한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빈은 박씨가 태어난 고향을 모른다. 강원도 삼척이라고 하나, 한번도 외갓집을 가본 적이 없다. 6.25 때 온가족이 피란 떠나다 폭격을 맞고 잘못됐단다. 그럼 혹시…?
  저녁에 박씨는 일찍 주무시겠다고 해서 호텔에 남겨두고 둘은 맥주 다섯 병을 사서 두만강 강변 호젓한 곳을 찾아서 술을 마셨다. 건너편은, 사람이 사는지 마는지 불빛 한 오리마저 없다. 어머님은, 고향이 어딤까? 맥주 한 컵을 들이켜고 진희가 물었다. 혹시, 조선 청진시 사람 아임까? 옛날, 청진시 지리를 너무 잘 알고 있음다. 물어보는 것두 그렇구, 말투도 그렇구…느낌이 그렇슴다. 여자들은 느낌이 있는데…

  무언가 빈의 가슴을 꽈-악 막아왔다. 말이 나가지 않았다. 설마 출생을 자식한테 비밀로 할까? 그래도, 좀 그렇긴 했다… 맥주는 거의 그녀가 혼자 마셨다. 곁에서 소피보는 소리가 났다. 거리낌이 없다. 희끄무레한 불빛에 비쳐 강물이 꿈틀거리며 흘러간다. 진희가 그의 무릎을 베고는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싼 채 눕더니 한참 코를 골았다. 그러다가 그의 허리를 더욱 꽈-악 껴안았다.
  난, 하고싶씀다.
  머얼?…허엇, 여기서?
  여기가 어떻씀까? 하기시오!       
  그녀의 그곳은 벌써 젖어있다. 숲이 축축해 있고, 손에 끈적한 것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곳은 무언가 분출을 기다리는 화산구 같았다. 고개 숙인 어떤 남자라도 그 화산구 앞에 서면 금방 빨려들 것 같은 충동이 올 것이다. 그런 야생적인 것, 빈은 그녀한테 끌려 세 번이나 분출을 하고서야 화산구를 빠져나왔다. 여자가 그의 팔을 베더니 곧 어깨를 떨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눈에 눈물이 흥건해 있다. 
  왜 울어? 왜 우는데?… 빈이 놀라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넘, 행복해섬다. 당신이 넘 잘 해줘서임다. 힘두 좋구… 
  이런, 별… 못하는 말이 없네.
  저 말임다, 사촌언니가 있는데, 저 건너편 어느 시골에 살던 사촌언니 말임다. 한 밤 중에 이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데요. 물밑의 돌에 미끄러져서, 텀벙텀벙 온몸을 허우적리며… 보초병이 문뜩 나타나 총을 쏠 것 같기도 하고… 아, 내 인생이 끝이구나! 그래서 막,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데… 에구머니나, 이걸 어쩜다? 누군가 첨벙첨벙 물살을 가르며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잠까. 그래서 허우적거리며 물을 먹구, 또 먹구 하다가 정신이 희미해지더니 몸채가 둥둥 뜨며 의식을 잃었담다.
  야, 야, 이거 내가 수중혼이 되는가부다. 그래서 생각나는 게 한 가지, 자기가 아직 새파란 처녀란 것, 총각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는 것, 어떤 홀아비라도 좋으니 한번 처녀 딱지 떼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것… 그래서 죽어가면서도 꺼이꺼이 통곡을 했담다. 휴, 사람이 살다보면 먼저 사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데, 너무 자신들을 얽어매어 놓는 이런저런 올가미들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덫에 치워 자꾸 남만 원망하젬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지 않슴까?… 

  그건, 그렇기도 하지… 그런데 사촌언니는, 어떻게 됐소? 빈은 이 여자가 참 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고졸인가? 그녀가 받은 교육에 그런 말을 할 줄 알다니?… 가만 생각해보면 너무 비밀이 많은 여자다.
  밖에 비바람은 잠잠해져 갔다. 그래서요? 헤라는 이상한 질투를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빈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그런 세부까지 리얼하게 묘사해서 그런지 모른다. 그 사촌언니란 여자, 새벽에 깨어나 보니 이쪽 강가 돌부리에 걸려 있었데요. 누구도 쫓아오며 위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도강을 하다가 제 방귀에 놀라 참변을 당할뻔 한 거지. 그 얘기를 끝내고 한참 눈물을 짜며 웃고 있었는데, 느낌이 이상했어요. 혹시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아, 조선 여자인가요?… 헤라도 꿈 깨듯 놀라며 물었다.
  그게 말인데, 이튿날 아침, 어머니가 호텔방으로 나를 불러놓고 이런 말을 했어요. 진희 말인데, 아무래도 수상쩍다. 북한여자 아닌지 모르겠다. 나하고 같은 청진이 고향 아닌지, 괜히 의심스럽네. 그곳 사정 너무 빤하게 알고 있더라. 말투도 그렇고, 암튼 느낌이 그래, 여자의 직감이란 게 있잖느냐? 그렇게 의심을 하니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거 어떡하니?… 난, 니들 혼사는 반대다. 정말 결사반대다! 하고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아이참, 의심도 팔자네. 조선족입니다. 중국 신분증도 있고. 설마요?… 중북(中北) 변경지대에 살다보면 서로가 닮아 간데요. 또 북한 여자면 어때요, 어머니도 적이 북한이 아닌가? 하고 짐짓 농을 했더니 어머니 기색이 꺼멓게 죽어가더군.
  미모, 교양, 직업 같은 거 다  떠나서, 너 얼마나 시끄러운 일들 많이 겪자고 그러냐? 니 아빠도 나를 만난 거, 내 출신 때문에 오랫동안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아냐. 미국 간 것도, 다 그렇고 그런 원인이 있어서다. 니가 다 알지 못하는… 분단국가인 한국에 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손톱만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어요. 정말 난감했지. 그런데 더 난감하고 황당했던 일은, 또 그 이튿날 베이징으로 돌아가자마자 진희씨가 자취를 감춘 거였어요. 

  아파트에 있는 자기 짐을 싹 빼서, 종적도 없이… 간다온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공기처럼 증발했으니까. 제길, 인생 한번 더럽고 허무하더군! 아마도, 어머니가 진희씨를 찾은 것으로 짐작이 갔지만, 그렇다고 미국 돌아간 어머니한테 따지며 야단칠 수도 없는 노릇이구. 허허, 진희, 그 여자, 그래도 그렇지, 할 말이 있으면 나하고 해야지, 그렇게 증발해버리면 어떻게 해요?… 한국에서도 그랬는데, 베이징에서 또 한 번 당하고 나니 여자고 남자고 믿을 사람 없더군. 이놈의 세상이 그렇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어요…
  헤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 꽃이 불편하다! 란 시제가 떠올랐다. 저 꽃이 왜 불편한 가를 읽을 만 할 것 같다. 빈은, 진희가 가출한 후 사흘만에 회사에 사표를 냈다. 뭔가, 그냥, 정리해야 했다. 빈은, 아파트에 들어앉아 두문불출했다. 꼬박 한달 하고 열흘을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정, 배가 고프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배신감을 가라앉히는 데 열흘, 열등감과 자포자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열흘, 또다시 밀물처럼 밀려드는 그리움에서 빠져나오는데 열흘, 모든 것을 잊고 마음이 담담해지기까지 또 열흘…
  초봄의 황혼 빛이 창가에 노랗게 물들 때 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이 자라서 눈을 가렸고 수염도 교도소의 죄인마냥 더부룩이 났다. 퀭, 해진 눈에는 정기가 없고, 저 사람이 누구냐? 하는 의문갈고리만 걸려있다. 

  나, 빈이야. 김빈이, 도망간 진희의 남자…이렇게, 못생겼구나! 진희는, 그래서 도망갔나? 무슨 말이든 해봤어야 알게 아닌가. 서로 상처만 남기지 말구… 정말 갑갑하고,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지네. 그래도 살기는 살아야지, 어떻게 해. 나, 잘 살고 있지? 잘 살아갈 거지?… 휴, 그래도 같이 생활했으면 훨씬 더 재미있고 사는 보람이 있을 텐데, 북한 여자고, 조선족이고 그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데… 대체 뭐가 문제였지? 생활해온 패턴이 다르니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야야, 진희 너, 기본은 지켜야지, 기본!… 흠, 흠, 나 또 원망하네. 그러면,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기본이란 게 뭘까? 내가 정말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 봤나? 흐흐, 자기 생각만 생각이라 했지…
  빈은, 머리를 싸쥐고 또 거울 앞에 주저앉았다. 진희, 그 여자의 입이 말하고 코가 말하고 눈이 말하고 몸뚱이가 말하고, 모든 게 제스처를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이건 너무 허무맹랑한 로맨스가 아닌가! 빈은, 그러고 헤라를 만났다고 했다. 그 후, 빈은 결혼을 하게 됐고, 또 이혼을 했다고 한다. 딸애와 그애 어머니는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라는 가슴이 조금씩 아팠다. 깊은 상처를 받은 빈이, 또 어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질까봐 겁이 났다. 그 여자 말인데, 그 후에 한번 봤어요? 정말 북한 여자인가요, 조선족인가요? 조선족 막 치부하는 거 나 싫은데… 헤라는 빈의 까칠까칠한 머리를 빗질하듯 촘촘히 쓰다듬어주었다.
  난, 그후, 한 반년 동안 베이징을 떠나지 못했어요. 미련 때문만이 아니고…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은 미련 때문이었지만!… 그러다가 한번 만났지. 역시 비바람이 부는 날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그녀를 보는 순간, 처음 진희를 보았던 풍경을 딱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날씨도 그랬고, 느낌도 그랬지요. 앞에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분명 진희였어요. 비틀거렸고, 곁에서 차를 세워놓고 달려가서 부축을 하고 보니 진희가 옳긴 옳았었는데… 세상에 난 그때보다 놀란 적이 없었어요.
  사이즈가 굉장히 큰, 너무 헐렁한 큰 티를 입고, 아래도 삼각팬티가 보일만큼 희고 엷고 투명한 반바지를 입은 진희의 온 얼굴에 잠이 오돌오돌 일었는데, 세상에 배를 보니 한참 불룩해져 있지 않겠어요? 나, 미친다. 이 여자, 임신했나!? 정말 임신했구나!…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진희 배속의 애가 내 애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조물주는 우리가 영원히 함께 생활하라고, 우리를 이어주는, 너무나 귀한 선물을 보낸 거였지요.
  진희는 나를 보더니 낯 빛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마치 생전 모르는 사람을 보듯,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자기 갈 길을 갔어요. 환장하겠네, 돌아버리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진희씨, 나야! 하고 소리치며 앞을 막았지요. 그녀는 한참 나를 뜯어보더니, 그런데-요? 하고 되물었어요. 그런데-요?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내라고 하는 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하는 질문이 아닌가. 말도, 안 된다! 머리가 그만 뻥-해졌지요. 

  순간, 그녀가 나를 비껴 곁을 빠져나가는 것을 나는 돌아서서 허리를 감싸 안았지요.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 해명이 없이 이렇게 떠나면 어떻게 해? 우리가 남남인가, 우리가!…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오해를 풀어야지! 하는 나의 간청에 그녀는 내 팔을 가만히 풀어냈지요. 그녀의 머리이며 얼굴에 소낙비는 정처 없이 물벼락을 퍼붓고 있었고. 아, 애를 봐서라도… 임신이잖아? 그 애를 봐서라도… 제발, 말 좀 듣자, 나는 간청했지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맙소, 이 애가 왜 당신 애임까? 당신 애가 아니기에 제가 당신을 떠난 검다. 다시 한 번 말해줄까, 당신 애가 아임다! 우린 언녕 끝장이 났다구요! 이젠 내 곁에서 좀 사라져 주겠슴다?… 비바람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미약하게 들렸지만,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차고 냉철했지요. 완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빈은, 갑자기 여기서 이야기를 끝냈다. 한참 있다가 빈이 탄식하듯 한숨을 내 쉬었다. 헤라도 깊은 탄식을 했다. 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저 꽃이 불편하다, 를 마지막까지 읊었다. 

  모를 일이다, 내 눈 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 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헤라는 가슴이 얼얼하게 멍이 들어왔다. 피 같은 꽃이 지고, 흩어진 벌건 꽃잎이 흐르고 있었다. 비바람에 짓이겨지고 진흙탕에 엉켜지고 짓밟히고… 아, 그 꽃을 보는 빈이란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다시 헤라를 돌아본다. 나는, 또 그이한테 어떤 불편한 꽃이었을까? 그리고 빈은 나한테 또 어떤 불편한 꽃이었을까?… 헤라는 빈이 왜 자기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헤라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었다. 6년 동안 참고 살아준 영감이 헤라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 경찰에서 점잖게 한번 왔다가라고 하기에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갔더니 그 영감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바싹 마르고 초췌해진 얼굴을 해서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둥거리는 눈빛이 자못 불안했다. 헤라는 가정법원에 이미 이혼을 제출한 상태이기에 영감과의 조우를 한번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소에서는 아니었다.
  경찰은 그녀한테 위장결혼으로 입국을 해서 국적을 취득했느냐고 추궁을 했다. 영감이 이미 자수를 했으니 실토하라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해서 검찰에 송치하겠단다. 헤라는 난생 처음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위장…결혼-이라구요? 헤라는 머리가 뻥 뚫렸다. 꽉, 막혔던 화가 사내 주먹같이 욱, 하고 명치끝을 치받았다. 영감, 우리가 정말, 위장-결혼을 했어요?
  6년을 같이 살고, 단물 다 빼 먹고, 뭐가 모자라서 또 위장결혼이라고 신고를 해요? 당신, 뭐가 부족해서? 뭐-가? 하고 헤라는 절규를 했다. 영감이 와들-짝 놀라더니 안절부절 못했다. 아, 이 사람들이… 난 그냥 헤라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취소하겠소, 취소. 난, 아니요, 아니… 영감은 헤라의 분노에 속이 잔뜩 찔려 있었다. 

  경찰이 냉정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영감님, 여기에 싸인까지 하고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신고는 취소가 안됩니다. 우리가 조사를 해봐야겠어요. 위장결혼을 해서 국적까지 취득한 것은 엄중한 범죄입니다. 그러니 사실대로 얘기를 해야 합니다. 아니면, 죄가 더 중해집니다. 벌금도 많이 나올 거구요. 경찰서를 나선 헤라는 눈앞이 빙빙 돌았다. 내가 정말, 위장결혼을 했나?… 위장, 결혼이겠지?… 어쨌거나, 위장은 위장이었지만, 그래도 6년을 함께 살았는데 위장결혼이라면 억울하지. 저 불편한 영감… 꽃… 젠장, 꽃은 무슨?…
  헤라는 끝내 법정에 서게 됐다. 영감이 위장결혼이라고 승인한 것, 거짓말을 했다가는 벌금을 엄청 때리겠다는 검찰의 엄포에 질려서이다. 후에 영감은, 어떻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술에 푹 젖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며, 행복을 빈다, 내가 죄인이다, 고 울먹거렸다. 헤라는 곧, 며칠 후에 법정에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김빈이가 사고 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화장은 잠깐사이 끝났다. 빈의 몇몇 지인들만 화장터에 따라갔다. 장례지도사 영이 죽은 친구의 부탁을 철저히 들어준 것. 어떻게 보면 영은, 친구가 미리 죽을 줄 안 것 같았다. 갈수록 그런 냄새가 짙게 풍겼다. 빈의 죽음을 두고 빈과 영이 공모를 했다? 아, 너무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런 의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헤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빈과 마지막 작별을 했다. 빈의 시신은, 화장절차에 따라 정해진 시간대에 조금도 어김없이 화장로에 들어갔다. 철문이 빈의 시신을 담은 관을 집어삼키며 입을 꾹 닫아걸었다. 영은, 미동하지 않고 친구가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켰다. 그러는 영이 야속하다는 듯, 헤라는 그의 왼팔을 붙잡고 울음소리를 감키며 가슴을 쳤다. 한 시간 후, 빈의 유골은 가루로 빻아져 자연장 용기에 담겨져 나왔다. 생분해성 수지 천연소재로 생화화적 분해가 가능한 용기다. 수분에 의해 형체가 허물어지며 토양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고인의 평소 유서에 따라 수목장을 하기로 한 것이다.
  수목장은 장수목인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산돌배나무 등이 있는데 영은 한국의 대표나무 소나무를 뒤로 하고 산돌배나무를 선정했다. 봄, 한식 때는 순백의 꽃으로 반길 것이고 추석 무렵에는 향기 그윽한 열매로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봄, 가을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꽃이나 열매로 화답을 하니 죽은 빈과 대화거리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빈이 외롭지 않게 한 해에 한 두 번은 찾아올 수 있으리라.
  화장터에서 분골을 해서 나온 봉안용기를 가슴에 안을 때 헤라는 뒤에서 서성거리는 낯선 여인들을 보았다. 사십대의 부인과 십대의 소녀였다. 이들 모녀는 수목장을 하는데 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서 머뭇거렸다. 키가 작은 여인은 몸매가 그리 뚱뚱하지 않고 화장도 아주 세련되게 했고, 열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딸애는 미모도 뛰어나고 키도 훤칠했다. 어쩌면 빈이 사랑했던 진희란 여자일지 모른다. 그녀가 옳을 것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조선족일까, 북한 여자일까?…설사 북한 여자라고 해도 중국 신분증이 있으니 어쨌거나, 조선족이라 할 게다. 내가 한국국적을 가진 것처럼. 그런데 사흘 후, 나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재판결과에 따라 최악의 경우 한국 국적이 취소될 수도 있다. 이미 그런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이미 중국 국적은 취소가 됐고, 이제 한국 국적까지 잃게 되면 무국적자가 된다. 아, 나는 또 누구의 불편한 꽃이 되고 있는가!?…
  수목장이 끝나자 곁에 있던 영이, 헤라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놓았다. 수고했습니다, 하고 조용히 눈길을 맞춰왔다. 그건 마치 빈이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우울한 검은 구름이 잔잔한 비를 흩뿌렸다. 곧 밝은 해가 구름을 비집고 나왔다. 화사한 햇살이 얼굴을 비춰오자 헤라는 오랜만에 눈살을 찌푸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린이대공원 입구의 의자에 같이 앉아 있던 여인이 헤라를 보고 은근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여인의 손에는 한화 1억3천만 원이 들어있는 우리은행 적금통장이 들려있다. 빈이 헤라한테 남긴 재산이다.
  헤라는 그 돈을 이들 모녀한테 돌려준 것, 그러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음이 갑자기 홀가분해졌다. 빈, 당신이 없어도 이젠 웃으면서 살아야지! 헤라는 다시 한번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했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자기 가슴  속에 더는 불편한 꽃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봤다.   
  내일, 헤라는 재판에 나가야 한다.
  내일의 일은, 내일이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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