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신 상 성 申相星writer119@naver.com소설가, 문학박사. 동국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1979) ‘회귀선’ 소설당선. 한국펜클럽(PEN)국제위원장, 국제한국어평생교육원 원장, (사)한중문화예술콘텐츠협회 이사장, 한국문협남북문학교류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문예평론학회 부회장, 문예운동, 조선문학, 한국문학신문 등 편집위원, 피지(FIJI) 수바외대 초대총장, 서울문화예술디지털대학설립자 겸 초대총장, 용인대 명예교수. 중국 천진외대 석좌교수, 중국사회과학원(해외문학)한국대표, 경기도문화상, 동국문학상, 한국펜문학상, 국가유공자(월남참전), 국가훈장(황조근정훈장) 등 수상.소설집; 처용의 웃음소리, 목숨의 끝, 행촌동 패랭이꽃, 멀리서 만나는 평행선, 인도의 향 등, 평론집; 문학의 이해, 한국소설사의 재인식, 김남천연구, 한국통일문학사, 북한소설의 이해, 수필집;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시간도 머물다 넘는 고갯길 시집;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면, 등 저서 약50여권.
1. 바람이 불었다. 돌개바람이 불 적마다 바람의 끄트머리에선 모래 무덤이 생겼다. 그것은 나지막한 동산도 만들다간 삽시간에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숨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깔끄럽다. 벌떡 일어났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서 편지 나부랭이를 찾아 코를 풀었다. 코는 안 나오고 모래가루만 흩날렸다. 침을 뱉었다. 모래가 섞여 나왔다. 목구멍 근처의 모래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칼칼하다. 여기저기 전우들의 헛기침 소리가 콘셋 벽 위에 그림자로 출렁거렸다.  검은 헝겊을 씌워 보안등을 한 나트랑 휴양지 막사 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그림자들로 날짱거렸다. 담요로 머리를 푹 뒤집어 쓰고 온몸을 돌돌 말았는데도 모래는 코로 귀로 이빨 새로 구멍 난 곳마다 날렵하게 파고 들어와 앉았다. 담배를 하나 물었다. 잠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멀리 바닷물소리가 나들명거린다. 그 소리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왔다. 돌개바람의 날카로운 앞 이빨이   더욱 날카롭게 파고든다. 콧속이 뻐근해 온다. 뒷골도 다시금 멍멍해진다. 적도 근처의 열대이어서 이곳 해변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다. 그믐달 근처로 조명탄이 올라가 폭죽같이 터졌다. 검은 그믐달도 총탄으로 피빛 구멍이 날 것 같다. 멀리 박격포 소리를 배경으로 M16 소총소리가 자장가로 들렸다. 연막탄과 화염 방사기도 간간히 밤하늘을 색칠한다. 중부 월남, 닌 호아(Ninh Hoa) 지역 혼 헤오(Hon Heo) 산 북반부 하늘이 살벌하게 타오르고 있다. 백마부대 29연대장 이창진 대령이 주도하는 ‘박쥐16호’ 작전이다. 그 총소리 속에는 하사 홍종진 첨병 조장의 M16이나 고참 병장 김철남 부조장의 칼빈 소총 소리도 섞여있을 것이다. 홍 하사나 김 병장은 의무병이지만 소총수 보병들과 똑같이 뛴다. 홍 하사는 맹호부대 제1진으로 왔다가 재파월하여 백마부대 제1진으로 다시 왔다. 오로지 전쟁수당으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이다. 1967년 파월 따이한 병장 월급이 54달러였다. 당시 국가공무원 평균 월급이었다. 초급장교 소대장 소위는 거의 우리들의 두 배가 된다. 그는 등 뒤에 구급배낭을 열 십자로 묶고 보병들이 사용하는 M16으로 늘 맨 앞에 자원해 나간다. 용감하다고 할지, 무지하다고 할지, 어쨌든 이 전쟁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살짝 곰보인 그는 육자배기 노래와 구멍난 농담을 혀 끝에 물고 다녔다. 때때로  야전막사를 폭탄 같은 폭소로 몰아간다. 고참 김 병장은 노름도 잘 하고 장사도 잘 하고 사랑도 잘 한다. 그래서 나중에 현지 제대하여 월남 처녀와 결혼도 했다.          담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야간의 불빛은 십 리를 간다. 푸르스름하게 번져 올라가는 담배연기 위로 반투명 맑은 유리조각들이 은하계를 쌩쌩 달리고 있었다. 두 쌍의 낙타가 나란히 서 있는 말보로 담배연기를 폐 속 깊이 빨아들였다. 낙타의 눈동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그윽한 것 같다. 그들의 눈은 늘 사막 끝 지평선에 고정되어 있다. 칼날 같은 모래알이 눈알을 파고 들어도 그들은 먼 지구 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세상을 초월한 눈동자이다. 세상은 잔인한 피 흘림인데 낙타와 은하계는 더없이 평화롭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달려와 발끝을 간질이는 밤바다, 깊은 파도 소리가 속삭여 왔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 진다. 진작 담요를 가지고 나올 걸, 후회했다. 잠 못 이루는 병사들의 그림자 몇 개가 나와 같이 해변을 방황했다. 이번 ‘박쥐16호’ 작전명단에는 내 이름도 올라가 있었지만 연대 의무중대 인사계 할아버지는 내 이름 대신에 왕삼조 상병으로 대체해 놓았다. 내가 필리핀 클라크 미군 병원에서 복귀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날아간 오른쪽 귀창이 아직 치료 중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마냥 흰 붕대를 감고 어떻게 작전수행을 하느냐는 인사계의 호통이었다. 흰색 붕대에 까만 구두약을 칠하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우겼지만 오히려 나를 엉뚱한 이곳 나트랑 사단 휴양지로 쫓아보냈다. 한밤중 반강제로 앰불런스에 태워 밀었다.       우기와 건기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10월초 중부 월남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야전에서 저녁 식사용 C 레이숀을 뜯을라 치면 비가 먼저 뜯어놓은 깡통을 치고 들어온다. 밤새 비를 맞으며 매복을 끝내고 일어서는 아침이면,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소낙비는 저만큼 달아난다. 가슴까지 차 오르는 빗물 참호 속에서 물에 빠진 참새마냥 몸을 부르르 떨며 아침의 정글 속을 뛰다 보면 어느 새 땡볕이 철모(鐵帽)가 벌겋게 달구어지기 시작한다. 점심 때면 철모에 계란 후라이를 해 먹을 정도로 뜨겁다. 한밤 중의 진흙탕이 한낮에는 뽀얀 먼지로 풀썩인다. 밤낮의 기온 차가 약 20도의 영상 영하 사이를 외마치 장단을 친다.       백마부대 의무병으로 쫓겨 오기까지 나는 몇 군데 교육을 거쳐야 했다. 쫓겨왔다기 보다 실은 자원해 온 것이다. 원래는 김포 제1공수특전단 공수요원으로서 대구 의무기지학교로 파견되었다. 의무병 특과교육을 마치고 화천 오음리 월남파병 훈련을 거쳐 이곳 닌호아에 떨어진 것이 8월 한여름이었다.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김포, 대구, 화천을 뽈뽈 기는 쫄병으로 한바퀴 도는데 약1년 걸린 셈이다. 원적은 1공수 특수요원이지만 월남에는 의무병으로 파견된 것이다.   우리를 태운 미 해군 수송함 1만톤급 ‘쟈이거’(Giger)호가 이곳 나트랑 해안에 접안하자 베트콩들이 기습 공격해 왔다. 시뻘겋고 시꺼먼 해안기지 기둥폭발 모습이 영화 필름 마냥 유리창에 비치어 터졌다. 햇병아리 우리들은 요동치는 쟈이거 군함 벽을 휘어잡고 더욱 크게 요동치던 가슴을 쓸어 내렸던 1년 전 기억도 난다. 어느 새 내가 이 지옥 같은 전쟁터를 뛰어다닌 지도 한 해가 다 가는 것 같다.백마부대와 함께 쟈이거를 타고 온 해병 청룡부대 요원들은 우리보다 더 북쪽 후에(Hue) 지역으로 떠나고, 우리는 중부 월남 닌호아에 떨어졌다. 1번 남북도로와 21번 동서도로가 갈라지는 9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29연대였다. 나트랑의 베트콩들에게 ‘위험한 영접’을 받고 내가 1대대 4중대에 배치되어 겨우 한숨 돌릴 무렵이었다. 한밤중 연병장에 비상 신호탄이 몇 번 터지더니 약30대의 작전 트럭이 들이닥쳤다. 중무장으로 동 디엔(Dong Dien) 강이 흐르는 닌호아 북쪽 산악지대에 투입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전이 바로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이었다. 그 동안 부대관할 반닌, 반쟈 지역으로 대민작전에 나가 주민들 치료만 하다가 한달 만에 본격적인 전장에 뛰게 된 것이다. 중대 단위 소규모 작전은 김포 공수부대 시절부터 많은 경험을 했지만 사단규모 대작전은 처음이다. 죽음과 공포, 긴장과 불안이 비수 같이 목을 겨누었다.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안근호(安根鎬) 제4중대장이 무전기에 대고 아프리카 원시인 같은 언어로 고함을 질러대었다. 본부 상황실 홍상운(洪祥運) 연대장과 작전상황을 암호로 확인해 가는 것이다. 라이트를 끈 채 암흑 속을 달리는 트럭 뒤칸 어둠 속에서도 안 대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D 데이 이틀이 지난 10월7일 밤 10시 가까이 되었을까, 21번 도로 연결 쪽 다리를 베트콩이 기습해왔다. 집중사격을 해오는 그들을 여유 있게 응전하며 우리는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사살보다는 생포를 목적으로 안 대위는 맨 앞장 서서 예상 도주계곡을 차단하며 수색작전을 폈다.  이에 앞서 약 5시간 전에 바로 옆 작전지역인 동 슈안(Dong Xuan)의 제10중대 홍종진 하사 부대에서 대민심리전에 나갔던 배태룡 하사와 최정웅 병장이 베트콩들의 기습으로 산화하였다. 그래서 안 대위는 이 지역 베트콩 부대의 최근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생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험준한 혼 헤오 산악과 야밤의 정글 이동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오히려 우리가 역 포위를 당한다며 제1대대장 장창호(張滄鎬) 중령이 호통을 쳤다. “야, 4중대장, 안근호 너 끝까지 내 명령에 불복할 꺼야, 어엉! 지금 늬들 수색조가 모두 11명이야, 한꺼번에 뒈지고 싶어엇! 안 대위 너 내 말 안 들려엇?” 시베리아 호랑이 같은 그의 어금니 가는 목소리가 아예 반말과 함께 무전기 통을 박살낼 것 같았다.  영창 갈 각오를 하고 장 중령과 싸우던 안 대위는 연득없이 쏟아지는 폭우로 결국 그냥 귀대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전우가 쓰러진 그날 밤, 우연하게도 배 하사의 어머니와 최 병장 누이동생의 편지가 나란히 도착되었다. 그 두 장의 편지 위에는 창 밖에 쏟아지는 10월 폭우와 함께 10중대 내무반 동료 전우들의 눈물이 밤새 고였다.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 땅, 우리는 왜 이렇게 하릴없이 시체가 되어가야 하나. 씽씽한 젊은 말 같은 한국 청년들이 왜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죽어가야 하는가. 우습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다시 총구를 닦고 실탄을 장전하여 어느 정글에선가 뛰면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한다.               2. 바닷소리는 늘 달랐다. 아침 저녁이 달랐고, 밤과 낮이 달랐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다와 육지의 입맞춤 소리가 다를 것이고 사랑의 농도도 다를 것이다. 바다 냄새도 다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다 속 생명체들의 희로애락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어머! 야시카가 일곱, 여덟, 열…… 열 여섯 개 떨어지네요.” 챠오가 침묵을 깨고 초승달 하늘을 가리켰다. 이런 조명탄 한 개의 제조비가 일제 카메라 ‘야시카’ 값과 맞먹는 약40달러란다. 한 번 낙하하여 사라지는데 약15분이다. 조명탄은 땅 위에 기어가는 개미새끼까지 비춰준다. 밀림에서 준동하는 베트콩을 찾아주는 것이다. 이 근방 각 부대 작전 지역에서 이 시간에 떨어지는 것만도 수백 수천 수만 개가 될 것이다. 월남 전역에 떨어지는 숫자는 수 억 개, 수 억 달러가 공중분해 하는 것이다. 1년 열 두 달, 365일 몇 년을 더 떨어뜨려야 하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미국 죤슨 대통령도, 월남 쿠엔 카오 키 수상도, 월맹군 후치밍(胡志明)도 모른다. 유엔군 웨스트 모얼랜드 사령관도, 따이한 채명신(蔡命新) 사령관도 모른다. 신(神)은 알까? 원숭이는 그의 수첩에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신(神)이란 정체는 뭔 줄 아세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한마디로 단정해 보세요. 내가 사이공 대학 불문학과에서 배운 것이라곤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또, 그 프랑스 신부 얘기군.” “아녜요. 나 혼자 터득한 거예요. 웃지 마세요. ‘옷(衣)의 변에 원숭이 신(申)자예요. ‘사람 옷을 입은 원숭이?’ 란 뜻이에요. 아시겠어요?” 챠오의 자학적 캐리커처가 시원했다. 그것은 ‘옷(衣)변이 아니고, 보일 시(示)변’ 이다. 직역하면 ‘원숭이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신(神)이란 원숭이다? 그미의 역설이 자폐증상으로 치닫는 나를 웃기게 했다. 나는 뼈 속까지 드러나도록 통쾌하게 웃었다. 어금니가 뻐근하다. 웃지 말자. 이따금 그미의 이러한 어눌한 미소도 생각났다.   “몇 달 전, 사이공 미군사령부 임시수용소에 가서 내 애인 응 남 비엣 그 사람을 만났어요. 여전히 태연하더군요. 나도 그때 처음으로 그 사람 앞에서 태연해 봤어요. 마지막 말을 하려고 하니 이상하게 착 가라앉아지대요. 언제나 불안해야 할 것은 그쪽인데, 오히려 내가 늘 초조해 왔거든요”바다는 은밀히 말을 걸어 왔다. 그만한 시간이면 챠오의 목소리는 달려와 고통스런 안식을 주곤 했다. 눈을 감으면 다가서는 박꽃 같은 미소 때문에 나는 늘 도망다녀야 했다. 그미의 이국적인 눈동자는 때로 낙타의 초월한 눈동자같이 보인다. “이번에는 그 콧수염 홀덴 참모장이 ‘노오’ 했던 모양이지?” “아네요. 그 미군 참모장은 한 번도 내게 ‘노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가 서둘러 남 비엣의 석방 확인서에 싸인 하려는 것을 내가 ‘노오!’ 했어요. 그 홀덴은 이상하단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더군요.”  내가 4중대 의무병으로 처음 배치되고 얼마 후, 나는 부대근처 반닌 반쟈 마을에 대민심리전 작전에 나갔다. 그 즈음 챠오를 처음 만났다. 아니 챠오의 어머니를 더 앞서 만났다. 그미의 어머니는 중증 환자였다. 파도를 밀며 번져오는 밤 바다의 짠 냄새가 챠오의 겨드랑이 냄새로 다가왔다. 며칠 전 챠오와 만났을 때, 들려준 그의 애인 이야기였다. 뜬금없이 그미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휴양소 막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미의 집이 있는 반닌 마을에 가고 싶었다. 옷을 주워 입고 탄창의 탄알을 확인한 다음 대검을 빼보았다. 만일을 위해 호신용으로 지니고 가야 한다. 달빛에 번쩍이는 칼날을 보자 나는 그만 포기해 버렸다. 당분간 그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챠오는 지금 나와 같이 최악의 심리상태일 것이다. 나는 탄띠를 도로 풀어놓고 대검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담요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옆에는 항우 같이 코를 골고 자는 녀석의 담요도 벗겨 가지고 다시 나왔다. 망고나무 밑에 앉았다. 남십자성이 이마 위에 떨어졌다. 고향 신마산 뒷산의 무학산 중턱의 공동묘지에 자주 올라 갔었다. 이북 함흥이 고향인 큰아버지 무덤가에 누워서 보던 밤 하늘과 똑같다. 다만 고향에선 남십자성이 이곳보다 더 멀리 보였을 뿐이다. 은하계도 끝이 없고 우주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끝이 있었다. 죽음의 끝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수통마냥 항상 곁에 차고 다닌다. 그 죽음도 60kg의 고깃덩이가 수류탄에 벌집이 되든지, 부비츄렙에 걸레가 되어야 하는 끝판이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죠. ‘이번에는 석방하면 안 돼요!’ 미군 측에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안 되겠다고 했어요. 사이공 촐롱지역, 베트콩의 아지트에서 잡혀온 그는 쓸쓸히 웃더군요. 차라리 잘됐다는 거예요. 그 비웃음 뒤에 도사린 집요한 잔인성! 동족의 얼굴에도 마구 칼질할 수 있는 그의 정당성에 나는 어금니가 떨렸어요. 창살을 암팡지게 쥐고 서 있는 그의 두 눈알은 그냥 악마의 핏빛이고 저주였어요.” 챠오의 애인이었던 응 남 비옛은 이렇게 끝막음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몰려오는 나트랑 해변을 거닐곤 했다. 무성한 열대 숲에 싸인 해변을 눈부시게 흰 아오자이가 걸었고, 그 옆에는 땀에 전 얼룩 무늬 따이한 전투복이 나란히 걸었다. 밑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바다를 보며 걸었다. 우리는 이 해변을 자주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걷는 것만이 전부였다. 세상에서 그 무엇도 우리 젊음의 그 무엇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전쟁터의 단순한 피동태일 뿐이다. 그냥 소모품으로 젊음이 죽어갈 뿐이다. 시체가 되어 갈 뿐이다. 세상은 우리의 청춘을 열외로 제외 시키고 있었다. “쇠사슬 같이 늘 강인했던 비엣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그때 정말 첨 봤어요.” 고개를 천천히 들며 챠오는 먼 수평선 끝으로 쓰게 웃었다. 세상은 챠오에게 결코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전쟁은 챠오와 그 애인 청년 베트콩 사이를 도끼질 하고 있었다. “잘했어... 차라리 잘됐어. 이제 내 인생도 이렇게 끝나가누만, 마지막 부탁이야. 반닌 마을에 한 번만 가줘. 우리 아버지가 아직 그곳에 살아계실 거야. 그는 중얼거렸어요. 철창 새로 불쑥 뻗어 나온 마지막 그의 손을 나는 차마 잡지 못했어요.”  챠오는 영어를 잘했다. 그미를 처음 만났을 때 사이공 대학 불문학과 2학년이었다. 나의 서투른 영어회화가 중간중간에서 끊어지면 그미가 잘 보완해 주었다. 손짓 발짓도 하고 땅에다가 그림도 그렸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절실한 말은 못할 때가 많았다.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낱말 하나는 아직도 못하고 있었다.“최소한 마지막 그의 손을 한번쯤 잡아 주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 순간, 촐롱의 그들 아지트에서 울부짖던 그 모녀의 환영이 되살아나 도저히 손을 내밀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반닌 오두막에는 갔어요. 허리가 굽은 그의 아버지는 귀도 멀고, 눈도 멀고, 말도 못하는 칠순의 할아버지였어요. 나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때가 전 액자 속에서 낡은 사진을 한 장 꺼내 왔어요. 다시 한참 들여다보더니 ‘며느리가 이제 왔어......허허.’ 이빨이 다 빠진 웃음이었어요. 공허하게 그러면서 핏줄 쓰이게 터져 나왔어요.” 그미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맑은 구름이 마치 어미 캥거루가 아기 캥거루 손을 맞잡고 춤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화책 삽화 같았다. “나는 그 사진을 빼앗았어요. 귀퉁이가 잘려나간 그 사진은 사이공 대학 입학식 때의 내 사진이었어요. 들릴 듯 말 듯한 며느리란 소릴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어요. ‘이제 나는 내 아들 남 비엣한테 가는 거야......허허.’ 아들은 총살당했어요. 그는 듣지 못해요. 아들은 베트콩 청년조직 지도자이에요. 그는 몰라요.”  “결국 비엣을 죽인 것은 당신이군요. 당신 빽으로 충분히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안전 장치를 풀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연발로 나간다. 우리는 화장실에 갈 때도 총을 가지고 다닌다. 잘 때는 머리에 베고 잔다. 더구나 이런 한적한 야산에선 어느 구석에서 검정 콩알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비상장치를 해두는 것이다. 이따금 지축을 흔드는 박격포 소리만 아니면 전혀 전쟁터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난다. 이곳이 응접실에 걸린 한 폭의 열대 풍경화라는 착각이 든다. 나트랑 해변은 열대의 정지된 시간과 벌거벗은 낭만이 연상되는 하외이 외이키키보다 더 아름다운 바닷가이다. 제2의 고향 마산 돗섬 같은 아늑함도 있다. 챠오의 목덜미로부터 반사되어 나가는 한낮의 햇발이 눈부시다. 그미의 몸에선 월남 특유의 오줌냄새가 난다. 그것은 곳곳의 쓰레기장에서 나는 월남민족 고유의 연한 찌릉내다. 갓난아기 궁둥이 냄새 같은 것 말이다. 4중대 한미 합동작전 때, 나에게서 마늘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고 뺑뺑 돌던 윌리암 중위의 엉덩이를 발길로 차 주던 생각도 난다. 윌리암이 한국의 쓰레기장 냄새를 맡으면 우리 민족 고유의 냄새가 날까? 우리가 월남에 투입될 때 타고 온 미 군함 ‘쟈이거’ 식당 구석 짬방통에서는 더 찐한 노랑내가 났었다. 미군에겐 특히 윌리암 같은 백인들에게선 그 노랑내가 심했다. 그 비릿한 오줌내는 이곳 야자 열매 속에서도 났다. 처음엔 구역질 나던 그 야자수 물맛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열대에 전쟁에 죽음에 능숙해 갔다.    3. 한국의 세라(世羅)에게선 풀 냄새가 났었다. 뽀트를 타고, 춘천 소양호를 거슬러 올라갈 때 그미는 진한 들국화 풀꽃 냄새를 풍겼다. 우리는 얼마나 숱하게 헤어지는 연습을 했던가? 꼭 헤어져야 한다면서도 생각해 보면 헤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세라 어머니의 반대 같은 건 흔한 세속적인 이유였다. 내가 D대학 데모 주동자로서 전국 수배자인 데다가 백수건달에 가난하다는 것이 결혼반대 이유이다. 이런 것은 우리에게 헤어지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로서는 절대적이었다. 어떤 것과도 상쇄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헤어져야 했다. 헤어지고, 헤어지고, 헤어져야 했다. “고아면 어때요. 또 호적에 그어 있는 ‘빨간색 전과표시 줄’이 무슨 상관이에요. 빨간 줄이 그어진 그 결과보다 그 동기가 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 주동한 6.3사태 한일회담 저자세반대 시위는 당연한 일이에요. 열혈 한국청년 내 애인의 의지였어요.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위해서 당신이 대신 희생한 빨간 줄이 왜 나쁘냔 말이에요. 기 죽지 말아요. 왜 당신은 그런 걸 당당하게 어머니에게 강조하지 못 하느냔 말이에요.” ‘그러나 세라야! 세상은 결과만 가지고 단정하기 마련이야. 네 홀어머니의 외고집을 세대 차라고만 단정할 수 없어! 세상은 그런 제도권 틀에서 돌아가기도 하니까 말이야’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도로 삼켜 버렸다. 이런 말로 타이른다고 해서 그미가 물러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그런 용감한 행동성이 좋아요. 당신은 늘 행동을 먼저 보여 주었어요. 난 그걸 언제나 친구들에게 자랑해요. 땟국이 흐르는 이론보다 실수할망정 행동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소심해요. 항상 피해의식 속에 싸여 있어요. 왜 그래야 해요? 그건 자학이에요.” 단 하나의 진실을 위해 세라와 나는 모든 것을 위장해야 했다. 하나의 비밀이 갖는 환희와 고통은 그만큼 한 방황과 피로를 던져왔다. 색안경의 두께와 굴절에 우리는 괴로워했고 누구에게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에 다시금 생채기를 내곤 했었다. 한국의 세라 얼굴도 생각났다. 망상이 나트랑 해변 파도마냥 두서 없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맞아요. 내가 비엣을 죽인 거예요. 저도 콧수염 홀덴 참모장 사무실 문을 두드릴 때까지는 단 한 가지 생각만 줄곧 했었어요. 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러나 홀덴이 또 비엣을 석방시켜 주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을 때, 저는 단정했어요. 석방시켜 주면 그는 또 촐롱 밀림으로 달아날 거예요. 쓸 데 없는 반복이에요. 그에게는 민족이라는 당위성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차지 않아요. 아버지도, 아내가 될 애인도, 친구도 없어요. 오직 미제 격퇴, 자본주의 말살, 투쟁! 투쟁! 투쟁! 뿐이에요.” 챠오는 다시 수평선 끝을 응시했다. 아까의 캥거루 모녀 그림이 이제는 말 달리는 백설공주 이미지가 되었다. 그 뒤로 많은 양떼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체포될 적마다 계급이 하나씩 올라가 있더군요. 이번에는 부성장(副省長)급 정치장교가 되어 있었어요. 눈은 더욱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더욱 굳어져 있더군요. 이념이란 무엇일까요? 생명을 착취하는 해골일 뿐이에요. 계급에 대한 투쟁도, 외세에 대한 투쟁도 결국 사람 죽이는 게 일이에요. 그들 집단은 걸핏하면 동족들 목숨도 간단히 끊어버려요. 이웃 캄보디아 킬링 필드 영화 보셨죠?” 챠오는 사이공에 유학하면서 유엔군 사령부에 나가 통-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오후 홀덴 참모장 비서실에서 타자를 치면서 월남군 장교들이 방문하면 통역도 했다. 전쟁 판국에 대학이 유지된다는 것도 우습지만 우익 월남정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좌익 후치민 당이 활개 치고 있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미는 유엔군 합동참모본부에 나들명 거리는 월남군 사단장급 장성들과 고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많이 목격했다. 가까운 친척의 더러운 암거래 현장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대개의 주민들은 이 전쟁판에 죽거나 병신이 되어 나가는데도 그들은 밤이면 사이공 탄손 누트 공항 근처 환락가에서 판을 쳤다. 조국 지도자들에 대한 챠오의 절망이 한 남학생을 사모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 독서 서클 리더인 정치학과 남학생 응 남 비엣에게 기울어져 갔다. 그는 단호하고 철저했다. 고위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남북한 민족단결과 통일을 울부짖었다. 그는 이념의 화신이었다. 6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과 비슷했다. 내가 그랬으니까, 우습다. 이듬해 그는 총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교내에선 좌․우익 학생 간 폭력과 납치도 빈발했다. 심지어 살인 방화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미가 얹혀 살고 있던 고모 집은 사이공 시내 술 도매상 가게였다. 겉으로 보기엔 술병이 가득 찬 가게였지만 뒤뜰은 트레일러 몇 대가 대기할 수 있는 대형 창고였다. 헌병까지 앞세워 컨 보이 하는 암거래 트럭이 수시로 뒤뜰에 들어섰다. 헌병 차가 앞문으로 빠져나가면 이내 뒷문이 닫히고 트럭에 가득찬 미군 PX 화물이 순식간에 분리된다. 찝차는 한 시간 정도면 완전 분해된다. 그 속에는 월남군에 보급이 되어야 할 각종 군수품과 최신 무기들이 가득가득 재여 있었다. 고모부는 그것을 베트콩에게 중계하여 팔아 먹는 것이다. 촐롱의 베트콩 지도자들과 뒷거래 하는 것이다. 포장에 USA가 찍힌 채로 야밤에 정글로 이동된다. 월남군 트럭들이 뒷마당에 서 있는 동안 이층의 밀실에는 미 군표 달러와 피아스타가 교환된다.  고모부가 월남군 별자리들에게 군표 다발을 넘겨주고, 고모부는 다시 그날 밤, 논라를 깊이 눌러 쓴 베트콩 지도자들에게 트럭을 통째로 넘겨주면 몇 배의 피아스타가 고모부 비밀금고 속에 쌓여진다. 그 이층 밀실에는 낮이면 남쪽의 월남군 장성이 앉았던 자리에, 밤이면 북쪽의 베트콩 검은 옷이 앉는 것이다. 같은 월남 동족이면서 세 사람의 배반적 함수관계는 전혀 다르다. 얼룩무늬 녹색 군복과 검은 옷과 중개인의 하리한 흰옷이다. 적들끼리 무기를 교환하는 아이러니다.  고모가 지하실 바닥에 금괴를 파묻으면서 나에게 상자에 못을 박는 망치질을 시키기도 했다. 이들에겐 이상적인 이념보다 현실적인 달러가 더 확실하다. 대개의 월남주민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대포 소리를 듣고 나온다. 평생 언제 총소리가 끊어질 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미군도, 월남군도 모른다. 인민군 베트콩 해방전선도 모른다. 싸우다가, 싸우다가 시체가 되어갈 뿐이다. 끝없이 죽어갈 뿐이다. 무지한 시골로 들어갈수록 농민들은 이유 없는 학살을 더 많이 당한다. 농민들은 유엔군에 가담하자니 베트콩의 보복이 잔인하고, 베트콩에게 붙자니 너무 춥고 배고프다. 챠오는 학교를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조국이 이렇게 만신창이인데 졸업한다고 해서 무엇 할 것인가? 그 공산주의 혁명이론은 대체 현실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방학에 고향에 돌아 와 보면 비엣 그 애인의 가슴에 반짝반짝 빛나는 훈장만큼이나 반비례로 마을은 쓰러져 가고 있었다. 논밭이 황폐해지고, 집들의 벽과 지붕이 뻥뻥 뚫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더욱 그악하고 비굴해져 갔다. 갈수록 무기물화, 무기력화 되어 스러져 가는 것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동족의 베트콩에게도 참살 당하고, 유엔군에게도 처형 당해 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누가 죽어 나갈지 모르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 또 누구네 집이 불질러 질 지 모른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도 급속한 진행형으로 마을이 황폐해 져 가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원숭이는 여전히 신(神)의 흉내만 낼 것이다. 인간 원숭이들은 그들의 수첩에 무엇을 낙서하고 있는 것일까? 대량학살 폭격기의 탄도와 각도와 거리를 재고 있을까?  챠오의 할아버지는 프랑스와의 독립운동 때 처형 당했고, 아버지는 단지 닌호아 군수라는 이유로 베트콩에 의해 살해된 시체가 마을입구 우물에서 발견되었다. 큰오빠는 캄보디아 후치밍 비밀루트 로 해서 월북했다. 지금쯤 아마 월맹군 고위층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덕분에 혁명 가족으로서 출신성분이 좋기 때문이다. 큰 언니는 캄란에 있는 미군병원 간호원이다. 한 가족이 제각각 공허한 이념의 제물로 희생되었다. 챠오는 대학 뺏지를 단 후, 세 번째 고향에 돌아왔을 때, 결국 사이공에 가지 않았고, 비옛이 네 번째 체포되었을 때 일부러 석방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결정적인 이유는 계급투쟁의 실체를 그미가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챠오는 그 애인의 부탁으로 여늬 때같이 촐롱의 산 속으로 소금을 배낭에 메고 올라 갔다. 그때 마침 붙들려 온 몇 명의 포로가 야자나무에 묶여 있었다. 언뜻 보니 사이공 주민 같았다. 학교 앞 어디선가 과일장사를 하는 아주머니 같았다.   ‘야잇! 사끄러웟! 조그만 게 앙칼지긴 네 에미나 너나 독하긴 마찬가지로구나.’  누군가 그들을 심문하는 베트콩 중 한 사람이 대여섯 살 난 소녀를 구둣발로 마구 짓이겼다. 다가가 보니 비옛이었다. 챠오는 그 자리에 주저 앉을 뻔했다. 그 소녀는 이미 실신해 있는 자기의 어머니 머리를 끌어안으며 울고 있었다. 그 어머니 무릎 위에는 또 하나의 갓난애기가 젖이 말라붙은 그 어머니의 가슴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부슬비가 핏물을 번지고 있었다.“뭐야! 이 쌍년이 아직도 안 불어? 미국 놈과 붙어먹은 갈보 년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 정보까지 팔아먹어 쌰앙!” 비옛은 허연 짹 나이프로 그 과일장사 아주머니의 코 끝을 찍찍 그어대며 닦달했다. 비옛의 이런 발광은 처음 본다. “야, 이년아!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이 민족의 통일이 자꾸 늦어지고 있는 거야, 썅! 빨리 안 불어. 네가 미군에게 넘겨준 쪽지가 뭐냔 말이야?”  “나는 쪽지도 없고, 미군을 만난 적도 없어요.” 얼굴이고 가슴이고 검붉은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해 있는 아주머니는 자포자기한 것 같다. 이런 비슷한 현장은 이따금 보아왔지만 갓난애의 피 묻은 열 손가락이 역시 피 칠한 자기 어머니의 젖가슴을 손톱으로 할퀴는 것을 보았을 때 챠오는 새삼 어금니를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챠오가 본능적으로 그 갓난애기 머리를 안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비옛의 구둣발이 그미의 옆구리에도 꽂혔다. 살벌한 그의 눈알도 꽂혀졌다. “챠오! 넌, 또 뭐야, 그 너절한 걸레쪽 같은 인정은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라고 ! 이 여자가 아직도 그 자본주의 찌꺼기를 못 버리고 있어, 이 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인민의 목숨을 생각해 보라구!” 비옛은 보란 듯이 그 아주머니의 누런 얼굴을 칼로 다시 북 그었다. 두 쪽으로 깊이 갈라진 세로의 금 속에서는 벌건 피가 배어 나왔다. 다시 가로로 북북 그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이내 붉은 십자가가 되었다. 챠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그대로 산에서 뛰어내려 왔다. 처음  비옛의 어금 빗기는 무산계급 혁명의 실체를 발견한 것이다. 후치밍의 공산혁명, 마오쩌둥의 계급투쟁, 스탈린의 공산독재 그 단호한 이념의 위악성을 느꼈다. 그러나 챠오가 정독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주의 혁명이론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다. 챠오가 나에게 보여 준 한 장의 남녀 사진 속 비옛은 단정했다. 챠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은 그러나 강철같이 준엄한 눈도끼였다. 동양인치고 안면의 굴곡이 심했다. 나폴레옹 같이 깊숙이 들어간 눈두덩은 이질감도 주었다. 비옛이 첫 번째 잡혔을 때, 홀덴 참모장이 챠오에게 보여준 포로 사진이라고 했다. 홀덴은 그 사진 속의 여자가 어쩐지 챠오와 비슷하다며 농담을 했단다.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 장본인이다. 어쩌면 홀덴이 사이공 CID 첩보대를 통해 이미 챠오의 시원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짐짓 떠보려고 농담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옛 동무들은 사이공 대학 입학 때부터 촐롱 아지트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미로 같은 산악 동굴 후치밍 인민해방군 지하사령부를 반지빠르게 드나들며 혁명이론을 학습하였다. 비옛이 2학년 때 주동한 학내폭동이 성공하자 그들로부터 첫 번 째 ‘청년영웅’ 칭호를 받았단다. 사이공 대학의 동료학우들 학살과 강의실 방화 폭동은 혁명전선 기폭제가 되어 사이공 일대에 잠복해 있던 지방 게릴라들에게도 휘발성이 되었다. 몇 달 간 월남 대통령 궁과 행정부 건물 그리고 군과 경찰청 기지 등을 기습하거나 불 질렀다.      “대체 내가 무엇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응 남 비옛! 그이를 사랑한 건지 그의 이론을 사랑한 건지 몰랐어요. 그 과일장수 아주머니 모녀들에 대한 칼질 현장을 목격했을 때, 나는 큰 모순을 깨달았어요. 절감했어요. 낭비예요, 끝없이 해방! 해방! 해서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마을은 점점 피폐해 지고 병 들어 가고 있는데 대관절 계급투쟁이 뭐 하는 거예요? 벌써 몇 세기 동안 이 땅에는 이렇게 피 튀김만 해오고 있는 것 아니에요. 나는 그냥 이런 고향 흙 냄새가 좋아요. 하루 하루의 웃음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냥 소박한 일상적인 햇빛이 좋아요.” 따르륵! 순간, 나는 그미를 반사적으로 넘어뜨렸다. 따르륵! 곁의 바나나 나무를 엄폐 삼아 주위를 살폈다. 순간적이다. 엎드린 채 기어서 야자 숲으로 갔다. 따르륵! 이 순간만 살면 사는 거다. 후딱 갈기고 잽싸게 튀는 게 베트콩들의 고유 전법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결국 우리에게 잡힌다. 그러나 그들의 명중률은 무서웠다. 따르륵! 하면 곁의 한 두 명은 쓰러지곤 했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국경선으로 침투하는 하노이 월맹 정규군은 면도날 같이 더 날렵했다. AK 소련제 장총 소리가 근처의 밀림으로 사라져 갔다. 다행히 우리가 목표물이 아닌 모양이다.우리는 풀숲에 다시 나란히 누웠다. 신경초 들풀이 일어섰다가 일제히 오므렸다. 한국에선 화분에 모시는 고급 신경초가 이곳에선 잡초로 천지에 깔려 있다. 그미를 눕혀 놓고 진한 키쓰를 했다. 그미의 입술에서는 여전한 찌릉내가 났다. 달콤하고 친근한 오줌내다. “며느리를 따라간다고 좋아하는 비옛의 아버지를 사이공 난민 수용소에 집어넣어 버렸어요. 그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그이가 손을 흔들며 마지막 바라보던 그 눈빛이 남아 있더군요.” 일순 챠오가 긴장을 했다. 아마 지금쯤 남 비옛은 사이공 월남군 사령부에서 총살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미가 홀덴이 제시한 석방서류에 노오! 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서류 한 장으로 사람의 목숨이 휴지쪽이 되다니, 우습다. 목숨이 우습다. 사랑이 우습다. 넓은 야자열대 잎 위에서 무료하게 흔들리는 햇살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마산 합포만 돗섬에서 누워서 보던 똑 같은 하늘이다. 눈부신 하늘을 보니 현기증이 났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머 진통이 또 시작되나 보군요? 이번 귀 상처는 심한가 봐요. 102 십자성 부대는 아직도  진지구축 중이라, 내부시설이 안돼 있을 텐데요? 이런 중상이면 그냥 귀국하지 그랬어요.“ 나는 그때 왜 귀국하지 않았을까? 필리핀까지 후송 갔다가 왜 다시 죽음의 이 전쟁터에 오겠다고 우겼던 것일까? 우습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으로 귀국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아니 단지 챠오가 있는 곳이라 게 더 솔직하다.    4.  “아아, 사랑하는 당신! 나는 열흘 동안이나 꼬박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낮이면 부처님께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고, 밤이면 방문 고리를 열어놓고 기다렸습니다.” ‘아름다운 매화 1호 작전’ 과 연결된 ‘도깨비 3호 작전’의 하나인 열흘간의 수색 정찰을 끝내고   우리 4중대 소대원들은 무사히 귀대했다. 와와! 그 동안 고국에서 도착된 편지를 각자 찾아 읽느라고 아우성이었다. 편지가 없는 녀석들은 죄 없는 죄를 짓고, 구석에 몰리고, 서너 통이나 손에 쥔 녀석들은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전장에서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단 두 가지이다. 하나는 C․P에 우편 보따리가 왔다는 것과 또 하나는 PX에 김치나 오징어가 내려왔다는 전갈이다. 어느 순간에 시체가 될지 모르는 전장에서는 두 가지 외에는 전혀 무의미하다. 우리들은 편지만 받으면 접힌 부분이 닳고닳아서 너덜거리도록 반복해 읽는다. 불침번 때도 읽고,뒷간에 앉아서 똥 누면서도 읽고, 총알이 빗발치는 작전지역에서 사격개시! 직전까지도 읽는다. 그렇게 하여 주변 사람과의 끄나풀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제외 또는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할 수 있고 새삼 모가지가 붙어 있다는 생존감을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엉뚱한 김치는 또한 별 수 없이 코리언이라는 거, 여름날 똥 타는 냄새로 체질화되어 버린 한국인이라는 걸 속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눈물이 많은, 설움이 많은 한민족이라는 거, 김치와 된장은 아직도 버터와 치즈의 작전 명령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약소 민족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우리는 김치를 먹는 게 아니라 눈물을 먹었고, 죽어 가는 전우들의 한(恨)을 먹었다. 그리고 조국에 남은 그 가족의 오랜 슬픔을 마셔야 했다. 이렇게 태평양 밖으로 나와 보니 국가라는 의미, 민족이라는 의미가 새삼 절감된다. 진작 느끼지 못했던 애국심이랄까, 햇병아리가 어미 닭의 체온을 처음 찡하게 느껴 본다고 할까? 한 뼘 온돌방, 한 걸음 내 땅 덩어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내 몸뚱이의 한 피부 조직 같다. 지금 강성우 병장이 탁자 위에 올라가 극화시켜 가며 읽어주는 편지는 고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반닌의 암자 절에 있는 주지 여승에게서 인편으로 배달된 것이다. 사이공의 월남어 교육대를 나온 강 병장은 월남어로 된 그 여승의 편지내용을 번역해 가며 크게 읽었다. 김희갑 코미디 연기도 보태었다. “오오오 …… 그대여! 따이한의 전형적인 남썽이여, 그대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제일 첨 일깨워 준 부처이외다. 나에게는 두 개의 부처님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승의 부처님이고 또 하나는 이승의 부처님 이현길 병장입니다.” “아닙니다요, 강성우 영감님! 그건 번역의 오차입니다욧! 하나는 저승에서의 서방이고 하나는 이승에서의 정부(情夫)입니다 그랴.” 낄낄낄… 강 병장이 감정을 넣을 적마다 큰 냄비를 엎어 놓고 얼씨구! 박자를 넣고 있던 이현길 병장이 손을 들고 일어나 정정을 하자, 숨 죽이고 듣고 있던 동료 중대원들이 또 한 번 목구멍이 보이도록 폭소했다. 그 편지는 이 병장에게 아홉 번째 온 여승의 사랑 고백이었다. 모두들 건성 들떠서 취사병들은 저녁식사를 배식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전우들도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짐짓 웃고, 짐짓 소리치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 다 정신병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폭소 뒤의 허탈은, 작전지역의 소모품들인 우리들을 바닥 모를 공포의 늪에 풍덩풍덩 빠뜨리곤 했다. 사단 인사처 명부에 우리도 일종의 소모품이다. 치약을 다 쓰면 쓰레기 통에 버리듯 누가 죽어 나가면 화장터에 갖다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보충병을 지급받는다.  작전이 없을 때면, 우리들은 대민 심리전에 나갔다. 반 트럭에 먹다 남은 쌀이며 의료품 등을 싣고 통신병 의무병 통역병과 함께 2개 분대 정도가 한 조가 되어 나갔다. 반닌, 반쟈 마음을 돌면서 쌀도 나누어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주민들은 우리들만 보면 마을 입구까지 쫓아나와 손뼉을 치고 어린애들은 더욱 높이 깡충깡충 뛰었다. 어느 마을을 가나 여인네들과 어린애, 노인들뿐이었다. 이곳에선 16세 정도만 되면 남자들은 모두 징발되어 월남군 아니면 베트콩으로 넘어간다. 일단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내가 집집마다 돌면서 차례로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치료받던 주민이 베트콩으로 돌변하여 총질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무병들은 적십자 마크의 흰 까운 속에는 비상용 권총을 숨겨 다닌다. 지방 게릴라들이 기습하는 수도 있어서 늘 긴장과 불안을 무전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녀야 했다. 이 마을에서 우 핑 챠오(武平橋)를 처음 만났다. 그미는 사이공 대학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반닌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 언니는 프랑스 애도 낳고, 깜둥이 애도 낳았어요. 우리 동네엔 일본 애도 있어요. 나는 미국 애랑 한국 애랑 낳을 거예요. 우리는 거창한 이념보다, 이론보다 당장 먹고 사는 현실이 더 절실해요. 한 줌의 쌀, 한 컵의 물이 더 시급합니다. 명분 같은 거, 그건 뜬 구름이에요. 허무맹랑한 구름, 끝없는 이상이며, 끝없는 살육일 뿐이에요.” 암자 절에도 쌀을 갖다 주었다. 거기엔 30 대의 싱싱한 여승과 몇 명의 보살들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이현길 상병은 의식적으로 더 많은 일용품을 몰래 갖다 주었다. 어느 여름날 연득없이 둘은 붙었다. 병장 이현길과 주지 여승은 부처님이 지긋이 내려다보는 법당에서 하오의 정사를 벌인 것이다. 홀랑 벗은 맨 몸으로 열대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육체를 불태웠다. 아무도 몰랐다. 월남도 월맹도 미국도 몰랐다. 소대원들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 방문을 꼭꼭 닫은 여름날, 대낮에 부처님만 땀을 뻘뻘 흘리며 관전했을 뿐이다. 편지는 계속 되었다. “이현길 따이한 병사님! 요즘 당신 부대에 비상이 계속되는지 통 나타나지 않는군요. 보고 싶습니다. 당신만 좋다면 나는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습니다. 멀리 우리들만 살 수 있는 외국으로 신혼여행 가는 거지요.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국경선을 넘어가는 비밀 루트도 알고 있어요… 이 편지 받는 대로 회답주세요. 좋은 회신 기다립니다. ”  지난 9월3일의 월남 정-부통령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월남 전역은 북쪽에서 내려온 월맹 정규군을 기간으로 지역 베트콩과 지방 게릴라들이 극렬한 파괴작전을 벌였다. 중부 캄보디아 국경선 등 후치밍 비밀 통로로 잠입한 하노이 요원들은 전투에 아주 노련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련한들 유엔군의 충분한 화력과 잘 훈련된 병사 그리고 과학적인 전략에는 월맹군도 오래 가지 못했다. 백마 9사단장 박현식 소장은 닌호아 책임전술 지역에서 ‘아름다운 매화1호 작전’으로 적들을 간단하게 격퇴시켰다. 그의 탁월한 전술에 채명신 사령관이 웨스트 모얼랜드 미 사령관을 대동하여 헬기로 작전현장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그 정-부통령 선거 이후, 산 속으로 달아났던 베트콩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10월 초부터 재공격해 왔다. 10월22일에는 다시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기 때문에 주민들을 혼란시키기 위함이다. ‘매화 1호’ 작전으로 심각한 패배를 당한 그들은 더욱 잔인해졌다.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함부로 공개 학살했다. 한국군이나 미군 등 유엔군들에 협조했다는 의심만 가면 그 일가족과 그 마을은 잿더미가 되곤 했다. 그래서 박현식 장군은 다시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인사계 할아버지는 군복만 벗으면 시골 청도(靑道) 소장수 같이 텁텁하다. 자기 아들뻘 되는 뚱보 중대장에게 늘 꼿꼿한 차렷! 자세로 엄정하다. 이번 ‘매화 2호’ 작전에 투입되는 연대 의무병들을 막사 앞에 세워놓고 중대장에게 경례엣! 시켰다.     29연대는 백마 사단본부를 호위하는 임무가 있어서 근처 혼 헤오 산에 은둔지를 둔 월맹군 지역 사령부에서는 우리 연대가 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사이공에서 하노이로 이어지는 1번 도로와 주요 병참 보급로인 21번 도로를 방어하는 것이어서 지방 게릴라들과도 자주 충돌한다.     “야, 성혜운 병장! 4중대 본부로 즉시 귀대하라우, 내 말 들려엇! 내가 보낸 연대 앰불런스가 그곳에 곧 도착할꺼야, 알았어? 알았으면 대답해야 할 꺼 아냐? 이 고집불통을… 그저어!” 10월5일부터 시작된 D 데이 이틀이 지났을까, 혼헤오 산에서 전투 중 나는 할아버지 인사계장의 무전기 호출을 받았다. 인근 제10중대 홍 하사 부대에서 전사자가가 두 명이나 발생했다. 민사심리전에 나갔다가 지방 게릴라에게 당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작전이 쉽게 끝나지 않고 장기전으로 이어질 예상이라 본대 호위가 문제였다. 본대로 돌아가 ‘부대 잔류병’으로 중대를 방어하라는 명령이었다. 각 중대마다 일정한 잔류병을 차출하여 베트콩 기습에 대비시키는 것이다.결국 인사계장의 예상대로 4중대가 기습을 당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미군 헨리 (Henry)포대의 105미리 포탄도 적들을 향해 벌떼처럼 날아갔다. 인사계의 예상이 아니라, 칸 호아(Kanh Hoa) 성 정부의 첩보였다. 사단 상황실에서는 혼 헤오 산에서 지휘 중인 홍상운 29연대장을 긴급히 호출했다. 그러나 전 화력을 동원해서 삼중 포위로 기습한 베트콩들의 보복작전에 우리 4중대는 그대로 앉아서 역습을 당했다. 내가 쓰러지던 날, 애잔한 가을 햇볕도 지금같이 따뜻했다. 정글 속을 뒹굴며 크고 작은 작전에 휩싸여 다녔지만 그때 같은 참패는 드물었다.  우리들 4중대 잔류병 몇 명은 그 여승의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었다. 그때였다. 푸르륵 꽝 꽝! 엎드려! 니기미, 드르륵! 식당 세면 바닥에 갖다 붙인 귀에서 예사 총소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일순 뚝 그쳤다. 뭐야! 나와 몇 명은 식당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의무실로 내려가는 순간, 아이쿠! 형님! 외곽 보초에 나갔던 강성우 상병이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감싸 쥐고 올라오다가 나를 보자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손가락 사이로 번지는 핏물이 마악 사라져 가는 황혼 빛에 한 송이 장미꽃으로 반사되었다. 뛰어가 그를 일으키려는 순간, 퍽! 돌멩이 같은 게 날카롭게 머리에 꽂히는 충격을 받았다. 뺑 돌면서 넘어졌다. 아! 하필이면 머리를 맞았을까? 결국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일까? 정신을 잃었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챠오를 만나야지, 세라도 만나야지 그리고 일용직 목수인 아버지 얼굴도 마지막으로 보아야,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능적으로 곁의 칼빈 소총을 잡고 일어서려는 다시 몸이 팽 돌아 쓰러졌다. 몸의 평형 감각이 탈감 되었다. 두 팔로 땅을 강하게 짚었다. 엎어진 등 위로 누군가 수 없는 발자국이 떨어졌다. 눈을 떴다. 핏물이 온 얼굴에 엉겨 붙어서 잘 떠지지 않았다. 불그스름하게 막사 외등이 비쳐 드는 연병장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와와! 아프리카 식인종 토인들이 백인을 잡아 놓고 춤 추는 것마냥 베트콩들이 종횡무진으로 날뛰었다. 새까맣게 휩쓸었다. 중대본부, 식당, 의무실은 이미 화염 속에 싸여 있고 보급창, 탄약고 등에선 베트콩들이 새까맣게 달려들어 약탈해 내고 있었다. 미 헨리 포대도 서서히 주저 앉았다. 아니 미군 헨리 포대원들은 이미 줄행랑을 친 뒤였다. 미군들은 엿차! 하면 무조건 튀는 게 일이다. 따이한은 붙었다 하면 죽기 아니면 뻗기인데 그들은 작전상 후퇴라는 명분으로 우선 도망가고 본다. 이제 내 나이 24살, 칸나 같은 열정의 꽃 같은 청춘이다. 나는 이렇게 맥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일까. 중대 전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처구니없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나는 엎드린 채 조금씩 기었다. 가슴으로 미지근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관통 부위를 더듬었다. 광대뼈 밑부분 부분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갑자기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생살이 찢겨 나간 아픔이다. 어느 녀석의 총알인지 각도가 위로 약간만 올라갔다면 나는 두부 관통으로 즉사했을 것이다. 상황실 샌드 백 모래 방어벽까지 겨우 기었다. 벽에 바싹 붙어서 누웠다. 지혈부터 했다. 웃옷을 찢어서 상처 부위를 질끈 조여 매었다.  그때 뜬금없이 박격포탄이 우박으로 쏟아졌다. 연대본부 51포대의 엄호포격일 것이다.  어네스트죤 불기둥이 하늘을 가르며 까마귀 떼마냥 날아와서 떨어졌다. 졸지에 연병장 곳곳이 곰보가 되었다. 베트콩들은 의외의 집중 강타에 갈팡질팡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다시 혼수 상태로 빠져들게 했다. 죽으면 안 되는데 출혈이 심하다. 그날 장창호 대대장과 티격태격하던 안근호 중대장은 방어 잔류병 지휘 담당으로 나와 같이 산에서 끌려 내려온 것이다. 그러다가 얼러 방망이로 당한 것이다. 안 대위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야, 내가 살아서 연대 상황실에 들어가면 싸악 몰살시키고 말 꺼야! 느기미! 베트콩이 2 백 여명이나 집결하도록 CID 정보처고, 사단 수색대고 다들 뭘 했냐 말이야. 벌건 대낮에 베트콩들의 야포 이동도 못 보았느냐 말이야, 느기미! 들려엇! 우리 4중대가 쑥밭이 되었단 말이야, 우리는 전원 옥쇄야, 옥쇄!  알아들엇! 내 들어가면 다 때려죽여 버릴 거야….” 무전기 저쪽은 왕왕대는 기계음만 반복되었다. 안 대위는 연대 상황실에 대고 울부짖었다. “야앗! 대포를 있는 대로 동원해서 즉시 폭격을 가하라구. 상황은 글렀어. 우린 이미 살기 글렀으니까. 이왕 죽어 가는 몸, 니기미 베트콩들 하고 같이 어깨동무 죽겠다구, 즉시 때렷! 즉시, 즉시, 베트콩들이 한 놈이라도 더 도망치기 전에 즉시 갈기라구, 느기미.“ 안 대위는 잔류 중대원과 전원 함께 옥사하여 죽기로 작정했다. 이미 완전 포위되어 어쩔 수 없었다. 헬기로 4중대 현장에 급거 출동한 홍상운 연대장, 박현식 사단장도 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즉시 때릴 순 없었다. 아군 포로 아군을 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무차별, 40여 명의 부하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비극이다. 이미 쑥밭이 돼 있는 베트콩 수중에선 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파이어!! 결국 박 소장은 피눈물을 떨구며 사격개시! 명령을 내렸고, 끝까지 반대하던 홍 대령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나중에 들은 소문이다.   5. 눈을 떠보니 허연 벽이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사변 벽이 허옇게 다가왔다. 나트랑 미군 야전병원이었다. 뒷골이 멍멍해온다. 다행히 헨리 포대의 윌리암 중위가 쓰러진 나를 발견하여 급거 후송 헬기에 태워 보냈기에 망정이니 엿차! 하면 나도 갔다. 윌리암과는 평소에도 친했다. 내가 그에게 태권도 도산형과 유도 낙법도 가르쳐 주었고 그는 나에게 권투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우상호 상병도 갔다. 부상당한 강성우는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야밤에 실려갔다. 그는 평소에는 시체 운반 책임자였다. 작전지역에서 전사자가 생기면 나트랑 미군 화장터까지 냉동 앰불런스로 호송하는 것이다. 그들의 웃음 소리만 남았다. 비상용으로 위장해 놓은 지하 대피소로 피신한 일부만 살았다. 안근호 중대장은 심한 화상으로 중태란다. 연대 51 지원포가 조금만 늦게 떨어졌더라면 나도 우 상병 일행과 함께 하늘나라로 동행했을 것이다. 이튿날 확인된 전과 보고는 의외였다. 우리 부대원과 미군 헨리 포대원 포함 3십여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해 나갔고, 베트콩 쪽은 2 개 중대 병력 약140여명이 걸레가 되어 나갔다. 한국군 51 포대의 퇴로차단 포격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베트콩들은 그대로 에프 킬러를 맞은 셈이다. 잔인하고 징그러운 함몰이다. 안 대위의 전략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미군 일간지 ‘성조지’(星條紙) 첫 표지에선 ‘즉시 때려엇!’ 이라는 영어자막과 함께 안근호 중대장의 얼굴이 표지전면에 확대된 울부짖음으로 보도되었다. 그를 일약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 ‘월남전영웅’으로 추켜세웠다. 베트콩들과 같이 옥쇄하겠다는 각오로 안 대위와 함께 마지막까지 싸운 부대원들에겐 전부 일계급 특진과 일부는 훈장까지 추서되었다. 나는 나트랑 미군 야전병원을 거쳐, 다시 필리핀 수빅만 클라크 병원으로 급송됐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 베트콩의 검정 콩알이 내 오른쪽 볼을 뚫고 한 바퀴 돌아 코끝에서 멎었다. 그러니까 귓길(耳道)과 콧구멍(鼻道)이 일직선으로 터널을 뚫은 셈이다. 가을 우기로 교차하는 1967년 10월5일부터 약20여일 간에 걸친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 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이 작전은 나중에 미 국방성의 세계전사에도 올라가 있으며, 미 육사 전투교재에도 전 과정이 사진과 함께 채택되었다. 클라크 휴게실의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는 ABC 방송 카메라가 지구 곳곳의 현장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 반대와 전국 대학생들의 데모행렬, 미국 워싱톤에서는 킹 목사의 암살과 전국의 흑백분규, 중공 베이징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과 전국 홍위병들의 난동 그리고 아프리카 비아프라의 집단학살과 아사(饑死) 문제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파리 어느 고급식당에서는 아프리카 빈민 식량지원을 위한 유엔 각국대표의 요리가 총천연색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 열풍과 북한의 남파 간첩 김신조의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루트도 보여주었다. 재미있다. 미국 죤슨 대통령의 하노이 북폭 확대결정과 월남군 고위장성들의 대형부정 사건도 폭로되었다. 아마 그 속에는 챠오의 고모부와 연계된 검은 라인도 올라가 있을 것이다.  거의 두 달 동안 필리핀 수빅만에서 어정거렸다. 미군병원 서비스가 한국 A급 조선호텔 대우였다. 간호장교 두어 명이 달려들었다. 홀랑 벗겨서 목욕을 시켜 주기도 했다. 손바닥에 비누를 흠뻑 묻혀서 갓난애 목욕시키듯이 겨드랑이고, 불알 밑을 싹싹 씻겨 주었다. 그미들은 상이군인들의 시커먼 물건도 장난감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며 야아, 제법 큰데에? 깔깔 거렸다. 그때 염치없이 발기된 나의 대포에서 허연 물이 터지려는 것을 참느라고 혼났다. 필리핀에서 퇴원하는 날, 나와 몇 명의 상이군인들은 서울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부려서 다시 닌호아로 돌아왔다. 챠오의 곁으로 온 것이다. 폭탄과 포연 속을 뛰어다니지 않으면 뭔가 폭발할 것만 같다. 콱! 뚫어지지 못한 많은 것들이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세라 때문도 챠오 때문도 아니다. 누구 때문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또 전혀 그들 때문인 것도 같다. 모르겠다. 악몽들이 이마를 다시 어지럽힌다.  세라와 나는 이따금 소백산 도솔암 우리 또래의 젊은 스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처음과 끝은 같은 겁니다. 논어에서는 본말(本末)이라고도 하지요, 처음도 끝이 아니고 끝도 끝이 아니랍니다. 부처 이전에도 우주는 있었고, 부처 이후에도 우주는 그대로 생멸(生滅)을 반복할 뿐입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있습니까? 성혜운(星慧雲) 씨,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있어요? 없습니다. 우주가 공즉색(空卽色)이고 곧 색즉공입니다. 유는 무이고 무는 유이지요..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은 분명 있지요. 빛이 사물에 닿을 때 비로소 색깔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요. 모든 고뇌는 사소한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욕망은 한이 없고, 한없는 것은 절망입니다. 스님의 투명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 세라는 불륜의 업보(業報)에 몸을 떨었고, 나는 마네의 인상파 그림 ‘풀밭 위의 점심’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동일 물체도 색깔이 변화된다는 인상주의의 하나였다.  ─나는 세라를 겁탈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했습니다. 밤이면 나는 그미를 강간합니다. 내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미를 사랑합니다. 천주님! 우리는 세라가 이따금 나가는 동인천 성당에도 갔다. 메리놀 신부에게 1주일간이나 고해성사를 했다. 세라가 4H 클럽, 나의 서클 선배와 나 몰래 한때 동거생활 한 것도 자백했다. 소죄, 대죄를 다 아뢰고, 벌로 받은 천주경을 백 번 외웠지만 우리의 죄는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아침이면 세라와의 몽정 때문에 내 팬티가 끈적하게 젖어 있곤 했다. 우리의 죄악을 다소나마 씻겨주는 것은 바다밖에 없었다. 우리는 밤이면 별빛이 묻어나는 인천 송도 밤바다와 고깃배의 어항불을 지켜 보았고, 낮이면 햇빛이 닳아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침묵과 응시가 전부인 끊어진 바다 공간의 만남만을 부질없이 반추했다.  송도 해변과 마산 합포바다 등 동서남북으로 헤매어 다녔지만, 어느 한 곳도 우리 마음을 묶어둘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어디에도 사람들의 공격적인 칼날은 스며 있었고 색안경의 굴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세라를 잊기 위해 노력할수록 불면과 신경쇠약의 거역만이 형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무사박다니, 옴 마니 반메 흠, 가나다라마바사아… 으르릉 꽝,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무슨 장군, 앗사야로 꽝! 으핫핫 귀신아 잇! 써억 썩 물러가거라아 잇! 미아리 고개 처녀 무당의 손바닥에서 푸른 대나무 가지가 신기하게 떨었다. 칼춤 추던 박수무당의 길고 넙적한 칼이 내 목을 날캉 눌렀다. 으아악!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나곤 했다. 세라의 어머니는 약수동 터키 대사관 골목길 3층 슬라브 프랑스식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굿을 했다. 세라의 눈에 귀신이 씌인 것이다. 내가 귀신이다. 내가 파월을 자원한 것을 알고 챠오는 약을 먹었다. 학교 앞 여관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주인이 일찍 발견하여 병원에 실려갔기 망정이다. 그미의 왕고집으로 어쩌면 우리가 멀리 달아나 동거할 수도 있었지만 세라 하나만을 위해서 평생을 과부로 수절해 온 그미의 어머니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어머니의 맺힌 한은 죽을 때에도 옷고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헤어져 버려요. 뭐예요. 이러다가 심장쇠약에 걸리겠어요. 우리가 대체 무슨 죄를 진 거죠. 나는 정략결혼은 싫어요. 당신도 싫어욧! 왜 날 데리고 도망을 못 가는 거죠. 무슨 남자가 그렇게 비겁해요. 세상도 싫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헤어지는 연습을 했다. 세라의 할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이웃에 사는 외교관 집 막내아들과 예약결혼 해 놓았다. 세라가 일곱 살 때였다. 어른들의 언약은 번복할 수 없는 약속으로 굳어져 갔다. 나중에 또 그 막내아들은 독일의 자유대학을 나와 유망한 청년 실업가로 귀국했다. 그래서 세라의 어머니는 그미를 더욱 굵은 쇠사슬로 묶어 버렸다. 그런 약혼녀를 홀리는 나는 분명 악귀일 것이다. 오늘은 정말 헤어지는 거예요. 암, 이틀만에 우리는 또 만났다. 오늘은 정말 헤어지는 거예요, 암……암 정말, 부질없는 이별 연습이다. 우리는 서로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이 땅을 뜨고 싶었다. 어떤 결과든 이제 연습을 끝내고 진짜 이별이 필요했다. 나는 월남 전쟁터를  지원했다. 목숨을 건 도박이다. 단순히 세라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는 일어나서 어두운 해변을 다시 더듬었다. 어쨌든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우습다. 곧 귀국해야 하지만 한국에 간다고 뭐 뾰쪽한 게 없다. 세라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약수동 달동네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D 대학 학생과에서도 내 이름 세 글자가 아직도 악질 데모 주동자 명단에서 삭제되지 않아 복교가 되지 않는다. 귀국할 이유가 없다. 김철남 병장 같이 나도 이곳에서 현지 제대하여 챠오랑 동거생활이나 해볼까? 모든 것을 잊고 챠오와 있고 싶다. 챠오만 그냥 옆에 있어 준다면 족하다. 그 외의 모든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미에게서 풍기는 찌릉내는 인간의 냄새와 진한 사랑 냄새다. 세라에게서 끝내 태우지 못한 불꽃을 챠오에게서 확실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세 번째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귀창이 날아간 중상 때문에 이번 ‘잔류연장’ 신청서도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예감이 콧 속의 통증보다 더 아프게 저려 온다.     6.그날은 밤늦도록 반닌 반쟈 마을을 순례하고 있었다. 위험했지만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여름 방학으로 사이공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챠오는 유창한 영어로 환자들의 병력을 나에게 통역해 주었다. 장염과 심한 부종을 앓고 있는 챠오의 어머니를 치료하고 있을 때, 새까만 옥구슬 같은 두 개의 눈동자로 나에게 당돌하게 요구했다. 월남 땅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신병인 나로서 조금 당황했다. “우리 어머니 치료는 고맙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어떤 경우이든 총질하지 마세요” 챠오는 황폐되어 가는 마을에 그미의 모든 것을 던지기로 그때쯤 작정한 것 같았다. 촐롱 아지트의 응 남 비옛을 버렸다. 사이공을 버렸다. 유엔군도 월남군도 월맹군도 그리고 애인도 버린 것이다. 오로지 고향 마을 재건과 마을 주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미군이나 한국군의 실수가 발생하면 가차없이 지적했다. 마을 어디가 폭격을 당하거나, 주민 누가 다쳤다 하면 여차 없이 그미가 마을 사람들을 끌고 나와 부대 앞에서 배상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도 주민들 누구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면 근처 주둔군 버터 냄새, 김치 냄새, 유엔군들을 초청하여 흰둥이, 껌둥이, 노란둥이를 불러 모았다. 월남 멥쌀 밥 위에 생돼지 고기를 삭힌 뻘건 물 같은 농탕을 손수 소스로 쳐주기도 했다. 챠오는 작은 악마였다. 우습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그미가 요구하는 배상금을 몇 배 이상으로 물어주곤 했다.    “비옛의 아버지를 맡겼던 난민 수용소는 아우성이더군요. 살벌해요. 우린 모두는 난파선 같은 배를 타고 있어요. 이따금 나는 그런 악몽을 꿈 꾸어요. 당신과 나, 나와 비옛, 그리고 그 아버지와 홀덴 콧수염 참모장 까지도 우리 모두가 말이에요. 때때로 하나의 매듭일 뿐이에요. 이 월남 전체가 하나의 난민 수용소예요. 아니 이 세상 자체가 난파선 아니에요? 여하튼 그런 건 하등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 사랑만 있다면 환경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미의 흰 아오자이가 바람에 날려서 파인애플 나뭇가지에서 나풀거렸다. 그미는 홀랑 벗었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달려와 광휘롭게 터지는 적도의 햇살이 그미의 유방에서 시작하여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들이 마셨다. 대민작전 지원 동안 챠오와 급속도로 가까워 졌다. 서로가 어떤 이유로든 실연 당한 터이기도 하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저것 봐요!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아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군요. 무한의 평행선에서 일치가 된 거예요. 우린 그 직선 위의 한 점 구름쯤이겠지요. 끊임없이 생멸하는 구름, 그러나 의미 있는 구름이고 싶어요.” 진통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모가지만 잘려서 붕붕 떠 다니는 상실감과 이질감이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사물들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온다. 머릴 흔들었다. 이런 무방비 야외 상태에서는 선뜻 베트콩이라도 나타난다면 나는 그대로 생포될 것이다. 주둥이와 발톱이 잘린 독수리 같은 나를 그들은 그대로 그들의 정글로 끌고 가든지 귀 한쪽만 잘라 가도 1만 피아스타(1백달러)는 족히 받을 것이다. 내 볼의 흉터를 더듬는 챠오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미의 손끝이 긴장으로 끈적였다. 유두(乳頭)를 앞이빨로 잘근거리던 나는 얼굴을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밤 늦게 귀가한 노동자 아버지가 나에게 몰래 팔 베개를 해주던 깊은 평화와 안식을 준다.  휴양지 나트랑 해변을 돌다가 내가 언제 다시 돌아와 이렇게 앉아 옛일을 회상하고 있었던 건가, 엉덩이가 축축하다. 담요가 솜마냥 물에 젖어 있다. 챠오의 지적과 같이 역시 나는 아직도 자폐증에 갇혀 있는 것일까? 날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다. 총류탄과 조명탄의 파열 빛이 남산의 폭죽마냥 아름답다. 혼헤오 산 ‘박쥐 16호 작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미친 놈이 예술의 극치를 전쟁 판이라고 했던가, 느기미. 밤바람이 춥다. 나는 담요를 질질 끌면서 막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튿날 나는 원대 복귀했다. 며칠 후면 나는 귀국선에 오른다. 인사계 할아범은 결국 나의 현지제대를 위한 ‘잔류신청서’를 사단에 아예 올리지 않은 것이다. 또 올라가 보았자 한쪽 귀창이 나간 상이병사인 나를 이곳에 남겨주지 않을 게 뻔하다. 괜히 한번 생떼를 써 본 것이다. 만삭 된 배를 더욱 내밀며 챠오는 울먹였다. 초승달이 대나무 가지 새로 부서지는 부대 앞에서 그미는 기약 없는 다짐을 했다. “나는 살고 싶어요. 지독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직은 우리민족 월남인 쿠엔 카오 키 수상이 있고, 내 고향 반닌의 하늘이 있고, 야자수 우거진 마을이 있지 않아요? 그리고 내 어머니, 병들어 누워 있지만 사랑하는 내 어머니가 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는 내 이웃과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무엇보다 다시 돌아올 당신을 기다리며 견딜 수 있어요. 아마 3년 아니 30년 그때쯤 우리나라도 전쟁이 끝나고 독립되어 있을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우핑챠오, 반드시 그렇게 될 꺼예요.”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세계와 평화와 우방의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던 용감한 한국군 여러분에게 본인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찬사를 주고 싶습니다. 그 동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을 여러분들은 극복해 주었습니다.” 월남 쿠엔 카오키 수상, 유엔군 웨스트 모얼랜드 사령관, 한국군 채명신 사령관, 백마부대 박현식 사단장 등의 귀국장병 전송행사가 열사(熱砂)의 나트랑 해변에 수 백 명 얼룩무늬 군복으로 물결치게 했다. 처음에 같은 배를 타고 왔던 해병대 청룡 부대원들도 보인다. 죽거나 다친 놈들은 비행기로 귀국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놈들만 이렇게 모래밭에 서 있는 것이다. 매년 약5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교체된다. 이 단순한 숫자 속에는 전사자와 부상자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에게는 아무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귀국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다. 비사앙! 누가 지금이라도 소리치면 또 긴급 출동해야만 될 것 같은 생각뿐이었다. A 까뮤 ‘이방인’의 주인공이 느끼던 땡볕 같이 그냥 햇빛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뜬금없이 ‘아리랑’이 흘러 퍼졌다. 건성 떠들고 흥청대던 장내가 일순 숙연해졌다. 아아, 이역 만리 남지나 해변에서 듣는 우리의 오랜 민요! 까맣게 잊었던 영혼 저 밑바닥에서 건져 올리는 가락이다. 곁에 쓰러져 가는 전우를 보고도 메말랐던 눈물이 오랜만에 봇물 터졌다. 뜨겁고 굵은 액체가 볼의 흉터를 타고 내렸다. 전쟁터 시체 주위를 서성거렸던 숱한 그림자들 박병헌 상병,  배태룡 하사, 최정웅 병장 그리고 중화상으로 실려간 안근호 대위, 아 그리고 처형된 응 남 비옛 ! 또 그리고 백 일병은 뒷골을 다쳐서 백치가 되었다. 자기의 이름도 모르고, ‘과거’를 전혀 몰랐다. 수도육군병원에 부랴부랴 달려간 부모님의 얼굴도 모른다고 했단다. 백치! 망각!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그의 집념과 법조문은 백치같이 웃는 그의 하얀 이빨 새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 모두의 야망이, 젊음이, 삶이 망각되고, 생채기가 났다. 장내는 참아 내는 울음 소리와 누구에겐지 모를 분노가 질척거렸다. 모래 위에는 또 다른 절망의 바다가 출렁거렸다. 약1년 전 우리를 태우고 맨 처음 이곳 전쟁터로 데리고 온 군함 쟈이거 호가 다시 ‘회귀선’(回歸船)이 되어 다가왔다. 뱃머리를 돌려 나트랑 외해로 나왔다. 유한 같은 무한의 수평선, 우리는 다시 부산 3부두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점으로 다시 회귀한다. 나는 반닌 마을안쪽 바다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의 한국애만 낳을 거예요. 당신의 아기만… 그리고 반닌 수용소에서 비옛의 아버지를 모셔올 꺼예요. 셋이서 같이 살아갈 겁니다. 아마 언젠가 당신도 다시 돌아오겠지요? 뒤돌아 보지 마세요.” 승선하는 사다리 쪽으로 챠오는 내 등을 자꾸 밀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애가 더욱 크게 울었다. 그 보자기 강보는 4중대 전우들이 월남아기 출생기념으로 자기들의 담요 끄트머리를 잘라 모자이크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소리치고 있다. 위로 유난히 벌어진 큰 귓바퀴가 분명 내 귀와 같다. 따이한 튀기다. 아기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져 가는 전쟁터 잿더미 속에서 오로지 하나의 생명만이 소리 높이 울고 있었다. 챠오 뒤에 엉거주춤 서 있던 그미의 어머니 아니, 나의 장모는 결국 주저앉아 손으로 땅을 쳐댔다. 나는 아기의 머리도 한번 못 만졌다. 아니 만질 수 없었다. “이제 깨달았어요. 내가 사랑한 것은 그이의 껍데기였다는 것을… 그러나 그 진짜 알맹이를 당신이 내 속에서 찾아 주웠어요… 평생의 보물이에요. 그 동안 남의 나라 땅에 와서 고생이 많았어요. 한국에 가면 여기 볼의 상처를 다시 잘 치료해 보세요.” 그미는 웃어 보였다. 환하게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나트랑 해변, 닌호아 전쟁터! 혼헤오 산, 혼 바 산 그리고 반닌 마을을 뒤로 두고 떠난다. 나는 얼굴의 흉터를 아니 심장의 흉터를 안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다음의 원점은 어디일까. 아니 내 생의 영원한 귀착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월남도 월맹도 미군도 나도 모른다. 사람 옷을 입은 원숭이 신(神)은 알까? 전혀 한 여인을 잊기 위해 뛰어든 전쟁터에서 나는 또 한 여인을 잃어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트랑 파도 소리도 들리고, 챠오의 겨드랑 냄새 같은 바다냄새도 났다. 어린애 울음 소리가 더욱 크게크게 들렸다. (끝)   *197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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